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나는 내 전우들을 좋아했어. 그는 지금도 마찬가지지.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던 내게, 처음으로 내 사람이 되어 준 녀석들이었으니까.”
지식을 향한 욕구와 이성만이 깃들어 모습을 드러내던 그녀의 낯빛에 처음으로 은은한 애틋함이 감돌았다.
잠시간 시선을 내리깔고 나직이 읊조리던 메카일라는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나는 아타라와 시오른의 손녀인 너를 도울 거다. 다른 어떠한 이유도 필요 없이, 순전히 내가 그리하고 싶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나는 괜히 먹먹해진 기분으로 감사를 전했다.
메카일라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살짝 미소 짓다 곧바로 안색을 냉정히 가라앉히며 말했다.
“시오른은 모두가 알아주는 돌대가리였지만 아타라는 나 또한 인정할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네 어미는 그런 아타라를 꼭 닮았지. 또한 너도 시오른보다는 아타라와 더 가까운 듯해 보이니, 다행이로구나.”
아타라 하카드엘라.
나이아드의 숨결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난 최초의 물의 대정령사이자, 나의 외할머니.
지금은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물의 공국을 다스리던 가문의 후예.
어머니를 낳은 직후 곧바로 숨을 거두셨던 터라 내게는 멀고 낯설게만 느껴지는 가족.
“가장 처음은 필기 시험. 정령사로서 지켜야 할 규율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검사한다. 정령들의 이름과 정령왕의 권능, 그들과 관계된 유명한 일화들은 기본으로 습득하고 있어야 하고.”
메카일라는 성벽에 두 손을 짚은 채 뒤이어 말했다.
“두 번째는 리테라의 중심부, 지혜의 신전으로 들어가 정령사의 맹세를 하는 것이다. 사욕만을 채우기 위해 주어진 축복을 소비하지 않겠다,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며 궁극적으로 세상의 평화를 수호하는 숭고한 사명을 기억하겠다.”
절대다수의 축복 받지 못한 자들 가운데 자기 자신이 ‘축복받은 이’라는 사실을 영혼 깊숙이 각인시켜 공익을 위해 삶을 바치겠다는- 요지의 맹세지.
“……그건, 통과하지 못할 시험은 아니겠네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나는 너무나 쉬운 난이도에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메카엘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이 시험이지, 1차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은 걸러 냈는데 2차까지 빡빡하게 굴면 최종 시험 때 남아나는 자가 있겠느냐.”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인 메카일라는 마지막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읊었다.
“마지막, 세 번째. 가장 어렵고 사상자도 많이 나오는 시험이다. 괜히 최종 관문인 게 아니야.”
사상자.
나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메카일라를 응시했다.
“이 리테라와 가장 근접한 국가가 어디인 줄 아느냐? 바로 니샤 왕국이다. 그리고 니샤 왕국과 리테라 사이에는 암흑 지대라 불리는 광대한 영역이 존재하지.”
메카일라는 푸르른 벽안을 내리깔며 잠잠히 읊조렸다.
“그곳은 평소에 일반인을 비롯하여 어지간한 상급 정령사들조차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오직 리테라의 고위 의원들과 니샤 왕국의 정령사들만이 드나들며 관리하고 있지. 이토록 출입을 엄중히 금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너도 알고 있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메카일라는 재기로 반짝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둠의 정령왕이, 그 땅에 균열들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정답이다. 막대한 균열들을 떠안고 다니기가 성가셔서인지, 아니면 따로 계획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 와 그의 정확한 진의를 알 수는 없으나 암흑 지대의 곳곳에 남겨진 균열들은 세상의 상식과 이지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을 토해 내고는 하지.”
어둠의 정령왕이란 작자는 진정으로 근원에서부터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세상에게 있어 오직 재앙만을 몰고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어둠이 남긴 균열에서 탄생한 것들 중 가장 위험하고 추악한 존재는 바로 포르텐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괴물들이다. 언뜻 보면 원형으로 보일 만큼 둥근 전신에 북슬한 검은 털이 가시처럼 돋아나 있고, 이빨은 마치 월도처럼 휘어진 채 못 꿰뚫을 것이 없을 만큼 날카롭고 무거우며…… 팔다리가 없는 대신 길게 늘어나는 혀나, 몸에서 돋아나는 촉수를 이용하여 사냥감을 쓸어 넣듯 포식하지.”
으윽, 상상만 해도 징그러웠다.
나는 인상을 옅게 찡그리며 역겨움을 억눌렀다.
“몇몇 개체들은 어둠의 권능을 사용하는 모습 또한 목격된 바 있을 만큼 까다로운 괴물이야. 이놈들은 종종 리테라의 결계까지 뚫고 들어와 사상자를 내곤 해. 그 때문에 내가 순행조차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는 실정이니, 원.”
메카일라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듯 읊조렸다.
“포르텐이 먹이 사슬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괴물이라면, 그 아래에 깔린 하급 괴물들도 존재한다. 통일성이 없어 대략적으로만 그 종족을 구분하지만 사켈, 바르사, 하단. 포르텐과는 달리 흔히 볼 수 있는 짐승 여러 종을 괴악하게 섞어 놓은 듯한 생김새를 지닌 종이 더 있으나, 이건 네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요?”
알아야 하지…… 않나?
메카일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이유를 밝혔다.
“네가 치를 최종 시험에서 이 괴물들은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약한 것들은 존재를 알 가치조차 없을 만큼, 네 앞에선 먼지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메카일라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돌아서 광활한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절벽을 응시하고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3차 시험은 수험생들이 각자 타고난 재능별로 등급을 나누어 각각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괴물을 안배한다.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오직 정령의 권능만을 이용하여 일 대 일로 싸워 이기는 것이 통과 조건이다.”
정령 소환 불가.
그 대목을 들은 순간, 나는 어째서 아무리 특출한 재능을 타고난 정령사더라도 어린 나이에 정령사 자격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현저히 적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깨달았다.
“정확히 말해 ‘상시 정령 소환 상태’를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숙련된 정령사들은 정령을 소환하지 않아도 자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정령의 권능을 자유롭게 구사하므로.
“더 이상 정령의 힘을 빌려 쓰는 것에 족하지 않고- 마치, 그 스스로가 정령이 된 것처럼.”
메카일라는 오래된 기억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꿈결을 헤매는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는 얼마나 대단한 정령의 축복을 받았든 간에, 진정한 정령사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었군. 이제 알겠느냐? 내 어째서 네게 하등한 괴물들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것인지를.”
메카일라는 그녀 자신이 나를 향해 품은 기대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였다.
“요즘은 상위 정령의 축복조차 드문 실정이다. 그러나 너는 모든 속성을 정령왕에게 축복받았지. 포르텐이 최종 시험의 상대로 놓인 이는 정말로 오랜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에시메드를 제외한 모든 황자들이 정령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난 루에이리 황가를 제하더라도, 정령사의 수가 전체적으로 크게 감소하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너만큼의 뛰어난 천재가 다시 이 세상에 나서 나는 정말 기쁘기 그지없다. 네 약혼자인 로샨 제국의 2황자 또한 마찬가지지.”
메카일라는 희열이 뒤섞인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세간에서는 2황자의 부속성이 어둠의 정령이라는 사실로 자주 씹어 대는 모양이던데,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능력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모든 과업을 완수한 뒤로 지금만큼 벅차오르는 기대로 충만했던 적이 없는 것 같구나.”
내게 주어진 막중한 기대를 향해 나는 의례적인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메카일라 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험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좋은 상대도 곁에 있고, 무엇보다 전투 경험은 아직 전무할 게 분명하니 타고난 축복만을 믿지 말고 단단히 연습해 놓거라.”
“네, 감사합니다.”
메카일라와의 대화가 끝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나는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우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정령사들은 하나같이 기가 이렇게나 셀 일인가……?”
그 광기를 마주할 때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단 한숨 자고 에시메드에게 시험 내용에 대해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그리고 시험의 날이 밝았다.
거대한 곡선 형태를 이루며 천장까지 이어진 수만 수천의 장서가 꽂힌 책장.
그 아래 무수히 모인 각양각색의 시험자들.
에시메드와 내가 들어서자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선이 쏠렸다.
“저 어린 여자아이가 그 위대한 헤일리안 대공의 여식이란 거지?”
“그뿐만이겠냐, 대정령사 부분은 공부 안 했어? 그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의 유일한 혈육이잖아.”
“로샨의 2황자도…….”
한눈에 보아도 내가 최연소 응시자인 것 같았다.
나는 배정된 자리에 앉아 주위에서 오가는 말소리에는 신경을 꺼 버린 채 시험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자, 자! 1651번째 정령사 자격 취득 시험을 개최하오니, 모두 정숙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리테라 소속 정령사가 등장해 시험 절차를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당연한 소리지만 며칠 전 메카일라가 이야기해 주었던 것과 한 치의 다름도 없었다.
이게 바로 인맥 빨인 건가.
새삼스레 할아버지께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곧바로 이어진 1차 시험에 임했다.
하얀 종이에 몇십 개에 달하는 문항이 나열되었고 그 아래에 답을 서술하는 형식의 시험지였다.
가장 먼저 등장한 질문은 재앙의 개시가 지금으로부터 언제 시작하여 종막을 맞이하였는지, 또한 그 양상을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재앙의 개시는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인간과 정령사들이 대륙 전역에서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건이다.
끔찍했던 혼돈은 20여 년 가까이의 시간이 흐른 뒤, 6인의 대정령사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비정령사 영웅이 등장한 직후 처음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으며, 그 후 수년이 흐른 끝에 마침내 모든 반란군들을 섬멸하였고.
마침내 재앙의 개시가 종결되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문항은 재앙의 개시가 이끌고 온 파란과 세상의 변화를 묻는 것이었다.
[본래 어둠 속성을 타고난 정령사들은 재앙의 개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비록 배척당하긴 했으나 법적으로 사형이 정해질 만큼 증오받았던 존재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앙이 밀려오며 모든 것을 뒤바꾸었다.
어둠의 정령사는 니샤 왕국을 제외한다면 대륙의 어느 곳에서도 최소한의 인도적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필자는 진심으로 의문한다.
진정 어둠의 정령왕은, 자신이 축복한 생명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재앙의 개시라는 전대미문의 학살극을 계획하였던 것인지.]
조금 사설을 덧붙이긴 했지만…… 리테라의 의원들은 새롭고 자유로운 주장을 매우 기특하게 여긴다고 하였으니 덧붙여도 상관은 없겠지.
그다음은 대정령사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