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 *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구경에 나섰지만 예상치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아직 외부인에 불과한 나는 대부분의 구역에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그나마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복도 일부에 해당할 뿐이었다.
기운이 쭉 빠지네.
터덜터덜, 힘없이 걷다 보니 인적이 드문 복도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문에 난 작은 유리창으로 서고임을 알아볼 수 있는 방이 존재했다.
“저기, 이 서고에 외부인도 출입이 가능한가요?”
“아, 예. 들어가셔도 됩니다.”
리테라에 소속된 듯해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물어보니 다행히도 외부인 출입 가능 구역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그 안의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서관 특유의 은은하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나무 향이 서늘하게 머무르다, 문을 연 순간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인데도 어림잡아 수백 권은 될 만큼 책이 가득했다.
나는 책장 사이를 거닐며 책등을 하나하나 살폈다.
‘한 번뿐인 인생,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
뭐야, 꼭 자기계발서 제목 같은…….
“아.”
그 순간, 코앞에서 느껴진 기척에 나는 책을 향해 손을 뻗던 것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에시메드보다 두어 살 정도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소년이 서가를 오가다 나를 마주친 듯 살짝 놀란 기색으로 서 있었다.
백발에 가까운 회색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가슴께까지 늘어뜨리고, 꼭 메카일라와 비슷한 의복…….
커다란 후드가 달린 치렁치렁한 백색의 망토를 두른 소년이 유리알에 가려진 말간 은회색 눈동자로 잠시간 나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시험 응시 목적으로 방문하신 분이신가요?”
그는 곧이어 반색하며 말을 걸었다.
“……네.”
누구지?
긴가민가하여 그의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던 때.
워낙 시선을 사로잡는 저 커다란 안경에 가려져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 주위로 깨질 듯 투명하고도 청아한 분위기를 두른 소년이 보기 드물 정도로 고운 외양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또한 그 온화하면서도 이성적인 미소가 어딘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저는 메카일라 유포리움 의장님의 곁에서 수학하는 영광을 누리는 미천한 제자, 이드리스 로빈 유프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년이 건넨 인사에 나는 비로소 그의 정체를 깨닫고 놀라움에 잠겼다.
“유프스…… 잠깐. 유프스 백작?”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소리를 들은 이드리스 로빈 유프스는 두꺼운 유리알 너머로도 날카로움이 드러나는 눈매를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제 조부님을 아시나요?”
이 소년은 다름 아닌 유프스 백작의 손자였던 것이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이번에 개최되는 정령사 자격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리테라에 방문한,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이라고 해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유프스 백작께서는 제 스승이 되어 주신 분이고요.”
“……아, 말로만 듣던 헤일리안 대공녀님이시군요.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이드리스는 해사하게 미소 지으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조부님께 많은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 기억하고 계실지요? 이렇게 말하자니 스스로 자랑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오 년 전, 리테라 방문에 대한 건으로 조부님께 부탁을 받아 대공녀님과 2황자 전하의 방문을 의장님께 허락받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 당연히 기억하죠.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그 뒤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저 또한 그때의 방문이 좌절된 것이 정말 슬펐답니다.”
고마웠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서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실례였기에, 이드리스와 나는 서고를 나서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이신데 정령사 시험을 치르신다니, 물론 대공녀께서 출중한 재능을 지니셨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 나이가 차지 않아 시험을 치를 수 없던 것이 답답했는걸요. 드디어 정식 정령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부러 활기차게 이야기하자 이드리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유프스 백작은, 저명한 정령학자이긴 했지만 정령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
“백작 영식께서는 이미 정식 정령사이시죠?”
“……대공녀님과 같은 나이에 시험을 응시하여 운 좋게 통과하였습니다.”
이드리스는 앞을 응시하며 답했다.
그래, 메카일라가 정령사도 아닌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
이드리스는 유프스 백작이 자랑하는 손자답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천재였구나.
이 소년은 무슨 속성을 지니고 있을까?
유프스 백작도 제 손자 자랑을 그렇게나 해대면서도, 정작 어떤 정령사인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언뜻 보아 여인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청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의 옆얼굴을 응시하며 물었다.
“유프스 백작 영식께서는 어떠한 정령의 축복을 받으셨나요?”
“…….”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이드리스는 약간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아…….”
대답하기를 망설이는 듯했다.
“제 속성에 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네?”
무엇 때문에 대답을 피하는 거지?
의문에 잠긴 나는 무어라 말을 더 꺼내려 했으나, 바로 그때.
“……?”
내가 서 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어?”
이곳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를 멀거니 바라보며.
“……리아트?!”
그의 이름을 경악하여 외쳤다.
“오랜만이네, 이디스.”
마치 몇 해 전의 과거에서 어떠한 변화도 맞이하지 않은 것처럼.
기억 속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듯한 리아트가 나를 향해 그 특유의 음울하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
충격에 잠기든 말든, 만면에 희색을 드러내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리아트의 서늘한 회색 눈동자가 바로 곁에 있던 이드리스에게 내리꽂혔다.
“…….”
그 순간, 이드리스는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기라도 한 듯 몸을 살짝 떨었다.
“메카일라 의장의 제자분께서는 자리를 피해 주실 수 있겠나?”
리아트는 나를 향하던 부드러운 목소리와 희색이 서렸던 표정을 말끔히 지워 내고 냉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이드리스를 향해 말했다.
“대공녀와 해후를 풀고 싶어서 그러네.”
“……아.”
경직된 표정으로 리아트를 올려다보던 이드리스는, 본능적으로 위험함이 물씬 느껴지는 남자와 단둘이 있어도 괜찮겠냐는 뜻이 담긴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게 보내왔다.
……뭐, 별일이야 있겠나.
나는 약간 망설이면서도 괜찮으니 가 보라는 뜻으로 이드리스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디스 대공녀님.”
“살펴 가세요, 유프스 백작 영식.”
이드리스가 자리를 떠나고, 멀어져 가는 하얀 인영을 바라보던 나는 리아트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결국 이드리스가 정령사로서 어떠한 속성을 지녔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테라에는 무슨 용무로 방문하신 거죠?”
끄응, 이 인간이 등장하면 내 계획이 엉망으로 어그러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야.
나는 리아트를 향해 톡 쏘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이라도 돼? 이것 참 섭섭하군.”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 인간아…….
나는 가증스럽, 아니.
진정으로 상처받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내린 채 나를 응시하는 리아트의 행태를 지켜보며 이 인간은 정말 나이를 먹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성정이 변한 것도 없고.
어머니를 연모했던 남자라니, 영 껄끄러운 대상이다.
……아무리 절절하게 짝사랑했던 여자의 딸이라 한들 막무가내로 납치해 끌고 가려 했던 과거의 행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고.
어쩌면 또다시 이상한 꿍꿍이를 품고 나한테 접근한 것일지도 몰라……!
나는 경계 서린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또 저를 납치하시겠다거나, 그런 계획을 품고 계시는 거라면…….”
“내 머릿속에는 납치 생각밖에 없는 줄 알아?”
그러자 리아트는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팍 좁히며 답했다.
“전적이 있잖아요!”
나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게다가 각국에서 들어오는 올바르지 못한 의뢰만 도맡는 길드의 수장 노릇도 하고 있으면서!
“이래 봬도 리테라에서 수학했던 몸이다. 메카일라 의장에게는 은혜를 입은 처지이지. 본래대로라면 발도 들이지 못하였을 지혜의 성역에 니샤의 왕자 신분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 또한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었으니까.”
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적대감을 살며시 누그러뜨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나를, 진정으로 짜증 나게도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던 리아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꼬박 사 년이 넘어갈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하긴 했으나, 그 점을 감안해도 정말 많이 컸어. 벌써 키가 내 허리께까지 닿다니.”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다른 무엇도 아닌 진심 어린 기쁨이었다.
……정말. 마음대로 싫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머리를 쏙 빼내고 말했다.
“저는 정령사 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해 왔어요. 그럼 다시 한번 정중히 묻겠습니다. 니샤의 국왕 전하께서는 무슨 연유로 리테라에 방문하셨는지요?”
대공녀로서의 예를 갖추어 엄숙하게 묻는 나를 여전히, 기특한 아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응시하던 리아트가 돌아서며 말했다.
“니샤는 대외적으로 고립된 처지거든.”
나는 얼떨결에 그가 향하는 곳으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유일하게 교류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세력이 이 리테라뿐인지라. 니샤에서 개발한 여러 아티팩트를 전달해 주는 대가로 이런저런 조력을 받고 있어.”
니샤.
사 년 전의 납치 사건 이후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때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때였지…….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실체를 처음으로 맞닥뜨리고서도 어리석을 만큼 대수롭잖게 여겼던 과거를 회상하자 기분이 깊이 침잠했다.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민족의 나라.
수많은 죄악으로 손을 더럽혀 왔으나, 결정적으로 재앙의 개시가 도래하였을 때 아르카네와 그의 권속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
타국과 연합하여 맞서 싸웠기에 멸망의 위기를 벗어나고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그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것도 기회인데 시험이 끝나고 나면 니샤에 가 보지 않겠나?”
“네?”
……엥?
나는 귀를 의심하며 홱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아트는 즐거운 일에 들뜬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씩 그려 보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