<74화>
마인하르트는 나의 충격에 쐐기를 박듯이 답했다.
“이 사실은 돌아가신 마리에트 님과 저. 그리고…… 헤일리안 대공과 그의 측근 할데바르트 백작만이 아는 내막입니다.”
황제에게 숨겼구나!
비로소 맞닥뜨린 진실에, 나는 입술이 피가 나도록 강하게 짓씹었다.
친아들인 에시메드조차 어둠 속성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그토록 증오했던 황제의 행적을 생각하면 어둠의 정령사의 아내와 딸이었던 이들을 헤일리안 대공비와 대공녀로서 결코 인정해 주지 않았을 것은 어느 누구에게 묻더라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친우였던 황제에게까지 모든 진실을 숨기면서…….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아내와 딸로 들인 이유가 뭐지?
정말, 사랑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하!”
나는 날카로운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떨구고 어지러운 심경으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원작에서 샤스티아의 전남편에 대한 언급 중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만약 마인하르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리에트가 샤스티아와 샤스티아의 딸을 핍박하며 해치려고 했던 이유는…… 설마.
“마리에트 님께서 헤일리안 대공비와 그 딸을 해치려 하셨던 이유를 알고 싶으시다 하셨지요.”
“……마인하르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샤스티아 프라이움의 죽은 남편이 아르카네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은 지혜의 정령왕께서 마리에트 님께 남기신 전언 중 일부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그토록 알고자 했던.
“이디스 님께서는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악녀의 비밀.
그가 벌였던 악행의 이면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나의 앞에 놓였다.
“마리에트 님께서 샤스티아 프라이움과 그 딸을 해하려 하셨던 이유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마인하르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들 본인은 남편과 아버지가 어떤 자였는지 알지 못하였으나……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한 아르카네의 체스 말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르카네의…… 체스 말이요?”
내가 멍하니 되물은 표현에 마인하르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아르카네는 또다시 세상을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수없이 생명과 세상에 위협을 가했던 과거가 존재하였으며…… 그로 인해 금제에 얽매인 그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지요. 그리하여 아르카네는 제 숭배자의 아내와 자식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교묘하게 판을 꾸며 나갔습니다.”
충격에 사로잡힌 나의 뇌리로 원작의 전개가 떠올랐다.
마리에트는 처참히 몰락하고, 샤스티아는 로베릭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헤일리안 대공비의 지위를 손에 넣는다.
제국의 백성들은 평민 출신의 여인이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황족의 배우자 다음으로 고귀한 자리에 올랐다며 샤스티아를 진심으로 추앙한다.
그렇게, 어디를 뒤져 보아도 더 이상 그녀를 적대하는 이는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세상의 운명이 아르카네의 개입으로 또다시 일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리에트 님을 움직였습니다.”
“마인하르트…….”
“이것이 바로 마리에트 님께서 샤스티아와 그녀의 딸을 배척하며, 잔혹할 만큼 제거하려 애쓰셨던 것에 대한 모든 이유입니다. 오직 세상의 존립을 위해, 지혜의 정령왕에게서 부여받은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마리에트의 모든 맹렬한 적의, 질투, 잔혹함이 드러났던 장면을 다시 상기했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든 게 뒤집어진 시각으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로베릭을 향한 사랑, 샤스티아를 향한 질투.
그따위, 한낱 사감으로 악행을 벌였던 것이 아니었다…….
“지키기, 위해서…….”
어둠의 정령왕이 생명을 해치고 순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휘두르는 자들을 몰아내어.
세상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어째서,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건가요……? 어째서!”
마리에트는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이 막중한 사명을 홀로 감내하며 모두에게 증오받는 길로 향했다.
그 끝에서 자신을 외면하고 버린 남자의 아이를 낳았고.
……아무런 명예도 되찾지 못한 채, 차가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할아버지에게만이라도, 아니, 어둠의 정령은 대륙 어느 나라에서나 배척받는 존재잖아요, 황제와 제국민들에게 밝혔더라면, 그랬다면 어머니가 악녀로 오해받았을 일은 없었잖아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다 못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갈 곳 잃은 분노와 슬픔에 몸서리치며 마인하르트를 붙들고 외쳤다.
“……저도 그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비명과도 같은 책망 앞에서.
마인하르트는 울듯이 웃으며, 처연히 속삭였다.
“모두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헤일리안 대공이 약혼녀를 저버리고 데려온 여자와 그 딸이, 어둠의 정령사의 아내이자 혈육이라고 토로하고 싶었습니다.”
그 처절한 절망 어린 목소리에, 나는.
울분을 토해 내던 것을 멈추고 망연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게 그러한 독단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이 세상에는 균형이라는 게 존재하더군요.”
그가 괴로이 읊조린 말속에서 등장한 ‘균형’이라는 단어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마리에트 님께 사명을 내려 주셨지만,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 ‘중립’은 그 이상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어째서, 막아서는 건데?
“아르카네는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잖아요,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존재인데, 왜……!”
나는 답답한 마음에 외쳤다.
“아르카네는 어둠의 정령왕, 태고의 정령들 중에서도 가장 최초에 존재하던 이입니다.”
“…….”
“중립을 지키는 존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절대적인 섭리는 선과 악,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내려 준다고는 하지만…… 지혜의 정령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중립’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아르카네이며, 그는 결코 우주의 어둠을 저버릴 마음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뭐라고요……?”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던 나는 마인하르트의 옷자락을 우그러뜨리듯 쥐며 천천히 읊조렸다.
“그게 대체 뭐가 중립이고, 균형이에요? 누가 봐도 분명하게 선과 악 중에서 악의 편을 들어주고 있잖아요!”
“……이디스 님.”
화가 치밀었다.
가슴속이 홧홧하게 타올라,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균형을 수호한다는 절대자로 인해 마리에트는 모두에게 배척받다 비참하게 생을 떠났다.
험난한 가시밭길에 발을 들인 것도, 오직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을 어둠의 손아귀에서 지켜 내기 위함이었는데.
그랬는데……!
“헌신과 희생 끝에 남은 게…… 악녀라는 오명과 세상 모든 이의 혐오와 비난이라니.”
끝내 나는 울먹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건 정말 너무하잖아요…….”
너무나도 잔인하다.
아르카네도, 마리에트 한 사람에게 그런 사명을 맡긴 지혜의 정령왕도, 이 저열한 싸움판을 관망하며 악을 편애하는 중립이라는 존재도…….
마인하르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숨죽여 흐느끼는 나를 보듬어 안은 채, 간간이 나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나는 마리에트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는 유일한 이의 품에 기대어 슬픔을 흘려보냈다.
이로써, 나는 가장 궁금해하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마리에트 아이딘 바스테반은 악녀가 아니었다는 진실을.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사명을 짊어진 채 자신의 온 생과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 * *
한편 마인하르트의 안색은 복잡했다.
아직 온전히 고백하지 못한 진실이 그의 내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더 하고픈 말이 있는 것을, 애써 감추며 품 안을 파고드는 작은 소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운명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비밀로부터 건져 낼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 * *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의 주인, 로샨 제국의 황태자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는 몰아낼 수 없는 우울감에 잠겨 괴로워했다.
오늘, 중신들이 다시 한번 후계자 교체에 대한 논의를 황제에게 올렸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황태자는 아무런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평범한 인간.
역대 로샨 제국의 모든 황제는 정령사였으며, 그 승계에 단 한 번의 이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불의 정령왕께서 자취를 감추셨다고는 하나 이토록 위태로운 상황에 정령사가 아닌 황제가 등극한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니, 황태자 지위를 2황자에게 내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다…….
그렇게 주장한 것이었다.
당연히 황제는 분노를 표하며 이변 없이 1황자 발레리안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을 다시 한번 천명했지만 중신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헤일리안 대공조차, 대공녀가 납치극에 휘말린 이후 관조를 표방하며 황제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는 실정이었으니.
황제와 황태자는 그야말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이디스.”
발레리안은 붉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한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직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그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여자아이는 처음으로 보았다.
알레아도 보기 드문 미소녀이긴 했지만 이디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이를 자신의 배필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솔직하게 기뻤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은 자신의 반려로서 앞으로의 삶을 함께하고, 황제로 즉위했을 때 황후가 되어 함께 로샨 제국을 다스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행복해했다.
그랬는데…….
‘에시메드!’
그 소름 끼치게 끔찍한 것의 이름을 밝은 목소리로 부르며,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그것의 손을 꼭 쥐던 소녀의 모습이 아직도 잊을 수 없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인간들의 황제와.]
[자신들의 지배자를 믿는 이들에게 친히 밝히니.]
[그대. 로샨 제국의 황제가 죽음이라는 거짓으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버려진 성에 유폐시킨 로샨 제국의 숨겨진 2황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
[그가 바로 내가 축복한 아이,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의 진정한 반려자이다.]
그것뿐일까.
생명의 정령왕이 모두의 앞에서 발레리안을 부정하고 에시메드를 이디스의 반려자로 천명하였고.
눈앞에서 약혼 상대를 빼앗겼다.
또한 자신이 한낱 하위 정령의 축복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아버지께선 곤경에 처하셨다.
그런 와중에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는 날이 갈수록 그 입지가 단단해지며 헤일리안 대공을 비롯한 중신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이러다, 결국 나는…….”
에시메드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발레리안은 두려움에 차 중얼거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