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5)화 (86/141)

<85화>

[자연계 정령왕들이 다가올 재앙을 예지하고 그 미래를 막기 위해 새로이 창조한 존재로서 정령왕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라 여겨지는 ‘정령왕의 숨결’을 조각내어 인간의 영혼에 부여하여 탄생시킨 존재이다.

이들은 보통 정령사의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는 강대한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하지만 평범한 정령사와는 달리 세 가지 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에게 숨결을 부여한 정령왕의 권능만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계 정령왕 한 명이 보유한 권능을 거의 전부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 사실은 그들의 약점이 되지 않는다.

대정령사가 아닌 일반 정령사는 정령 하나가 가진 권능의 반 정도를 구사하는 게 최대 화력이며, 다른 속성까지 함께 병행해서 구사할 땐 개별적 속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더욱 줄어드는 것에 비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특별한 존재들이라 표현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다음은 6인의 대정령사를 묻는 질문이었는데…….

난이도가 왜 이렇게 쉬운 거지?

역시 1차, 2차 시험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고, 3차 시험이 모든 것을 결론지을 가장 중요한 시험인 건가…….

[-바람의 대정령사, 메카일라 유포리움

-물의 대정령사, 아타라 하카드엘라

-대지의 대정령사, 다비드 칼란 테라시움

-숲의 대정령사, 시시페아 드라이어드

-빛의 대정령사, 에제키엘 예레미니아…….]

빛의 대정령사의 이름을 적던 나는 중간에 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에제키엘 할아버지는 헤일리안의 성을 지녔으니, 분명 대공가의 혈족일 텐데.

가문의 계보를 아무리 뒤져 봐도 에제키엘이라는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역사서에 공공연히 기록되어 있는데, 어째서 대공가의 계보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단 말인가.

……진짜 어떻게 된 일이지.

시험이 끝나고 난 후 언제 한 번 에제키엘 할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전기의 대정령사, 주디스 세페미아 -]

마인하르트의 고모할머니.

할아버지의 전우이시자,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셨던 둘도 없는 소꿉친구.

아르카네와 오래전 멸문당해 사라져 버린 가문의 환영.

처음으로 정령을 소환하지 않고 권능을 이끌어 내었던, 잊을 수 없는 순간.

언젠가 이분의 이름이 유달리 나와 비슷한 사실에 대하여 문득 궁금해진 적이 있었다.

결국 할아버지께 여쭤보았더니, 할아버지께서는…….

‘그래.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지. 네 이름은 주디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니까.’

머나먼 옛날을 추억하는 듯,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신 채.

‘마리에트는 나에게 갓 태어난 너의 이름을 지어달라 부탁했지. 그래서 나는, 어쩌면 네가 조금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아뇨, 할아버지. 기분 나빠할 게 뭐가 있겠어요. 저는 제 이름이 좋아요.’

‘그래. ……고맙구나.’

주름이 잡혀 거칠거칠한 손으로 나의 잔머리를 정돈해 주시던 할아버지께서는 회한에 잠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그 녀석을 떠나보내고 제대로 기리지도 못한 것이 마음속에 깊은 한으로 남았던 모양이야. 너에게 지어 줄 이름을 고민하던 순간, 그 녀석이 가장 먼저 떠올랐으니.’

먼저 떠나간 소중했던 친우를 회상하며 갓 태어난 작디작은 손녀에게 친우를 닮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디스 로넨 바스테반.

‘풍요롭다는 것은 영광스러움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단다. 그러니 너의 영광을 지키는 싸움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하여, 환희를 노래하며 살아가기를.’

잠시 기억에 잠겨 있던 나는 곧 다음 질문에 비정령사 영웅의 이름을 적으라는 것을 읽고 빠르게 적어 내렸다.

[-비정령사 영웅,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

비록 로샨 제국에서는 최고 권력자들의 뜻 아래 금기시되다시피 파묻힌 이름이었으나 제국 외로 나온다면 그 사정은 달라진다.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세상을 재앙의 문턱에서 구원했던 위대한 영웅일 뿐.

명백한 진실은 아무리 분탕질을 쳐 뿌옇게 가리려 애를 쓰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다음에 등장한 질문은 태고의 정령들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때.

잠들기 전에 늘 불러 주셨던 자장가를 떠올렸다.

‘태고에 이 우주는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로서는 알지 못할 신비한 섭리로 인하여 그 어둠 속에서 생명의 일리피아가 태어났고, 그 뒤를 따라 죽음이 태어났지…….’

공허한 어둠 속에서 탄생한 두 명의 정령왕.

그보다도 먼저, 가장 최초에 존재했던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

‘태고의 정령들은 그야말로 강대한 정령왕들과 비견해도 격이 다른, 위대하고도 신비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들과 관련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이 있지요.’

그리고 유프스 백작이 가르쳐 주었던 것 또한 회상했다.

일리피아는 모든 생명에게 ‘축복’을 내리고.

아르카네는 모든 생명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종말’을 내리며 그 숨을 앗아간다, 고 하였지.

태고의 정령이라 칭하는 존재들 중 유일하게 그 진명이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이가 바로 죽음의 정령왕이었다.

옛 창세 신화에서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와 함께 최초로 태어난 세 정령들 중 하나라 전해지나 그 진명조차 알 수 없어 죽음의 정령왕은 ‘실존했다는’ 전설적인 구전으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 존재란 말인가.

세 정령에 대한 답을 작성한 후,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곧 어둠의 정령왕에 대해 내가 써 내려간 답안을 다시금 다듬었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아르카네의 인간형 외관은 발치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장발, 티 없이 창백한 피부.

낭창한 몸피, 그 속에 든 것이 얼마나 음흉하고 잔혹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고상한 어투를 사용하며.

목소리는 차분하고 미려한 편.

그 외의 정확한 외형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연유는 다름 아닌 아르카네가 거죽이 다 벗겨진 뱀의 머리뼈에 거대한 검은 뿔이 자라난 형상의 가면으로 언제나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면으로 눈가를 가리는 이유는 그의 두 눈에 파멸의 권능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

같은 정령왕이 아니고서야, 그의 시선을 오롯이 마주하고 죽음을 맞이하거나 미치지 않는 경우가 없어 다른 정령왕들의 요구로 눈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적인 구전으로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므로.]

뭔가, 좀 더…….

펜촉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두어 마디를 추가하여 덧붙였다.

[절대적인 그림자, 어둠, 뱀을 연상시키는 외양.

그야말로 전능한 어둠이라는 표현이 걸맞은 존재.]

전능하다는 표현은 유프스 백작에게 전해 들은 것이기도 하고.

……분하지만 이것만큼 그와 어울리는 칭호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기타 정령왕, 상위, 중위 정령들의 특징을 묻는 의미 없는 질문에 답변을 작성하며 여러 장을 넘기다.

가장 마지막에 나온 문항이 바로…….

[지혜의 정령왕에 대해 알려진 점을 기술하시오.]

……역시, 나올 줄 알았어.

왜 이제까지 안 나오나 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선 이 세상에서 오직 마인하르트와 나만이 알고 있는 지혜의 정령왕에 대한 비밀들이 다채로이 펼쳐졌지만.

세간에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적은 정령왕이었다.

리테라에 속한 정령사들은 더없이 숭배하는 정령왕이었으나, 워낙 지혜의 정령왕이 축복했던 정령사의 수가 적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는 정신계 정령이다 보니…….

그의 축복을 받았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에 대해서도 별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전투에 사용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그의 권능에서 비롯하여, 실제로 마리에트는 주 속성이 지혜였음에도 부속성이었던 물의 정령사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로어의 외형은 더욱 알려진 게 드물어 그야말로 신비주의에 뒤덮인 정령왕이었고.

물론 나는 나이아드나 오리에드에게서 전해 들은 게 있으니 답변을 작성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설산을 그대로 녹여 낸 듯 새하얀 백발, 눈동자는 맑은 은빛이 도는 회색.

커다랗게 움푹 파인 눈매는 끝이 날카롭게 뻗어 있고, 한쪽 눈가에 단안경을 착용함.

고요하고 정결한 인상, 날카로운 미청년의 외관을 지녔다.]

그리고…….

[동등한 격을 지니신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 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령이 없어요. 매사에 엄격하고 절도를 중시하셨으며, 냉혹하리만치 이성적이신 분이셨거든요. 어떨 때는, 마치 미래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지니신 것도 같았대요.]

마리에트에게 전언을 남기며 사명을 부여했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아마도, 아니.

분명히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걸 그대로 작성할 수는 없으니.

[미래를 예지한다는 표현을 사용함에 아깝지 않을 만큼 위대한 지혜를 품은 정령.]

그리하여 1차 시험이 종료되었다.

* * *

“으으으으…….”

나는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며 에시메드를 눈으로 좇았다.

“시험은 잘 봤어?”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에시메드가 물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정말 쉬웠지.”

그리고 두어 시간의 휴식을 가진 후 우리는 2차 시험을 치르기 위해 리테라의 중심부, 지혜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한 사람씩 들어가야 하니 기다려 주십시오.”

2차 시험은 말이 좋아 시험이지, 그저 지혜의 정령왕을 향해 맹세의 말을 읊으면 누구나 통과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시험이었다.

나는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애꿎은 머리칼을 꼬며 가지고 놀다가.

곧 내 차례가 되어 리테라 소속 정령사 한 명의 안내를 받아 지혜의 신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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