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6. 지혜의 성역, 리테라
“대체 언제까지 황태자 교체에 대한 논쟁을 이어 나가야 하는 겁니까.”
켈트 백작이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토록 강경하게 황태자 교체는 없을 것이라 천명하시니……. 우리가 아무리 주청을 드려도 별수 없지요.”
오펜하이머 후작이 서류를 읽어 내리며 느릿하게 읊조리자 호퍼 후작이 탁상을 소리 나게 내리치며 격양된 어조로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도 너무하십니다! 불의 정령왕께서 종적을 알 수 없이 사라지셨다는 사실도, 1황자 발레리안 전하께서 어떤 축복도 받지 못한 범인이라는 사실도 함구하시며 신하와 로샨의 백성들, 아니! 세상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셨는데 진정 이에 대해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못한단 말입니까?!”
“호퍼 후작, 진정하십시오.”
“벌써 5년이 넘는 시간을 참아 왔습니다. 더 이상은 아무리 황제 폐하더라도 그분의 독단을 넘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찌 하위 정령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황족을 차기 황제로 올리시겠다는 것인지! 진작에 2황자 전하를 황태자로 봉하셨다면 이런 지지부진한 논쟁으로 국정마저 제쳐 두고 시간을 소모할 필요도 없었거늘!”
호퍼 후작이 토해 낸 열변에 좌중의 수많은 귀족들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뜻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시선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2황자 전하의 부속성 정령들은 어둠의 권속에 속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상황을 관조하던 유프스 백작의 발언에 엘티시아 백작이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재앙이 종식된 지도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어둠의 정령사라면 그 본인의 자질과 성품마저 차치하고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증오해야만 하는 겁니까?”
프레데릭 백작이 발언했다.
“맞습니다. 에시메드 전하께서는 정령사로서의 재능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학문과 정치적 감각을 따지더라도 모로 보나 발레리안 전하보다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오히려 천성적으로 유약하신 발레리안 전하보다는 에시메드 전하께서 황태자 시절의 오스발트 폐하를 닮으셨건만…… 정작 폐하께선 늘 발레리안 전하를 우선하시니.”
“헤일리안 대공께서는 여전히 명확한 뜻을 밝히지 않으시는 겁니까?”
켈트 백작이 꺼낸 물음에 좌중이 침묵에 잠겼다.
칸델 공작 가문과 바스테반 공작 가문이 저마다 다른 연유로 멸문당해 사라진 이후.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대공은 로샨 제국에 속한 귀족 가문의 유일무이한 수장으로서, 모든 귀족의 뜻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다.
“……적법한 후계자이신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께서는 약혼자이신 2황자 전하를, 대공비의 친자이신 알레아 세라피나 헤일리안 대공녀께서는 현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고 계신 실정입니다. 두 여식이 각자 다른 황자 전하를 지지하는데, 헤일리안 대공 각하께서도 고민이 깊으실 겁니다.”
“그래도 이제 그만 뜻을 정하셔야지요. 2황자 전하께서 얼마 전 열네 번째 생일을 맞이하셨습니다. 황태자를 교체하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성년식을 치르는 나이는 열여섯.
2황자 에시메드가 성년의 해를 맞이하기까지 이 년여의 시간이 남은 지금, 차기 황제가 될 황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귀족과 중신들의 의견이었다.
“헤일리안 대공비는 부군이 알레아 대공녀의 뜻을 지지하시도록 애를 쓴다는 모양이지만,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더군요. 헤일리안 대공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흠잡을 데 없이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이디스 대공녀님을 지극히 총애하고 계시는데, 친자식도 아닌 알레아 대공녀에게 마음이 가시겠습니까. 그저 형식적인 부인이자 그 여식을 존중하시느라 확고한 의견을 표하지 않으시는 것이지, 헤일리안 대공께서도 분명 2황자 전하를 지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드물게도 젊은 나이에 가문의 수장직을 이어받은 아슬란 후작이 비소의 기색이 역력한 어투로 이야기하자 몇몇 귀족이 헛기침을 흘렸으나, 사실상 그의 발언에 이견을 표하는 인물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 자. 모두 심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오늘은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 아닙니까. 연회 참석을 위한 준비도 마쳐야 하니 이만 해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프스 백작의 중재 하에 길었던 귀족원 회의는 끝을 맞이했다.
“……이디스 대공녀께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신다면, 시오른이 복권될 가능성도 높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인파가 물 밀듯 떠나간 자리, 한산해진 의회장에 남은 유프스 백작은 쓸쓸한 기색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저토록 완고하시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깊은 한숨만이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 남겨졌다.
* * *
“알레아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니?”
“거의 끝마치셨답니다. 한데 마님. 황제 폐하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연회인데…….”
“왜 그러니? 어서 말하렴.”
헤일리안 대공저의 시녀장은 치장을 마지막으로 손보는 샤스티아의 뒷모습을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황비 전하보다는 조금 수수하게 치장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백금으로 주조하여 진주 수백 개로 장식한 관을 올리고,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알알이 매달려 휘황하게 빛나는 목걸이.
마찬가지로 하얀 개통의 색을 띤 장신구.
거기에 쐐기를 박듯, 마치 결혼식을 치르는 신부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면 비록 황후는 아니라 하나 황제 폐하의 유일한 아내로서 제국을 다스리는 황비의 심기를 거스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연회의 주인공은 황제 폐하시고, 황비 전하께서는 그분의 유일한 아내로서 신부를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으실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지난 몇 해 동안 내 차림에 대해 지적한 적이 없으신 분이신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니?”
샤스티아는 수심이 어린 낯빛으로 묵직한 귀걸이를 매만지며 나직하게 답했다.
시녀장은 그 순진한 언사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곤혹감에 잠겼다.
“그동안은…….”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위신을 존중하기 위해 황비가 인내한 것일 뿐.
점차 세력의 구도가 명암을 가르는 이 위태로운 시점에서 여전히 과거에 잠겨 살아가는 대공비의 선택은 너무나 어리석게 여겨졌다.
“내가 헤일리안 대공비로서 위엄을 보여야 알레아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아무리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 로베릭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적법한 부인의 자식은 알레아니까.”
“……마님.”
그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아집이었다.
아무리 적법한 부인의 자식이면 뭐하나.
정작 대공 각하의 피는 한 방울도 물려받지 못한 의붓 여식에 불과한데.
게다가 외척 세력은 전무하다고 표현해도 문제가 없을 지경이니, 대공 각하께서 떠나신 이후 여생을 생각한다면 존재하지도 않았던 위엄을 세우는 것보다는 차기 후계자인 이디스 대공녀에게 몸을 굽히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처세이건만.
“가자, 로베릭이 기다리고 있겠어.”
시녀장은 후일의 몰락한 처지가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이 그려지는 대공비의 모습을 동정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사를 올렸다.
* * *
“아, 잠시만요! 대공녀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점검해 드릴게요.”
“……그만 좀 하면 안 되겠어? 멜리사.”
“이제 대공녀님께서도 열두 살이나 되셨는데, 예전처럼 어린아이 같은 모습보다는 서서히 꽃망울을 틔워 가는 아름다움을 모든 이에게 보여 주어야지요.”
지친다…….
나는 거의 세 시간이 넘도록 치장에 몰두하고 있는 정신 나간 시녀들을 향해 혀를 내두르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헤일리안 대공녀로서 살아온 시간도 어느덧 다섯 해로 접어들었고, 나는 열두 살이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내 외양을 가꾸는 데에 열성이지는 않았던 시녀들은 거짓말처럼 내가 열두 살이 되자마자 당사자는 바라지도 않던 미용에 심혈을 가하기 시작했다.
‘피부를 맑고 투명하게 가꿔 주는 약초를 배합한 팩을 가져왔습니다. 대공녀님, 잠시 눈을 감아 주세요.’
‘대공녀님의 머리카락을 더욱 윤기 흐르고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이제부터 매일 한 차례씩 오일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두피 마사지도 함께 해 주면 더욱 효과가 좋답니다.’
‘숲의 정령들이 기거하는 그라시아 숲에서만 자라난다는 식물, 차클라의 열매에서 짠 즙이에요. 꾸준히 복용하면 정령처럼 가볍고 날씬한 몸매를 가지게 해 준답니다.’
그것 때문에 일상이 성가셔진 것도 모자라, 연회에 참석할 일이 생기면 평소의 몇 배는 더 극성스러워지니.
“자, 이제 끝났어요! 2황자 전하께 시종을 보내고 오겠습니다.”
멜리사가 흐뭇한 눈빛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흰색 프릴 드레스 위로 에시메드와 복식을 맞춰 검은색 베이스에 황금빛 자수가 놓인 코트를 걸친 나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다, 손을 들어 머리를 장식한 금빛 체인이 달린 검은 리본을 살짝 건드리며 지루한 시간을 때웠다.
“이디스 대공녀님, 2황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답니다.”
“그래.”
드디어 연회장으로 향할 때가 되었다.
나는 거울의 앞을 떠나 문가를 나섰다.
* * *
“헤일리안 대공 각하와 헤일리안 대공비, 알레아 대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을 채운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헤일리안 대공 일가를 향해 일제히 쏠렸다.
그중에는 황제와 황비 눈길 또한 존재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공비의 복식을 바라보던 황비의 기색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어서 오게나, 헤일리안 대공. 대공비와 대공녀도 와 주어 고맙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시기를, 로샨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대공 일가가 황제 내외와 간략한 인사를 주고받는 광경을 응시하던 귀족들은 곧 등장할 또 다른 헤일리안 대공가의 일원,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를 화제로 올려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에시메드 하스 루에이리 2황자 전하와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대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때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 로샨 제국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황자와 그 약혼자가 등장하자 연회장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드디어 등장하시는군.”
“2황자 전하께서 그렇게나 아름다우시다던데…… 이디스 대공녀께서도 어린 나이지만 훗날이 기대되는 어여쁜 외양을 지니셨다고 하지요?”
“헤일리안 대공 각하의 뒤를 이은 로샨 제국의 차기 미남은 아마도 2황자 전하가 되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나돌고 있다잖아요.”
수많은 말소리 사이로, 드디어 2황자와 이디스 대공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