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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79)화 (80/141)

<79화>

에시메드의 말이 끝나고 장내에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황제의 분노로 내려앉았던 침묵과는 달랐다.

그 속에는…….

“황제 폐하께서 노여워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폐하. 선조의 전통을 정확하게 실현할 수 없다 하여 관습을 이어받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면, 2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셨듯이 결국 민족의 정신은 끊기고 깊은 단절만이 생겨날 뿐입니다.”

나는 에시메드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무릎을 꿇고 황제를 향해 말했다.

“불의 정령왕께서 사라지신 현재, 로샨 제국은 전에 없던 위기와 시대의 전환을 맞이하였습니다. 하니 황제 폐하께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 너른 마음으로 앞장서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곡히 청하나이다.”

“……폐하, 저 또한 2황자 전하와 이디스 대공녀님의 뜻에 탄복하여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 순간, 어떤 이가 인파의 바깥으로 걸어 나와 에시메드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의 뜻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다름 아닌 켈트 백작이었다.

세월이 깊은 흔적을 남긴 늙은 사내의 눈빛에 서린 것은 그보다 진실할 수 없는, 로샨 제국을 향한 애국심이었다.

“2황자 전하와 이디스 대공녀께서 폐하를 향해 올리셨던 청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분들보다 몇 배의 세월을 살아온 소신에게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어찌 그토록, 변화 없이 고인 생각을 충심이자 지극히 당연한 가치로 자부하며 살아왔던 것인지.”

설핏 고개를 돌려, 나와 에시메드를 돌아본 켈트 백작은 다시 한번 황제를 올려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설사 불의 정령왕께서 떠나셨다 한들 그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 흙, 얼음, 바람…… 그 무엇이 되었든 로샨의 정신 그 자체인 피닉스를 기리는 전통을 멈추지 않는다면, 로샨 제국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요.”

“맞습니다, 폐하! 소신은 지금까지 2황자 전하께서 어둠의 정령에게 축복을 받으셨으며, 또한 역대 황제와 같이 불의 정령의 축복을 받지 못하셨다는 이유로 2황자 전하의 황위 계승을 은연중에 꺼리던 입장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귀족이 나타나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오펜하이머 후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폐하께 충언을 올리나이다. 2황자 전하께서는 불의 축복을 받지 못하셨으나, 그 누구보다도 로샨 제국의 황제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이해하는 분이십니다. 로샨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를 다스릴 재목은 바로 2황자 전하이십니다!”

“폐하! 소신을 불경죄로 이 자리에서 처형하시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부디 2황자 전하를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하시어 제국의 안정을 불러오소서!”

“폐하, 2황자 전하의 뜻에도 탄복하오나 그분과 뜻을 함께하신 이디스 대공녀님 또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이 완벽한 황후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토록 현명하신 2황자 전하와 이디스 대공녀께서 차기 황제와 황후로서 로샨을 다스리신다면 진실로 평화와 번영이 도래할 것입니다!”

으아, 저건 조금 과한 표현이 아닌가.

켈트 백작, 오펜하이머 후작, 호퍼 후작, 아슬란 후작.

로샨 제국에서 명망 드높고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들이 미리 계획하기라도 한 듯 황제의 앞으로 나아가 2황자와 이디스 대공녀를 향한 탄복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나는, 점점 도가 지나치는 열렬한 찬양에 속으로 경악하며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애초에 황태자 교체에 대한 논쟁이 몇 해 동안이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고.

그 진흙탕 싸움의 원흉인 황제와 발레리안을 향해 타격을 줄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다 에시메드와 함께 계획한 일이긴 했지만, 나는 로샨 제국의 황후가 될 마음은 한 치도 없었다.

로샨 제국의 황후는 황후라는 지위 외에 그 어떠한 작위도 겸할 수 없다.

즉, 내가 에시메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면 헤일리안 대공 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왜 가만히 기다리면 내려올 대공 위를 마다하고 법도와 구속에 얽매인 황후 자리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들로 속이 시끄러웠지만, 대 귀족 가문의 수장들은 끝없이 황제를 향해 황태자 교체에 대한 주청을 올렸고.

“……그만, 그만들 하시오. 오늘은 짐의 탄신일이며, 그토록 중대한 사안을 급하게 결정할 때는 아니오.”

황제는 다급히 고조되는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중신들의 말을 끊으며 나와 에시메드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희의 뜻은 진심으로 이해하였노라. 짐이 생각이 짧아 그만 질책을 내리고 말았어. 자, 어서 일어나거라. 2황자, 이디스 대공녀. 너희가 올린 피닉스 조각상은 짐이 귀히 여기어 보관하도록 하겠다.”

“폐하, 2황자 전하를…….”

“그대들은 모두 진정하시오. 짐이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황태자 교체에 대한 건은…… 이토록 성급하게 결정 내릴 사안이 아니라고.”

안 그래도 무릎이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기에, 나는 에시메드와 시선을 교환하며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은 호기심과 탐욕이 주류였던 이전과는 달리 진심 어린 존경과 감탄, 열망이 서려 있었다.

“폐하! 대체 언제까지 이 중대한 사안에 대한 결단을 피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에시메드는 허공에 떠올라 있던 피닉스 조각상을 내려 시종들에게 넘긴 뒤 나를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만 속삭였다.

‘잠시 피해 있는 게 좋겠어.’

동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우리는 연회장에 들어왔던 때와 동일하게 팔짱을 끼고 서둘러 이 뜨겁고 숨이 막힐 정도로 진한 향기가 자욱한 공간을 벗어났다.

* * *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긴장했어?”

“조금? 그런데 어르신들이 너무 열광하시기에, 그게 더 부담스러웠지.”

기지개를 쭉 켜며 대꾸한 말에 에시메드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이 일로 귀족들은 더욱 열렬하게 너를 지지할 거야.”

“……그래. 그렇겠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나직한 대답에 나는 빙그르르 돌아 에시메드를 응시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게 아니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째서 이번 일을 꾸몄겠어.

“……글쎄. 사실 황위, 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은 아니야.”

춥겠다,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제 겉옷을 벗어 내게 둘러주며 에시메드가 대답했다.

참, 알 수가 없다니까.

나는 에시메드의 낯빛을 유심히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떤 때는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또 어느 순간에는 내가 알고 있다 자신했던 너의 마음이 전부 거짓인 것 같기도 해.

“……장미 화원을 거닐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진 않으시나요? 2황자 전하.”

잠시 묘한 기분에 잠겼던 나는 애써 장난스러운 질문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과거의 제가 범한 실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이디스 대공녀.”

“글쎄요. 아직도 불쑥 떠오를 때마다 분기가 치솟아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대화 속에서 다시 한번 새삼스레 놀라움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네가…… 헤일리안의 딸이구나?’

처음으로 너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린다.

나와 같은 인간이라 생각지 못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두른 채 무턱대고 내 목을 틀어쥐던, 기묘한 남자아이.

“너와 내가 만난 지도 벌써 오 년이 넘어가는구나.”

무심코 중얼거렸던 나는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어색한 기분이 들어.

“드디어 나도 정령사 자격시험에 정식으로 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

부러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리에트의 악행에 숨겨졌던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지혜의 정령왕, 로어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야만 했으나.

진실을 알게 된 후 구태여 리테라에 부득불 방문하여 로어와 관련한 서적을 찾아볼 필수적인 이유는 사라지게 된 터였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의 복권과 마리에트의 오명을 벗기고, 온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목표를 위해 차근히 입지를 늘려가는 것부터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사 년 동안은 그렇게 치열히 살아왔다.

성년식은 열여섯에 맞이하니 그때까지 모두가 더없이 존경하는, 그 누구도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는 위대한 정령사이자 고귀한 헤일리안 대공녀가 되어서.

샤스티아와 알레아, 그리고 로베릭의 실체를 까발릴 준비를 하자.

그리하기 위해 정령사로서의 수련도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

언제 다시 어둠의 정령왕이 마리에트의 딸인 내게 마수를 뻗어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르카네는 알 수 없게도 사 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안심하면서도 은근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물밑에서 발버둥 치듯 치열한 시간을 보내 왔다.

“너는 재작년에 벌써 자격 요건을 충족했는데, 그때 그냥 취득하고 오지…….”

그때 에시메드는 나와 함께 시험을 치를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며 거부했었다.

“너와 함께 치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게 의미 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은 지금도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어.”

에시메드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숨길 수 없는 설렘과, 풋풋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미소를 머금은 소년의 낯을 마주 바라보던 찰나의 순간.

나는 또 한 번 새삼스러운 감상에 빠지게 되었다.

“같이 가자, 이디스.”

차갑게 내버려져 뒤틀렸던 아이는 어느새 이토록 자연스럽게 웃음 짓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래.”

함께 가자.

미소 지으며 대답을 건네던 순간,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에시메드는 벌써 열네 살이 되었다.

어쩌면,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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