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결벽적이리만치 새하얀 내부.
아치형의 천장 기둥 아래 반투명한 휘장이 분명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데도 너울거리며, 한층 더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실제로 마주할 수는 없겠지만 로베릭을 따라 헤일리안 대공가에 입성하면서부터 그 행적을 찾아 헤맸던 로어의 신전에 들어와 이곳을 거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하여 당도한 제단 아래, 나는 흠칫 몸을 떨며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눈의 형상을 수없이 많은 원형의 선이 여러 갈래로 감싸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언뜻 보기에 곡선 위로 보석이 박힌 것으로 보였으나…….
“……눈?”
실상은 작은 눈알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전생에 이와 비슷한 형상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성경에 묘사되었던 천사의 형상 중, 저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괜히 온몸에 소름이 돋아 팔을 쓸어내리며 천장 위에서 떨어지는 햇볕에 하얗게 빛나는 로어의 상징을 올려다보았다.
정령사의 안내에 따라 양손을 교차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맹세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축복받지 못한 이가 덧없이 흐르는 세월의 무상함처럼 수없이 태어남에도, 운명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는 행운을 누린 자가 영원한 지혜의 성전 앞에 맹세하나이다.”
불멸과 필멸.
생명과 죽음.
“축복이 내려진 것에는 마땅히 내가 쓰여질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임을 잊지 않을 것이며, 사욕을 채우기 위해 주어진 축복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고.”
빛과 어둠.
축복과 저주…….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어려운 자들을 구제하여 세상의 평화를 이룩하는 숭고한 사명을 기억하겠나이다.”
이렇게 맹세한다 한들, 그가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나 있을까.
“그러니 지혜의 정령왕이시여, 어리석은 자가 정령사로서 발돋움하는 여정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축복해 주십시오.”
마리에트가 죽고 덩달아 자취를 감춘 지혜의 정령왕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무릎을 꿇고 물러나 있던 정령사는 내가 모든 맹세를 마치자 제단의 아래에 놓여 있던 작은 함을 가지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달칵-
“최종 시험을 치르기 위해 목소리를 묶는 주술을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함에 들어찬 것은 신비로운 광채가 흐르는 푸른색의 염료였다.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건가요?”
새파란 염료를 내려다보며 내가 던진 질문에 작은 붓을 들어 염료를 묻히던 정령사가 대꾸했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정령 소환을 일체 금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험이 종료되는 즉시 지워드릴 터이니 후유증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긴장에 사로잡힌 채 정령사가 목에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을 받아들였다.
“다 되었습니다.”
정말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싶어 입을 열어 보았지만 어떠한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이 주술은 로어의 권능에 속하는 것일까?
나는 다시 한번 로어의 제단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 * *
최종 시험장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채비를 마치는 장소에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목 부근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루스의 눈이라고 하던가.
그를 꼭 닮은 문양이 푸른 염료로 새겨져 있던 것이다.
“수험번호 1101,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3차 시험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하지만 놀라움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리테라의 정령사가 다가왔다.
나는 그를 따라 최종 시험장으로 향했다.
* * *
수험번호 1101,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당신은 총 스무 마리 이상의 포르텐을 처치하는 것이 통과 조건입니다.
공정한 시험을 위해 이 영상구가 당신의 모든 행적을 허공에서 감시할 것이며, 이는 시험을 통과하였다는 증거물로 사용될 것입니다.
통과 이전에 포기하시고자 한다면 지금 드리는 이 신호탄의 안전핀을 빼내어 공중으로 던지십시오.
리테라 소속의 정령사가 즉시 당신을 구출해 드릴 것입니다.
* * *
모든 일행과 분리되어 나무가 첩첩이 가리듯 자라난 숲의 빈터에 홀로 남겨진 나는 손아귀에 다 들어올 만큼 작은 신호탄을 품속에 갈무리한 뒤, 몸을 풀며 의지를 다졌다.
잘 해낼 수 있다고.
이 시험을 위해 그동안 단련해 오지 않았냐고 생각하며.
우우웅-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숲의 저변에서 느껴지는 짙고 불길한.
마치 아르카네를 마주했을 때와 동일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눈빛을 사납게 굳히며 정령의 권능을 불러일으켰다.
* * *
설렘이라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찻물을 목 뒤로 넘기는 메카일라와, 한 벽을 모조리 채운 유리창 너머로 비쳐 오는 숲의 정경만 바라보는 마인하르트.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 아이는 더 이상 네가 지켜야 할 어린애가 아니야.”
“…….”
의장실에 모인 두 사람은 각자 상반된 생각에 사로잡혀 결코 섞여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타라와…… 단순해도 육감 하나만은 괴물같이 뛰어났던 시오른의 손녀라면 반드시 통과하여 무사히 돌아올 것이니.”
마인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카일라는 그런 마인하르트가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야 살아 있는 인간답게 여겨지기도 하여 작게 웃었다.
달칵-
그때 의장실의 문이 열리고, 걸어 들어온 이는…….
“당신은……?”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메카일라는 마인하르트를 발견하자마자 사납게 일그러지는 리아트의 안색과,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담담하나 눈빛만은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마인하르트의 변화를 눈치채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에트, 그 아이가 살아 있을 적에는 서로 대면할 일이 없어 이런 꼴을 보지 않아도 되었건만…….
이디스, 이 등신 같은 놈들은 어린 너를 두고도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구나.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의장께서 부르셨습니다.”
“뭐? 메카일라 의장, 어째서 저런 미천한 자를 곁에 두시는 겁니까?”
“말씀을 삼가시오, 니샤의 국왕이어.”
미천한 자라니.
메카일라는 일순 총기로 빛나던 벽안을 서늘히 가라앉히며 말했다.
“내 개인적으로 연이 있어 아끼는 아이입니다.”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하, 되었습니다.”
가문이 몰락하고 제 성을 숨기며 살아가느라 이와 같은 멸시를 얼마나 당해 왔겠는가.
그렇지만…….
메카일라는 찻잔을 꾹 쥐며 생각했다.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가문의 이름을 쓰느니, 차라리 저를 축복한 정령왕을 이름으로 두는 게 낫다.
“…….”
리아트는 못마땅한 기색을 갈무리하며 메카일라의 측면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대는 웬일로 여기에 오셨소?”
메카일라는 리아트를 흘긋 돌아보며 물었다.
“……시험이 끝나기를 무료히 기다리느니, 의장과 시간을 때우는 게 나을 것 같아.”
리아트는 방만히 늘어진 자세로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답했다.
메카일라는 그의 훤칠한 체구와 미려한 얼굴을 응시하며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외관은 더없이 훌륭히 자라났지만 속 알맹이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 느껴졌다.
성장을 해야 할 텐데, 정말로.
“이자는 신뢰해도 되는 자이니, 본래 논하고자 했던 의제를 꺼내도록 하겠소. 아이나르의 후손들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소이까?”
메카일라가 건넨 물음에 리아트의 낯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묵묵히 창가를 바라보는 마인하르트를 흘긋 응시한 그가 나직이 답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미련하리만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라,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지만.”
“부디 잘 감시해 주시오. 일카이의 후손이시어.”
“……예, 제 조부님의 명예를 걸고.”
리아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지켜 나가야지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다시금 찻잔을 들어 올리던 순간.
“……!”
메카일라는 공포로 경직된 기색을 낯 위로 드러내며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가늘고 고운 손끝에 돋아난 것은 날카로이 자라난 손톱.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젊은 날 수도 없이 느꼈던.
잔혹하리만치 유희적인 태도로.
내 목을 당장에라도 잘라내 버릴 듯한……!
끼기기긱…….
쨍그랑-!
메카일라의 손아귀에서 찻잔이 굴러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요란한 소음에 두 남자의 시선이 쏠렸다.
“의장……?”
“메카일라 님, 괜찮으십니까?”
메카일라는 찻잔이 무참히 깨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음에도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얼굴 위로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멎게 하려는 듯.
팔걸이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쥔 채 침묵할 뿐.
마인하르트와 리아트는 그에 의아함을 느꼈다.
각자가 입을 열려던 동시에.
쿠구구궁-!
“!”
건물 전체가 기울어지는 듯, 거센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창가를 돌아보던 순간이었다.
“……아르카네!”
그제야 숨이 터져 나온 듯, 메카일라가 외쳤다.
“……아르카네?”
“메카일라 님. 설마…….”
리아트와 마인하르트는 그녀의 외침과 방금 느껴진 이 진동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징조를 나타내고 있음을 눈치채고 낯빛을 굳혔다.
메카일라는 부들거리는 몸을 팔걸이를 쥔 채 지탱하고, 총기로 빛나던 벽안을 무겁게 번뜩이며 외쳤다.
“아르카네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 리테라에서!”
* * *
그것이 검은 아가리를 찢어질 듯 벌리자 붉고 길쭉한 혀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녹색과 금색이 어지러이 뒤섞여 현기증을 일으키는 거대한 눈알이 두룩두룩 움직이며 나를 응시했다.
어림잡아 여섯 마리.
아니,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빼곡히 자라난 수풀을 응시하며 숨을 골랐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쏠리며 휘날렸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나의 뒤에 나타난 것은,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하게 치솟은 물의 장막이었다.
나는 어둠이 뱉어 낸 괴물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음으로 쓸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러자 대지 위에 바다가 현현했다.
짙푸른 파도가 몰아치며 사위가 먹먹하게 잦아들었다.
모든 것이 쓸려 나간 그 자리에 오롯이 선 이는 단 한 명.
나 자신일 뿐.
눈으로 괴물의 사체를 센 나는 재빨리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