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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7)화 (88/141)

<87화>

* * *

[그르르륵…….]

에시메드는 하반신은 파충류, 머리는 늑대인 괴물의 조각난 사체를 내려다보며 냉기를 거두었다.

그는 이디스보다 한 단계 아래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사살해야 할 괴물이 약화된 만큼, 처치해야 할 수는 더 늘어났다.

이제 서른 마리…….

[예순 마리 이상의 괴물을 사살할 것.]

“…….”

휠카셀의 환각을 이용하면 죽이는 일이 더 쉬워지겠지만.

에시메드는 얼어붙은 숨을 훅 내뱉으며 생각했다.

이디스와 약혼한 후, 스스로를 향해 결심했다.

더 이상 어둠의 정령의 권능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오직 그 아이에게 떳떳한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에시메드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숨을 고르며 걸음을 옮겼다.

[아하하하…….]

바로 그때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이.

에시메드는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응시하였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낌새가…… 어쩐지 좋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쿠구구궁-!

고요한 푸른 하늘 저변에서, 불현듯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에시메드는 당황하여 몸을 돌렸다.

굉음의 진원지는 하필이면 리테라 쪽이었다.

캬아아악-

그 직후, 동시다발적으로 괴물의 울음소리가 고요하던 하늘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에시메드는 두 눈을 믿지 못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어둠이, 푸르르던 천공을 말 그대로…… 천천히 좀먹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현실적으로 기괴한 현상을 바라보던 에시메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둠의 정령.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현현하여 리테라로 모여들고 있었다.

“……!”

그리고 소년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에시메드는 이디스를 상기하며 다급히 뒤돌아섰지만, 그 소녀가 이 너른 숲속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정령사 시험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목소리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 에시메드는 초조함으로 얼룩져 다시금 튀어나오려는 포악함을 간신히 억누른 채 거칠게 숨을 골랐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뒤편으로 검은 안개로 뒤덮인 형체 두 개가 나타났다.

에시메드는 극심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들의 기척을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

나타난 두 정령의 이름은 증오의 정령 트레가드와, 공포의 정령 휠카셀.

그가 소환하지 않았음에도 현현한 어둠의 정령들이 에시메드를 묵묵히 응시하며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에시메드는 몇 년 만에 마주하는, 가장 차갑고 외로웠던 시절 그의 곁에 함께했던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이라도 내뱉고 싶은데, 목소리를 억제하는 주술로 인해 입술만 달싹거릴 뿐.

검고 텅 빈 눈으로 한동안 에시메드를 바라보던 그들은 불현듯 땅에 무릎을 꿇으며 일제히 입을 열어 읊조리기 시작했다.

[미천한 권속들이 위대하고 전능하신 어둠, 우리의 왕을 배알하나이다.]

“……!”

에시메드의 형형한 안광이 일순 망연해졌을 때.

[나를 기억하느냐?]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존재의 등장에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에시메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와 기척에 담긴 짙은 어둠과 상반되는 창백한 손아귀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천천히 다가왔다.

[드디어, 너를 다시 되찾는구나.]

에시메드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고.

[돌아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섬뜩한 공포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에시메드의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캬아아악-!

검은 무저갱이 아가리를 벌리고 쫓아오는 듯한 괴물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달려가던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괴물의 입이 빈 허공을 향해 돌진하던 순간,

콰앙-!

대지에서 솟아난 지벽이 북슬한 털로 뒤덮인 거대한 몸체를 강타했다.

[키에에엑……!]

괴물은 끔찍한 괴성과 함께 허공으로 떠올랐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지를 갈라 거대한 균열을 일으켰다.

종래 그 틈새로 떨어진 괴물은 몸이 끼어 흉포하게 몸부림치다, 계속해서 조여드는 지각에 결국 산 채로 몸이 조각나 죽음을 맞이했다.

멀리 떨어져 몸을 피하고 있던 나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다가갔다.

이것으로 스무 마리.

시험 통과 자격을 완성했다.

드디어!

긴장이 탁 풀리는 편안한 기분에 살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바로 그때였다.

“이게…… 뭐야?”

하늘이 어두워졌다.

한눈에 보아도 해가 졌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낀 것도 아니었고, 그저…….

눈이 부실 만큼 푸르던 천공이 먹먹한 그림자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곳곳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고, 그나마 색채를 유지한 하늘의 영역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어째서?

이게…… 무슨 일이야?

콰광-!

그 순간, 번쩍이는 황금빛 광채가 하늘을 밝혔다.

곧이어 천공이 찢겨 나가는 듯한 거대한 굉음과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진동이 발아래로부터 느껴졌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돌아섰다.

저 멀리 보이는 리테라의 건물 위로, 수십 갈래의 번개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광경 앞에서 나는 당연한 수순처럼 연상했다.

마인하르트를.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리테라에 거대한 변고가 밀려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 * *

웅성웅성, 갑작스러운 진동에 건물 바깥으로 나온 사람들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마다 놀라움과 염려를 토로했다.

“……아르카네라니요. 메카일라 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겁니까.”

메카일라의 외침이 담은 그 이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의장실.

이전과 달라진 것 없이 가라앉은 안색이었으나 그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마인하르트가 나직이 물었다.

메카일라는 떨리는 숨결을 토해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어둠에 좀먹혀 가고, 내 존재를 훤히 안다는 듯 잔혹하게 전해져 오는 위협…….”

비틀거리며 창가로 걸어가는 그녀에게서 뒤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젊은 날 수도 없이 겪었던 전조 증상이었다.”

“……전조 증상이라니?”

아르카네라는 말에 이전에 볼 수 없이 충격에 잠긴 듯 창백한 낯빛의 리아트가 메카일라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두워진 하늘을 응시하며, 차가운 유리창을 떨리는 손으로 짚고서.

메카일라가 대답했다.

“……곧이어 내가 있는 곳으로 닥쳐올 재앙을 암시하는 직감이었어.”

“재앙……? 의장, 그렇다면 지금 이 현상은 설마,”

“어둠의 정령왕이 리테라를 습격해 올 징조란 말씀이십니까?”

마인하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한 순간, 리아트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내 메카일라가 천천히 창가에서 뒤돌아서며 시인했다.

“그래. 닥쳐오겠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겪어 보지 못했던…….”

숨길 수 없는 두려움과 무거운 결의로 뒤섞인 눈동자가 어둠에 물든 하늘을 등지고 파랗게 빛났다.

“너희 세대가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끔찍한 재앙이 말이다.”

* * *

“…….”

나는 리테라를 향해 달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끝없이 내리치는 황금빛 전격에 눈앞이 어지러웠으며.

심장을 뒤흔드는 굉음이 고막을 찢어 버릴 듯 거대하여 두려움만 가중될 뿐이었다.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아져, 하늘은 이제 밤이 되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나는 이를 악물며 대지의 권능을 사용해 지반을 들어 일으켰다.

쿠구구궁-!

울창하게 자라났던 나무가 무참히 부서지고 뽑혀 나가며 땅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고, 두어 사람 정도 다닐 수 있는 넓이의 지반이 높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그 위를 내달리며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대지를 일으키고, 조금이라도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리테라의 외벽을 부서뜨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검문소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냈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내달리는 동안 뇌전은 끊임없이 내리쳤고.

리테라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곳의 상황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공중에 떠오른 검은 형체들의 정체를 깨닫고 경악에 사로잡혔다.

그것들은, 어둠의 정령이었다.

젊은 청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으나 한눈에 보아도 인간의 형태를 조악하게 흉내 낸 것에 불과한 흉측한 몰골…….

어둠의 상위 정령, 스프라이트가 족히 수백은 넘게 리테라의 상공에 현현해 있었던 것이다.

그 지위를 상징하는 스산한 금빛의 동공은 역안으로 번뜩였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다급히 달아나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그런 정령사들을 비웃으며 검은 손을 뻗어 정령어로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어떤 정령사들은 토악질을 하고 바닥에 쓰러진 채 온몸을 경련하며 비명만을 내지르고.

또 다른 정령사들은 허상을 향한 분노에 사로잡혀 같은 편을 맹렬히 공격하며, 리테라를 부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린한다는 표현이 걸맞은 지옥처럼 끔찍한 광경이었다.

“……!”

리테라에 뛰어든 나는 숨을 몰아쉬며 대체 어디가 안전한 장소일지 고민하느라 빠르게 도망치지 못했고.

불행히도 스프라이트 하나가 나를 발견해 버렸다.

그 정령은 지독하리만치 잔악한 악의가 서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검은 손을 펼쳤다.

어둠의 정령들은, 이때껏 단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눈이 마주쳐 피할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던 그 순간.

타다다닥-

누군가가 거칠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으며 두 눈을 가리고 바닥으로 함께 넘어졌다.

“……!”

한바탕 땅을 구른 나는 고통을 삭이며 눈가를 덮은 커다란 손을 잡아 내렸다.

그 순간 보이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리아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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