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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75)화 (76/141)

<75화>

“전하?”

“아……!”

그 순간, 청아한 목소리가 의아한 기색을 담고 조용한 허공에 울려 퍼졌다.

발레리안은 황급히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알레아, 네가 갑자기 어쩐 일로…….”

“무례를 범해 송구합니다. 시종들이 모두 물러가 있던 터라, 방문을 알리지도 못했는데 생각 없이 들어와 황태자 전하를 놀라게 하였군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내가 하던 혼잣말을 들었을까?

아니야, 설사 들었다 해도 별다른 중요한 내용은 섞여 있지 않았으니까…….

불안을 감추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발레리안은 곧 이런 작은 일 하나에도 조마조마해하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져 입을 꾹 다물었다.

에시메드는 모든 일에 앞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이 옳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매사에 담담하고, 맞닥뜨리는 상대가 어떤 이든 간에 오만을 잃지 않고 우위를 선점하는 것이다.

어쩌면, 에시메드가 어둠의 정령에게 축복받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밀려나고 에시메드가 황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에시메드는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

고뇌에 사로잡힌 발레리안의 안색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알레아는 상냥히 미소 지으며 황태자의 곁으로 다가가 다정히 속삭였다.

“한눈에 알 수 있네요. 전하, 고민이 있으신 거죠?”

“……알레아.”

자신의 마음을 읽어 내고 다독여 주는 이는 알레아밖에 없었다.

알레아라면…… 두려움을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각별한 사이였으니까.

발레리안은 울적한 심정으로 알레아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유력 가문의 귀족들과 중신들의 대다수가 에시메드를 새로운 황태자로 지지하고 있으며, 자신은 언제 폐위당하게 될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렸다고.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피가 마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어째서 나는 정령의 축복을 받지 못한 걸까……? 에시메드와 내가 다를 것이 뭐가 있다고!”

발레리안은 괴로이 중얼거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로샨 제국의 황제가 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때, 알레아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뜻밖의 이야기에 발레리안은 고개를 들어 서러운 눈빛으로 알레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알레아, 나는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했고…….”

“전하, 세상에는 축복받은 이들보다 축복받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아요.”

알레아는 간곡한 어조로 말하며 발레리안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전하께서는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는 자애로운 군주가 되실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요.”

소녀의 청아한 낯 위로 짙은 수심이 드리웠다.

“그리고 아뢰옵기 송구하지만…… 2황자 전하께서는 분명 모든 면에서 출중하시나, 냉혹하고 권위적인 성품을 지니셨기에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는 군주는 되지 못하실 거예요. 자기 자신의 뛰어남에 도취되어 폭압적인 정치를 행하는…… 폭군이 될 가능성이 높지요.”

발레리안은 홀린 듯 알레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때까지 어느 누구도 에시메드가 황위를 이어받았을 때 저러한 결과가 벌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또한 그토록 독선적인 2황자 전하의 곁에서…… 분명, 이디스는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말간 분홍빛을 머금은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알레아는 슬픈 목소리로 읊조렸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저는 이디스의 언니예요. ……제 자매가 너무나 걱정되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애초에 2황자 전하가 아닌 황태자 전하와 그 아이가 이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디스가 불행해질 것이다.

발레리안은 알레아가 내뱉은 먼 훗날에 대한 상상에 정신없이 잠겨 들었다.

그래, 그 괴물 같은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가 비록 지금은 이디스에게 온순하게 행동한다지만 자신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도 이디스에게 제 성미를 맞추려고 하겠는가?

이디스의 마음과 자유는 존중하지도 않은 채 억압하고 지배하려고만 할 것이다.

“……알레아, 네 말이 맞아. 에시메드의 곁에서 이디스는 절대 행복할 수 없어.”

발레리안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이 일순간 믿을 수 없이 서늘한 온도로 가라앉았으나.

곧 이전의 다정함을 머금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전하, 이디스를 위해서라도 조금 더 강경하게 황태자 지위를 지키셔야 해요.”

“그래, 고마워. 네 덕분에…… 다시 한번, 에시메드와 맞설 의지를 다지게 되었어.”

발레리안은 결의 어린 목소리로 답하며 알레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알레아는 발레리안을 향해 순하디순한 미소를 지으며 답을 대신했다.

그 어떤 귀족들이 황태자 교체를 지지하더라도 황제이신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편이다.

또한 타국에서도 어둠의 정령에게 축복받은 황자가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대 로샨 제국의 황위에 오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길 테니…….

이 내가, 에시메드를 몰아내고 순리대로 로샨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디스를 그 냉혹한 괴물에게서 구원하고야 말 것이다.

발레리안은 한배에서 태어난 혈육을 향해 칼을 겨눌 의지를 굳게 결심했다.

* * *

“속 쓰려…….”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어느덧 노을이 짙게 깔린 하늘의 저변을 응시했다.

알레아의 친부이자, 원작의 여주인공인 샤스티아의 전남편은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하던 정령사였다.

마리에트는 아르카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그녀의 시도는 실패로 끝을 맺었고.

세상은 마리에트를 악녀로 기억하고 있으며, 샤스티아와 알레아는 아마도 아르카네의 뜻대로 헤일리안 대공가를 장악하여 현재까지도 순탄히 살아가고 있었다.

중간에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로 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잖아?

“……아르카네의 다음 계획은 뭐지?”

지혜의 정령왕의 뜻에 따라 움직인 마리에트를 처참히 몰락시켰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더 이상의 대적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혜의 정령왕, 로어는 마리에트가 패배한 이후 덩달아 자취를 감추었고.

아르카네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낸 오리에드를 바롯한 다른 정령왕들이 존재한다고는 하나 이와 같은 깊은 내막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엇 때문에, 샤스티아와 알레아를 로베릭의 곁에 붙인 거야?”

로베릭은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옛일에 불과했다.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이 감정이 격해지곤 할 때 마치 바람의 정령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휘둘리는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그가 마리에트 님을 저버렸기 때문이지요.’

‘빛의 정령왕과 생명의 정령왕은 비록 지혜의 정령왕과 같이 아르카네를 강경히 적대하는 파벌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르카네가 보낸 여자에게 홀려 모든 일을 그르친 원흉이나 다름없는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을 더 이상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애로운 빛의 정령왕은 축복의 일부분만은 남겨두고 떠났다고 하나, 두 정령왕의 축복을 거의 모두 잃어버린 로베릭은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나 사실상 영혼을 지탱하는 근간의 다수를 잃어버렸으니 그보다 더 위태로울 수가 없는 상태이지요.’

‘바람의 정령왕은 그런 로베릭이 안타까웠던지 축복을 거두지 않았으나 가장 중요한 주 속성 정령의 축복을 잃은 여파로 유일하게 남은 하나의 축복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터라 감정이 흐트러짐과 동시에, 바람의 정령에게 마음대로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은…… 빛의 정령왕과 생명의 정령왕이 자신에게 실망하여 축복을 거두고 떠나갔음에도, 오히려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지 않고 마리에트 님을 원망하더군요.’

“머저리 같은 자식…….”

마인하르트가 들려준 전말을 회상하던 나는 로베릭을 향해 드는 짙은 혐오를 삼키지 못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체 사랑 따위가 뭐라고, 모든 일을 그르쳤을까.

“샤스티아와 알레아는, 자신들이 아르카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겠지.”

원작이 진행되던 시점에 알레아는 갓 걸음마를 뗀 아기였고, 샤스티아는…… 그 유약함을 옹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나 흉계를 꾸며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인간 부류는 아니었다.

“그럼 내가 읽었던 원작은, 대체 뭐지……?”

결국 원작은 어둠의 정령왕이 짜 놓은 거대한 판에 불과했던 것인데, 그걸 평범한 로판 소설처럼 서술하여 출간한 ‘작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고비를 넘으니 또 다른 고비가 나오는구나…….”

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며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립이라는 작자가 아르카네를 편애하든 말든…….”

내가 샤스티아와 알레아의 비밀을 침묵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나.

문득, 어째서 나만이 이런 복잡한 고민거리로 속을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알레아, 그 애도 자기 아버지가 어떤 자였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앙심이라 불러도 좋다.

나는 내 어머니가 그토록 처참하게 추락했듯이, 알레아의 친부가 추악한 작자였다는 진실을 그 아이가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아야만 이 분한 심정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황궁에서 지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알레아를 별궁에 불러들이기로 결심했다.

* * *

“단둘이서 만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디스. 네가 나를 초대해 주어 정말 기뻐.”

“……어서 와, 알레아.”

며칠 후, 선뜻 내 초대에 응한 알레아는 흠잡을 데 없이 기품 어린 모습으로 나타나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의미 없는 가식적인 이야기가 두어 마디 정도 지나갔다.

“더 이상 네 앞에서 연기하고 싶진 않아. 너를 부른 본론부터 말할게.”

가면을 쓸 필요도, 마음도 없다.

“우리가 그럴 만큼 좋은 관계도 아니니까.”

“……무슨 용건인데?”

알레아 또한 내가 자신을 초대한 연유가 순전히 자매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임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 네 친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어?”

“…….”

그리고 내가 입을 열어 조용히 읊조린 물음에.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소녀는 그 순간 낯에 드리워졌던 모든 표정을 지워 내며 소름 끼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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