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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78)화 (79/141)

<78화>

* * *

에시메드는 은색 자수가 놓인 검은 정장에 마치 자신의 눈동자를 녹여 낸 듯 짙푸른 보석으로 크라바트를 고정하여 성장을 갖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연회에 파트너로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시끄러운 소음과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기에.

후원을 통해 연회장으로 향하는 고요한 분위기의 널따란 길을 거닐던 내가 문득 꺼낸 물음에 에시메드가 대답했다.

“정식으로 데뷔탕트를 치른 것은 아니지만, 이제 너도 열두 살이 되었으니까. 작년까지만 해도 네 아버지를 따라 입장했었잖아.”

“……아. 진짜 싫었어, 그 분위기. 대공비는 늘 땅 파고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울상이나 짓고 ‘아버지’는 귀찮게 계속 말이나 걸고 말이야.”

성장기를 맞이하며 이전의 비슷했던 눈높이가 훌쩍 올라가고,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나와는 달리 설핏 청년의 모습이 엿보이는 소년으로 자라난 에시메드였지만.

팔짱을 끼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딱 좋은 키 차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새삼스러운 심경으로 처음 만났던 때와는 정말 많이 달라진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웃긴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너 혹시 로샨 제국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절세 미남의 계보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뭐?”

장난스레 꺼낸 말에 에시메드는 별 이상한 것을 다 듣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전 세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할아버지셨대. 뭐라더라, 연약한 샌님 같은 귀족 남성들과는 차원이 다른 건강한 야성미가 넘쳐흐르던 미남이셨다고 하더라.”

“……그래. 네 외조부는 지금도 강건하시니까.”

에시메드는 어쩐지 이해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지금 로샨 제국 최고의 절세 미남은…… 우리 아버지래.”

“……그건 동의하지 못하겠는데.”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경악하면서도 할아버지에 대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시녀들의 평은 곧바로 수긍할 수 있었는데, 로베릭은…….

“그렇지?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악감정 때문에 인정을 못 하겠어. 그 정도로 미남이 없나?”

마인하르트도 로베릭만큼 잘생겼다고 생각하는데.

그 빌어먹을 가문 때문에…… 인정도 받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처지니.

“헤일리안 대공을 거론하니 신뢰도가 확 깎이네. 너도 그런 낭설에는 귀 기울이지 마. 그야말로 겉껍데기만 보고 판단하는 수준인 것 같은데.”

“……차기 미남은 너라던데.”

“……뭐?”

내가 조용히 읊조린 말에 에시메드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으로 커다래진 짙푸른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나는 생긋 웃었다.

“그건 나도 동의해. 어린 귀족 영식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네가 가장 잘생겼을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

“…….”

여전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가운 냉기가 스며드는 것 같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은 나의 말에 알 수 없는 동요를 그 낯 위로 드러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자, 어서 가자. 이러다 늦겠어.”

생각보다 심하게 놀라네.

나는 에시메드의 팔을 톡톡 두드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연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에시메드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에시메드와 내가 연회장에 입장하자 수많은 시선이 온몸에 꽂히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밀려왔다.

나는 표정 관리도 안 하고 에시메드를 노려보는 황제를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올려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시기를, 로샨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2황자. 이디스 대공녀도 함께 왔군요.”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황비는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대들이 폐하와 나를 향해 걸어올 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답니다. 어쩜 이토록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

“과찬이세요, 황비 전하.”

엘티시아 백작 가문 출신의 황비는 슬하에 3황자를 두긴 했으나, 자신의 친자가 죽은 황후가 남긴 두 황자들과 황위를 두고 겨룰 만한 그릇이 아님을 일찌감치 깨닫고 2황자 에시메드를 향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황제는 황비를 영 탐탁지 않아 하는 눈빛으로 흘긋 돌아보았지만 말을 아꼈다.

황비와는 줄곧 교류하며 지내 온 원만한 관계였기에, 나는 웃으며 황비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물러났다.

“……우리, 서로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말자.”

사방에서 날아드는 이글거리는 시선에 웃는 얼굴로 나직이 속삭이며 팔짱을 더욱 단단히 끼자 에시메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꼭 잡고 있어.”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다가온 이는 로베릭이었다.

“이디스. ……2황자 전하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여전히 에시메드를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로베릭은 곧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입장은 2황자 전하와 했지만, 너는 아직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않은 어린 나이야. 아버지와 함께 있자꾸나.”

“…….”

뒤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대공비나 어떻게 하고 제안하지?

“아니요, 2황자 전하야 어린 시절부터 남매처럼 자라 온 사이인걸요. 염려하실 필요 없으니 아버지께선 대공비 님과 함께 계세요.”

설사 그렇게 했더라도 내가 당신과 함께 있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디스.”

로베릭은 내 거절에 낯빛을 굳히며 재차 권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곧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고려한 듯 손을 거두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렇다면 한 시간 정도만 머무른 뒤 돌아가렴. 어린 네가 홀로 오랫동안 머무를 자리는 아니니.”

“……네.”

어차피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대답하자 로베릭은 그제야 굳었던 안색을 조금이나마 풀며 자리를 떠났다.

“과보호네.”

“……징글징글할 지경이야.”

상황을 모두 지켜본 에시메드가 짤막하게 평했다.

나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빠르게 속삭였다.

“준비했던 건 언제쯤 시작할 생각이야?”

자리를 옮기며 에시메드가 물었다.

“……글쎄, 한…….”

“우리 황태자가 아비를 위해 아주 귀한 선물을 바치는구나!”

바로 그 순간, 과장된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커다란 목소리로 황제가 외쳤다.

나와 에시메드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 앞에는 황태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황의 탄신일에 어떤 선물을 바쳐야 할까, 고민 끝에 옛 드라이어스 왕국의 유산, 꽃을 피우는 데 성공한다면 가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식물 클리티에를 바치나이다.”

“그래! 아주 흡족하구나. 이 아비가 정성 들여 황태자가 선물한 이 클리티에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노력하마.”

황제는 겉보기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는 푸릇한 줄기와 잎이 돋아난 식물이 든 작은 화분을 시종에게 넘겨주며, 마치 좌중의 모든 이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하나 오랜 노력 끝에 꽃을 피워 내는 데 성공하면 그만큼 특별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는 식물이다. 쉽게 피워 낼 수 있다 하나 덧없이 피고 지는 화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진귀하지.”

“……에시메드.”

눈을 가늘게 좁히고 황제의 말을 듣던 나는, 곧 그가 연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 나직이 에시메드를 불렀다.

“지금 하자.”

쉽게 피워 낼 수 있다 하나 덧없이 피고 지는 화초는 에시메드를 비유하는 것이고.

겉보기에 평범하나 오랜 노력 끝에 꽃을 피워 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클리티에는 황태자를 비유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정령의 축복을 받지 못한 황태자라고 하나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지금?”

“그래. 저쪽도 선물을 주는데, 우리도 줘야지.”

하지만 그 비유는 틀렸다.

황태자가 어딜 봐서 오랜 고생을 감수하고 정성을 들여 길러 낼 만큼 특별한 가치를 품은 존재란 말인가.

그저 어떠한 정령의 축복도 받지 못한 황태자를 구색 좋게 포장하기 위해 이런 우스운 극을 연출해 낸 것이다.

실상, 황태자 발레리안 하이네 루에이리는 자신의 부황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 내지 못하는 유약한 아들에 불과한데.

“황제 폐하, 2황자 전하와 저 또한 폐하의 탄신일을 기리기 위해 선물을 올리고자 합니다.”

에시메드와 나는 황제의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그를 향해 선물을 올리겠다는 뜻을 밝히자, 황제의 눈빛에 옅은 불안과 경계가 스쳐 지나갔으나.

“……이디스 대공녀가 2황자와 함께 짐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니.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곧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팔짱을 풀고 에시메드에게서 몇 발자국 정도 거리를 벌렸다.

준비했던 대로.

에시메드와 눈빛을 교환한 후 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르륵-

“세상에!”

“이건…….”

청아한 소리가 귓가를 두드림과 동시에, 광활하리만큼 넓은 연회장의 가장자리의 허공에 가느다란 물줄기가 생겨나 화려한 불빛을 투과하며 영롱히 반짝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공을 향하던 때,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공중을 유영하던 물은 곧 연회장의 중심.

황제와, 나의 위로 모여들며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원을 이뤘고.

펑-!

“꺄악!”

“어머, 저건…….”

곧 비산하는 물방울을 튀기며 터져 나가는 듯싶었으나, 그곳에 남은 것은 다름 아닌…….

“피닉스……?”

일렁이는 투명한 물이 조각해 낸 거대한 새의 형상.

로샨 제국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피닉스의 모습이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샹들리에의 불빛을 투과하여, 마치 빛의 전령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던 피닉스의 모습을 감상하던 이들은 곧 허공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새하얀 서리를 발견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피닉스의 형상을 조각하며 내가 허공에 퍼뜨렸던 수분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얼어붙으며, 공중에 날개를 펼치고 떠오른 피닉스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다.

사가가각-

“!”

서리가 일렁이는 피닉스의 몸체에 닿은 순간, 급속도로 하얗게 번져 가며 얼어붙던 새의 형상은 곧 얼음으로 조각된 피닉스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건…… 2황자 전하께서?”

“분명 물로 형상화했던 피닉스가…… 종래엔 얼음으로 완성되었군요.”

하아-

하얗게 얼어붙은 숨결을 내뱉은 에시메드는 황제를 향해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했다.

“이디스 대공녀와 함께 물과 얼음으로 완성한 피닉스 조각상을 부황의 탄신일을 기리며 바치나이다.”

“……어째서, 불이 아닌 물과 얼음으로 로샨의 상징인 피닉스를 조각한 것이지?”

굳은 안색으로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피닉스의 형상을 올려다보던 황제는 거의 질책하는 듯한 어조로 에시메드를 향해 말했다.

“불의 정령왕께서 사라지신 이후, 부황께서 다스리시던 불의 권능이 나날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에시메드는 시리도록 푸른 눈을 들어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을 시선 속에 오롯이 담으며 말했다.

“비록 불의 축복을 받지 못해 선조들처럼 타오르는 피닉스의 형상을 창조해 낼 수는 없으나 제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 고대의 영광을 재현해 보았나이다.”

“……저것은, 진정한 피닉스가 아니다!”

황제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답했다.

사위가 숨 막히는 침묵에 사로잡혔던 때.

“더 이상 그 누구도 고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빛나는 피닉스의 형상을 조각해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피닉스를 기리던 오랜 전통을 포기하고 멈춰 버린다면 로샨 제국의 정신은 끊겨 버리고 말겠지요.”

차분히 이어지는 에시메드의 이야기를 듣던 황제의 안색이 점차 당황으로 물들었다.

“비록 불로써 창조해 낼 수는 없으나, 그 방법이 어찌 되었든 피닉스를 기리던 선조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 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설사 불의 정령왕께서 떠나셨다 해도 로샨 제국의 시황제로부터 계승된 민족의 정신은,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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