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유프스 백작은 어딘가 안쓰러움을 품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마주 응시하다 조용히 말했다.
“알고 있어요. 제 외조모님의 모국이 아닌가요.”
“예, 공국을 통치해 오던 하카드엘라 가문이 대대로 물려받아 왔으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소실되고 만…… ‘정령왕의 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유물입니다. 그 이름과 동일하게 왕관의 형태를 지닌 유물이었다고 전해지지요.”
하카드엘라 공국.
역사학을 배우며 알게 된 외할머니의 모국은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를 숭배하던 나라이자 재앙의 개시가 일어나기 몇 년 전 멸망을 맞이했다는 짧은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안타까울 만큼 기록이 전무한 이유는 약소국이었던 사정도 존재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멸망한 지 오래되지 않아 재앙이 밀려들어 세상이 도탄에 잠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한 영웅이셨던 외할머니께서는 자신과 모국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할아버지와 결혼하신 후 조용히 살아가시다 늦은 출산으로 숨을 거둔 뒤 바스테반 공작 부인으로서 장례를 치르고 대지로 되돌아갔다.
“…….”
하카드엘라 공국이 남아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었을까?
나는 공국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재앙의 개시 도래 직후 멸망, 숲의 왕국 드라이어스 소유.
숲의 유물 - 필생의 근원]
“찬란한 색채의 광휘를 두른 씨앗의 형태를 지닌 유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아 알 길은 없지만…… 아마도 이름에 걸맞게, 생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권능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요.”
“저…… 스승님. 질문이 있는데요.”
나는 계속되던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유프스 백작을 향해 물었다.
“지금까지 등장한 나라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다 멸망한 건가요? 정령왕이 사랑했고, 이토록 강대한 권능을 품은 보물마저 내려 주었는데.”
역사학을 공부할 때는 미처 신경을 기울이지 못하였으나, 정령왕의 유물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니 기이함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바람의 제국 에피스를 시작하여, 비록 많은 세월의 격차를 두고 있긴 하지만…….
바람, 빛, 대지, 물, 숲…….
“그나마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왕가라고는 빛의 제국 루멘과…… 따지자면 제 외가에 속하는 하카드엘라 공국뿐이잖아요.”
아니, 명맥이 이어졌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정령학과 역사를 제대로 배우기 전까지 외할머니의 모국이 하카드엘라 공국이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무지한 상태였으니까.
“대공녀님. 저 또한 일련의 역사가 지닌 흐름에 의문을 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유프스 백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자면, 아무리 위대한 정령왕의 사랑을 받았더라도 결국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이겨 낼 수는 없었노라고 여기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감히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요.”
“…….”
마치 나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으나 나는 영 석연치 않은 심정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시선을 떨구었다.
“그래도 너무 울적해 하시지 마십시오. 아직 번영을 이룩하며 살아남은,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나라가 존재하니까요.”
멸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다고?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던 순간, 나는 그가 꺼내려는 말을 알아채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있긴 하지…….
[현존, 불의 제국 로샨 소유.]
불의 유물 - 피의 족적]
“이 유물은 이름만 전해져 내려올 뿐 루에이리 황가의 압력으로 인해 정확한 권능과 형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대공녀님의 약혼자이신 2황자 전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실 테니, 훗날 기회가 되었을 때 여쭤보신 후 제게도 들려주십시오.”
“……그럼, 이 유물은 소실되지 않고 지금도 현존하는 건가요?”
“예, 불의 정령왕을 숭배하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그 오랜 세월 속, 이제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다시피 한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나라니까요.”
비록 불의 정령왕 피닉스는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이 사라졌다고 하나.
로샨 제국은 멸망으로부터 유일하게 버티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운명이었다.
에시메드에게 꼭 물어봐야지.
어쩌면,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정령왕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수십여 년 전 몰락, 칸델 공작 가문 소유.
전기의 유물 - 폭렬의 창]
“……엥? 칸델 공작가에서 유물을 소유했었다고요?”
어째서? 나는 당황하여 물었다.
여긴 왕족의 후예도 아니고…… 그냥 공작 가문에 불과했잖아?
“정령왕이 사랑한 정령사들이 모두 나라를 건국한 것은 아닙니다. 칸델 가문의 영광스러운 선조는 귀족의 지위에 만족했지요. ……물론 못난 후손들이 전부 말아먹었지만 말입니다.”
“…….”
안타까워라.
나는 이름 모를 칸델 가문의 선조 정령사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래도 아직 마인하르트가 살아 있으니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거예요…….
“폭렬의 창은 휘황한 금빛의 삼지창 형태를 띤 유물이라 전해집니다. 사실 칸델 공작가가 몰락한 것은 다른 망국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나, 비극이 일어나기 수백여 년 전부터 유물이 소실되었기에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망할 인간들이, 이렇게나 중요한 물건 관리 하나도 제대로 못 해?
나는 기함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정령왕이 직접 내려 준 귀하디귀한 보물을…… 진심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 기나긴 이야기가 드디어 끝이 났군요.”
“……어라, 잠시만. 그럼 빛의 유물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건가요?”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머릿속을 헤집다가, 아직 빛의 제국이 지녔던 유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물었다.
루멘 제국은 외압에 의해 멸망한 것도 아니고, 황족들도 신분이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명예와 권력을 누리며 평탄히 살아남았으니 남아 있을 만도 한데.
“아……. 그것은 대공녀님의 부친께 여쭤보아 주십시오. 저 또한 궁금합니다. 빛의 유물은 대체 어찌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지…….”
그러나 유프스 백작은 나보다 더 안타깝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내 선조들도 무능하기로는 마찬가지였나.
하하, 나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기분으로 헛웃음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훗날 에시메드에게 전해 들은 불의 유물, 피의 족적의 형태는.
“……놋쇠로 만들어진 넓적하고 속이 깊은 그릇? 같은 형태였어. 그 한가운데 솟은 날카로운 바늘에 손가락을 찔러 나온 피가 바늘 기둥을 타고 흘러내려 갔고.”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정령들의 이름이, 정령이 사용하는 언어로 새겨져 있었으며.
세 개의 작은 바늘들이 스스로 움직여 각각의 정령의 이름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거 설마…… 정령사의 속성을 알려 주는 유물이야?”
“그런 것 같아. 나 또한 그것으로 일찍이 속성 검사를 진행했으니까.”
피의 족적은 이름 그대로 루에이리 황가의 아이가 어떠한 정령의 축복을 타고났는지를 찾아내는 권능을 품은 유물이었던 것이다.
“…….”
……공격 권능은 없나?
나는 점차 멀어져 가는 비석을 응시하며 현실로 되돌아왔다.
때마침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결이 수천 년도 더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망국을 향한 애수 어린 그리움을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그 누가 모든 비밀을 알고 있을지…….”
나는 마차의 창가에 기댄 채 턱을 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이곳이, 바로…….”
나는 감회에 차 멍하니 중얼거렸다.
리테라였다.
지혜의 성역, 정령사 학회!
“그렇게 좋아?”
“응!”
에시메드가 그런 나를 못 말리겠다는 듯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기나긴 고난 끝에 마침내 당도한 리테라는 거칠게 깎아지른 웅대한 절벽 위에 세워진 성채 같은 외관의 건물이었다.
외벽은 모두 잿빛, 회빛, 연푸른빛 일색이었다.
“어서 오너라. 오는 길이 피곤하지는 않았느냐?”
“메카일라 할머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색하며 돌아서 몇 해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노년의 여인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로샨의 2황자 전하도 오랜만이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래, 너도 많이 컸구나. 이디스, 너도 마찬가지고. 자세히 뜯어 보니 시오른의 얼굴도 보이고…… 아타라의 모습도 보이는 듯해.”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하얀 옷자락이 너풀거리며 파란 하늘 아래 휘날렸다.
주름진 손으로 내 뺨을 조심히 매만지던 그녀가 설핏 웃음을 떠올리며 중얼거린 말에, 나는 살짝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요리조리 굴렸다.
“이런. 내가 벌써 노망이 왔나, 귀한 손님들을 바깥에 방치하고 있다니 말이야. 자, 어서 오려무나. 내가 안내해 주도록 하마.”
메카일라는 곧 잠시 드러냈던 감정의 편린을 말끔하게 지워 낸 뒤 그렇게 이야기하며, 우리의 곁에 그림자처럼 고요히 선 마인하르트를 잠시간 응시한 뒤 발길을 돌렸다.
에시메드와 나는 메카일라의 뒤를 따라 높은 성채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길에 발을 디뎠다.
* * *
“시험까지는 나흘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은 하고 싶은 것 하며 지내려무나.”
“네, 의장님.”
아무래도 공적인 장소였기에 이전처럼 할머니라는 호칭을 쓸 수는 없었다.
나는 메카일라를 의장으로 칭하며 답했다.
짐은 시녀들이 처소에 풀어 정리할 테고…… 마인하르트는 어디로 간 거지?
메카일라가 떠난 뒤, 나는 마인하르트를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리테라부터 구경하고 나중에 찾아보자.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리테라 탐험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