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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3)화 (84/141)

<83화>

황당한 제안에 당황스러워하는 나의 반응에도 리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로샨과 니샤가 적대 관계라지만 무슨 상관이지? 네 동의만 있으면 외교 문제가 비롯될 일은 없을 거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국외로 반출이 불가능했던 유물들 또한 네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들이니까…….”

예전이었다면 호기심에 응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황을 갈무리하고 표정을 굳히며 생각했다.

이제는 내 어머니, 마리에트와 할아버지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정한 배후가 어둠의 정령왕이었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아르카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을 멸망시키려 드는 존재.

이미 제 뜻대로 지혜의 정령왕과 그의 정령사였던 마리에트를 몰아냈는데도 어째서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아르카네는 마리에트의 뒤를 이어 나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 마인하르트와의 일에서 드러나지 않았던가.

로어가 무슨 일을 꾸민다니, 어쩌니.

숙적이 축복했던 여자가 남긴 유일한 자식.

……스스로 자부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생명, 물, 대지의 정령왕이 축복한 불세출의 천재.

샤스티아라는 패를 이용하여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헤일리안 대공이 집착하는 친딸.

분명 아르카네에게 있어 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터.

숙적이나 다름없는 흑막의 본거지에 제 발로 들어가 봤자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시험을 치른 뒤에는 곧바로 돌아가야 해서……. 죄송하게도 초대에는 응하지 못할 것 같아요.”

“……잠깐의 시간이라도 낼 수 없는 건가?”

나의 완곡한 거절에 리아트는 대놓고 아쉽다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도 안 돼.

당신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민족과 그들이 숭배하는 존재는 결코…….

“저도 이제 열두 살이나 되었다고요. 평판에도 신경 써야 하고, 어린아이처럼 멋모르고 돌아다니는 건…….”

“열두 살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해. 벌써부터 애어른처럼 굴 필요는 없어.”

이 사람이 정말, 거절을 하면 좀 받아들이란 말이야!

계속해서 끈질기게 반론하는 리아트와, 역시 니샤에 제 발로 가고 싶은 마음은 한 치도 없는 내가 한참 동안 투닥거리고 있을 때.

“……이디스 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던 것일지 모를 마인하르트가 보기 드물게 인상을 설핏 찡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인하르트?”

나를 찾아다녔던 건가?

나는 당황에 잠겨 그를 마주 응시했다.

하필이면 리아트랑 같이 있을 때 이렇게 마주치다니…….

다소 놀라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그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기억.

……그러고 보니, 내가 마인하르트를 처음 마주했던 계기가 된 사건이…….

다름 아닌, 리아트가 나를 납치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것들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산하게 맴돌고.

검은 밤을 등진 채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빛을 노려보던 리아트의 모습을 회상하며, 나는 질겁했다.

납치 사건과 나를 구하러 오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전투를 벌였던 마인하르트의 모습!

이런 젠장,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매우 악연으로 얽혀서!

나를 응시하던 마인하르트는 이내 리아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로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두려움이 뒤섞인 당황에 잠겨 지독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리아트와 마인하르트를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저자는, 누구지?”

먼저 입을 연 이는 리아트였다.

옅게 인상을 찡그리며, 마인하르트를 처음 본다는 양 중얼거리는 리아트의 반응은 뜻밖의 일이었다.

어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잠시 당황하던 나는 곧 안도감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고작 전투에서 한 번 스친 게 다인 상대를 기억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지.

“본래 어머니를 섬기던 분이신데, 지금은 제 곁에서 여러모로 도와주시며 함께 지내고 계시는 마인하르트 씨예요.”

리아트가 마인하르트를 기억하지 못해 다행이었다.

“로샨의 귀족인가?”

“……귀족은, 아니세요.”

내게 마인하르트의 신분을 물은 리아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저자가 마리에트를 섬겼다고?”

역시 이 인간의 관심은 오직 마리에트만을 향하는구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리아트에게서 멀어져 마인하르트를 향해 쪼르르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리아트와는 달리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은 무심한 기색의 마인하르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리테라에서 수학하셨던 니샤 왕국의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국왕 전하세요.”

“알고 있습니다.”

……음?

마인하르트가 나직이 대꾸한 말에 어딘지 쎄한 기운을 직감할 때.

“몇 해 전 이디스 님을 납치했던 자가 아닙니까.”

나는 등 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감각에 휩싸여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가 어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니 마인하르트는 무심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번뜩이는 날카로운 적의를 그제야 발견한 내 머릿속은 앞으로 불길한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며 맹렬한 사이렌 소리를 울려댔다.

“납치라, 그 일을 알고 있다는 건…… 잠시만, 너. 다시 보니 낯이 익군.”

마인하르트가 내뱉은 발언으로 인해 리아트가 기억을 서서히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뜨악하며 리아트를 쳐다볼 때, 눈을 가늘게 좁히던 리아트의 서늘한 회안이 일순간 번뜩이며.

“대정령사들을 끌고 와 내 계획을 훼방 놓았던 놈이로구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마인하르트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간략히 대꾸했다.

그와 반대로 리아트는 잇새를 악물며 맹렬한 적의를 드러냈다.

“내가 어찌 네놈의 낯짝을 잊을 수 있을까. 그래, 내 계획을 단단히 망쳐 놓고 뻔뻔하게 이디스의 곁을 차지했다? 이제 보니 작정하고 행한 일이었군.”

“리아트 님, 그런 게 아니라…….”

“이디스 님의 곁에 이토록 가까이 머무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신의 계획은 애초에 이루어져서는 안 될 범죄 행각에 불과했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중재를 위해 나섰으나 마인하르트가 서슴없이 내뱉은 발언에 다시 한번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나와 리아트, 모두의 시선이 마인하르트를 향하던 순간.

“이디스 님께서 곁에 머물러 달라 친히 부탁하지 않으셨더라면…… 이전부터 그러했듯, 먼발치에서 지켜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했겠지요.”

나는 멀거니 마인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뭐……?”

리아트의 적의는 완벽한 질투와 분노로 점철되었다.

“제대로 된 가문조차 없는 천한 것 따위가 감히……!”

“그만하세요, 리아트.”

하지만 출신을 운운하며 상대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당신이 먼저 잘못했던 건 맞잖아.

나는 냉정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리아트를 제지했다.

“마인하르트는 저를 몇 번이고 구해 주었던 은인이세요. 또한 어머니께 충성을 다했던 수하이기도 하시고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리아트 님보다는 마인하르트가 제가 더 신뢰할 수 있는 상대이지 않을까요?”

“……이디스.”

그의 잿빛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리며, 적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허물어진 리아트의 표정에 살짝 마음이 약해졌지만.

“오랜만에 만나 뵈어 반가웠어요. 진심으로요. ……하지만 더 이상의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니샤의 국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마인하르트의 소매 끝자락을 붙들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요, 마인하르트.”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아무튼……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괴상한 삼각관계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니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에시메드는 배정받은 처소의 소파에 누운 채 한탄하듯 이야기하는 이디스의 모습을 잠자코 응시했다.

그리고 이디스가 두 남정네의 사이에 끼여 마음을 졸이던 때 자신이 겪었던 기묘한 상황을 천천히 회상했다.

홀로 리테라의 외곽을 거닐던 때, 난데없는 환청이 들려왔던 것이다.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목소리에 불과하지만-

마치 차갑게 얼어붙어, 곳곳에 하얀 서리가 피어난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가냘픈 목소리가.

[에시메드. 너는 이곳에 있으면 안 돼. 네 반려를 데리고 어서 가, 떠나, 도망쳐.]

정확하게 나와, 이디스를 지목하며 어서 떠나라고 애원하듯 이야기하던 그 목소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누구의, 간절한 속삭임이었을까.

에시메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에 잠겼다.

* * *

다음 날, 메카일라의 부름에 나와 마인하르트는 리테라의 성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초로의 여인이 드넓은 하늘을 주시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메카일라는 여전히 총기로 반짝이는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보며 나직이 미소를 머금었다.

“내 전우의 아이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 마주하는 때가 오다니. 감회가 새롭구나.”

마인하르트는 주디스의 자식은 아니었지만, 메카일라는 그를 주디스의 아이로 여기는 듯했다.

그 사실을 느낀 것일까.

마인하르트의 무심한 낯빛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시오른은 잘 지내고 있느냐? 그놈이 리테라에서 잠시 지냈을 적, 손녀딸을 원수 같은 자식의 손아귀에 넘겨줘 버렸다며 성가실 만큼 징징 짜고는 했는데. 이제는 네 곁에 딱 달라붙어 있으니 그 안색이 활짝 폈겠구나.”

메카일라의 신랄한 어투에 나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늘 서신을 주고받으시는 것으로 알아요. 그러니 알고 계시겠지만, 할아버지는 잘 지내세요.”

“그럼, 잘 지내겠지. 너를 찾아오는 헤일리안 대공과 신경전도 열심히 벌일 테고.”

메카일라는 시니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난감한 마음에 다시금 웃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너는 잘 지내고 있느냐?”

그리고 물음은 내게서 마인하르트에게로 옮겨졌다.

잠시간 침묵하던 마인하르트는, 어쩐 이유에서인지 자신과 손을 마주 잡은 나를 내려다보며.

“……온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평안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메카일라의 벽안에 설핏 서렸던 회한의 빛.

그러나 언제 그런 기색을 내비쳤냐는 듯, 메카일라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정령사 자격시험의 종목과 방식에 관한 정보는 엄격히 통제되는 기밀이지. 설사 네가 헤일리안의 대공녀더라도 정확한 것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네, 맞아요.”

메카일라는 입꼬리를 올려 짙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리테라의 의장은 오직 공정과 중립을 수호하며 살아가야 한다. 오래전, 가족도 나라도 의탁할 곳도 없으나 명예만은 한없이 드높았던 내게 리테라가 손을 내민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지.”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머나먼 천공을 응시하며 잠잠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만…… 기왕 대정령사로 태어난 것, 평생을 다수를 위한 희생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으냐? 내가 호구도 아니고.”

그리고 재기 넘치는 미소를 그리며 솔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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