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 *
이디스는 연회장으로 다시 돌아가 쏟아지는 열렬한 관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먼저 돌아가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하여 에시메드는 이디스를 먼저 보내고 그 또한 처소로 돌아가려 했으나, 자신을 따르던 귀족들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귀찮음을 삼키며 고요한 어둠에 잠긴 회랑을 걸어 연회장으로 되돌아갔다.
이디스는 황제를 경계하며 언제든 그를 폐위하고 싶어 한다.
사실상 에시메드는 로샨 제국의 황위 따위야 얻어도 그만, 얻지 못해도 그만이었으나.
이디스를 위해 관심도 없던 황위 다툼과 사교 활동에 정성을 기울이며 자신을 지지하는 파벌을 유지하고 있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바로 그때.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텅 빈 회랑에 한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너는…….”
에시메드는 뒤를 돌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알레아 세라피나 헤일리안.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 대공의 피를 한 방울 물려받지 못하였음에도 그 어미가 받는 총애에 기대어 대공녀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영애.
“분명 이디스와 함께 나가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돌아오는 이는 한 분이로군요.”
“……대공녀가 참견할 바는 아니지.”
이디스에게 있어 생모의 원수나 다름없는 상대였다.
에시메드는 차갑게 대꾸하며 바로 뒤돌아서려 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따지자면 2황자 전하께서는 제 동생의 약혼자이신데, 이때까지 남보다 못한 서먹한 관계로 지내 왔다니요.”
그 순간, 알레아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
알레아는 기품 어린 고아한 태도로 에시메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에시메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 소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 사실을 아시나요, 2황자 전하? 세간의 백성들조차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께서 황좌를 두고 다투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답니다. ……참으로 잔인한 일이 아닌가요. 두 분께서는 승하하신 엘리야 황후 폐하를 어머니로 두신 동복형제이신데.”
마침내 에시메드와 한 걸음 남짓 떨어진 거리에 다가와 멈춰 선 알레아는 잠잠한 호수의 표면에 물결이 이는 듯한 우아한 미소를 낯 위로 그리며 나직이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이런 이야기를 내게 늘어놓는 저의가 뭐지?”
비록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였으나, 에시메드가 유일하게 가족으로서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
역린을 건드린 것과 다름없는 알레아의 언사에 에시메드는 동공을 좁히며 사납게 읊조렸다.
아, 소년의 고요한 분노를 마주한 순간.
갓 움튼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참으로 기괴하게도, 두려움에 잠기는 대신 떨리는 황홀경에 빠져 멍하니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2황자 전하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 두 분께서 갈등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 조심스레 꺼낸 이야기였어요.”
그 괴상한 반응에 에시메드의 낯빛이 점차 굳어 가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알레아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읊조렸다.
“……그만 들어가 보도록 하지.”
별 이상한 것을 다 보니 기분이 이보다 더 저조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사이가 어떻든 간에 이디스의 의붓 자매이니…….
기분 대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시메드는 미련 없이 돌아서 빠르게 떠나갔다.
“…….”
음울한 푸른빛으로 잠긴 회랑에 소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곳에 홀로 남은 아리따운 소녀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깊은 웃음을 그린 채.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리테라로 향하던 길에 벌어졌던 예기치 못한 납치극.
그로 인해 허사로 되돌아간 리테라 방문과, 그랬기에 닿을 수 있었던 진실들.
이제는 추억으로 남겨진 일을 회상하며 나는 마차의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대었다.
에시메드와 나는 리테라에서 개최되는 정령사 자격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로샨 제국을 떠나 에피스 시로 향하는 길이었다.
로베릭은 여전히 내가 황성을 벗어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이제는 설사 리아트가 다시 정신이 나가 습격해 온다 해도 충분히 막아 낼 만큼 나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로베릭 또한 끝내 막아서지 못하고 내가 떠나는 것을 용인했다.
게다가 마인하르트도 함께 가는데,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없는 여행길이었다.
“2황자 전하, 이디스 대공녀님. 에피스 시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래?”
기사가 알린 소식에 나는 반색하며 마차의 창문을 열고 그 바깥으로 몸을 빼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와아…….”
하얀색, 파란색.
마치 중동 지역의 건축 양식을 닮은 건물들이 시야에 가득 채워졌고, 물감을 풀어낸 듯 푸르른 하늘에 부유선이 떠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바람의 축복을 받은 도시.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을 모셔 왔다.
“저건…….”
도시의 입구에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에 눈길이 쏠린 나는 워낙 커다란 글씨로 새겨졌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글귀를 읽어 내렸다.
[머나먼 고대, 바람의 제국 에피스는 멸망의 저변으로 모습을 감추었으나 우리는 그 위대했던 제국을 잊지 않고 영원토록 그들의 이름을 계승할 것이다.]
“바람의 제국이라…….”
두 해 전이었던가.
나는 유프스 백작과의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회상했다.
* * *
“이디스 대공녀님, 혹시 이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사실 대공녀님의 먼 조상께서는 대공이 아닌 황제셨으며, 헤일리안 대공가는 고대 제국의 황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요.”
“……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요.
이건 또 무슨 출생의 비밀이람?
내가 경악하든 말든, 유프스 백작은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오늘 진행할 수업의 목차를 가리켰다.
[사라진 역사, 고대의 제국들.]
그리하여 백작이 일러 준 역사는 흥미진진한 비밀을 담고 있었다.
멀고 먼 옛날, 현재의 사람들이 고대라 칭하는 까마득한 과거의 시대.
축복을 내리는 인간의 수 또한 극히 드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지금과는 달리 고대의 정령왕들은 인세에 많은 개입을 했다고 전해진다.
중간중간 시대의 차이를 두긴 하나 정령왕들은 각기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정령사에게 보물과 축복을 내려 나라를 건국할 위대한 운명으로 이끌었는데, 그 역사 속 가장 먼저 세워졌던 두 개의 제국이 있었으니.
바로 빛의 제국 루멘과.
바람의 제국 에피스였다.
“헤일리안 대공가는 그 먼 옛날,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를 숭배하는 제국을 다스렸던 고대의 황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프스 백작은 생긋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대공가를 가리켜 ‘빛의 헤일리안’이라 칭하는 것이지요.”
그때의 세상은 바람의 제국 에피스와 빛의 제국 루멘, 이 두 나라로 양분되어 이례 없던 번영과 평화를 누렸다.
에피스 제국과 루멘 제국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좋은 이웃 국가 간의 관계를 지켜 나갔으며.
두 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화합하며 전쟁도 분쟁도 없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그 시기의 기록은 거의 소실되어 더 이상의 진상을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어느 시기, 바람의 제국 에피스가 갑작스러운 멸망을 맞이하였습니다.”
에피스 제국이 다스리던 광활한 영토는 분쟁과 살인, 혼란에 휩싸여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우방이자 동맹이었던 이웃 국가의 몰락을 똑똑히 지켜본 루멘 제국의 황제는, 돌연 이해하기 어려운 결단을 온 나라와 온 백성에게 공포했다.
“바로 황제 스스로가 루멘 제국의 종언을 선언하며 모든 백성에게 자유를 내려 준 것입니다.”
바람의 제국 에피스의 황제가 대대로 따를 자 없는 출중한 무예와 용맹함으로 모든 백성의 존경을 샀던 강인한 군주였다면, 그와는 반대로 빛의 제국 루멘의 황제는 백성을 아끼는 자애로움에 더해 신묘한 지혜를 품은 위대한 현자로서 추앙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토록 지혜로웠다는 황제가 도탄에 잠긴 이웃 국가를 똑똑히 지켜보았음에도 돌연 통치를 거두고 스스로 제국의 끝을 선포한 것이다.
“황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과 가족들 모두,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으며 스스로 신분을 격하시켰습니다.”
“아…….”
“그리하여 루멘 황가라 칭해졌던 혈족들은 제국의 종막 이후 ‘헤일리안 대공가’라는 성과 신분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대륙에 현존하는 모든 귀족 가문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헤일리안 대공가가 탄생하였다.
그 정체 모를 ‘작가’가 집필한 원작에서도 로베릭의 가문이 매우 유서 깊어 로샨 제국의 황가에 버금갈 정도로 고귀한 명문가라는 서술이 등장하긴 했지만…….
분명히 실존했던 고대 황가의 직계 후손이기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랬구나……. 잠시만, 그런데 분명, 정령왕들이 각자 귀애했던 정령사들에게 보물과 축복을 내려 주었다고 하셨죠? 그 보물들은 뭔가요?”
“예, 그것을 보물이라 칭하기도 하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욱 적합한 호칭이 있지요.”
유프스 백작은 깃펜을 들어 하얀 종이 위로 한 단어를 적어 내렸다.
“바로 ‘정령왕의 유물’이라는 호칭입니다.”
“정령왕의 유물…….”
“현재로써는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없고, 얼마나 더 많이 존재하였을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총 여섯 가지 유물들의 명확한 이름과 형태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리고 유프스 백작은 차례대로 정령왕의 유물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수천여 년 전 멸망 추정, 바람의 제국 에피스 소유.
바람의 유물 - 천공의 노호]
“이것은 세상 모든 대기를 뒤흔들고 다스리는 권능을 지닌 채찍 형태의 유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삼백여 년 전 멸망, ‘절벽 위의 제국’ 인테게르 소유.
대지의 유물 - 근간의 우레]
“금빛의 양각이 화려하게 새겨진, 거대한 낫 형태의 유물이라고 전해집니다. 대지를 찔러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는 권능을 지녔다고 하는군요.”
[백여 년 전 멸망, 물의 공국 하카드엘라 소유.
물의 유물 - 정령왕의 관(冠)]
“그리고…… 물의 유물은, 지금으로서는 멸망하여 사라진 하카드엘라 공국의 보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