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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8)화 (89/141)

<88화>

“너, 괜찮아?!”

“…….”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잠시 멍해졌던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리아트는 다행이라고 속삭이며 옅게 웃었다.

아니, 지금 내가 다치고 말고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리아트의 옷자락을 붙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 물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주술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낭패감에 빠져 목을 매만지던 나를 내려다보며, 리아트가 품속에서 작은 원형의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

그 안에 든 것은 검은 염료였다.

그는 손가락에 염료를 묻혀 나의 목 위에 새겨진 주술 문양을 덧그리고는 이제 말해 보라고 권했다.

“아……. 아, 목소리가!”

“네게 걸려 있던 주술을 무력화시켰으니 이제 말할 수 있을 거다. 잠시만, 이디스!”

나는 리아트의 멱살을 부여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어둠의 정령들이 족히 수백은 넘을 것처럼 몰려와 있고, 마인하르트와 메카일라 의장님은 어디에…… 꺄악!”

“……미안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그 순간, 리아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내 얼굴을 검은 옷자락으로 감싸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은 채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리아트의 망토 자락으로 가려진 터라 더 이상의 끔찍한 광경은 보이지 않았으나 귓가에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뇌성과 괴로운 비명.

고함, 광소, 흐느끼는 소리에 그야말로 정신이 살짝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비로소 실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 듯, 리아트가 나를 내려놓으며 얼굴을 휘감은 망토 자락을 거둬냈다.

갑자기 시야로 들어오는 환한 빛에 눈살을 찡그리던 나는, 곧 리아트가 나를 데리고 도망쳐 온 곳이 바로 지혜의 신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의장실도 안전하지 않다. 싸울 여력이 되지 않거나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이 신전으로 대피하고 있어.”

그의 말대로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복작였는데 하나같이 두려움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거나, 허옇게 질린 낯빛으로 망연히 문가 쪽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멍하니 물었다.

진정으로 이 무슨 변고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아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복잡한 기색으로 일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정령왕이 자신의 권속 수백을 리테라로 보내 습격을 가하고 있다. 의장과 너를 따르던 남자는 최전선에 나가 대응하고 있고.”

“네? 아니, 대체 왜요?”

나는 경악하여 이유를 물었으나 리아트는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자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뇌리에 떠오른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에시메드였다.

“……리아트 님, 혹시 에시메드는 보지 못하셨나요?”

나는 황급히 리아트의 팔목을 붙들고 물었다.

그러나 리아트는 고개를 저으며 보지 못했다고 답할 따름이었다.

“거취가 확인되지 않았다 하여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까 오는 길에 바깥의 상황을 보았겠지, 그들은 모두 어둠의 정령들에게 당한 거야.”

절망에 빠져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조차 못할 때, 리아트가 나를 달래기 위해서인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어둠의 정령들은 그 자체의 힘이 강대한 것은 아니나 인간의 ‘정신’을 유린하여 무참히 망가뜨리기에 가장 두려운 존재로 취급되곤 하지. 하지만 어둠에게 축복받은 정령사들은 그들의 권능으로부터 타고나기를 면역되어 정신이 휘둘릴 위험은 염려치 않아도 돼. 그러니 로샨의 2황자는 바깥의 정령사들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그 녀석이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 충분히 제 한 몸은 지키고 있을 거다.”

“……잠시만, 그럼 마인하르트와 의장님은요? 그 사람들은 위험한 게 아니…….”

리아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환각 마법이 통하지 않는 내가 왜 전선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나? 정신 조작은 통하지 않지만 내 주 속성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어둠은 같은 어둠을 거스를 수 없지.”

어둠의 정령들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자는, 단 한 부류.

빛의 속성을 지닌 정령사였으므로.

“메카일라 의장은 여타 정령사들과 비교조차 불가한 대정령사이나 정신 마법을 무력화시킬 방도가 없지만, 마인하르트. 그자는 다르다. 빛의 정령에게 축복받은 것은 아니나 전기의 속성 또한 환하게 작열하는 광채를 스스로 발하며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니 어둠의 정령들에게 대항하기엔 손색이 없지.”

그래서 옛날, 대정령사들이 재앙과 맞서 싸울 적에도 빛의 대정령사와 전기의 대정령사가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고 전해지지.

불 또한 해당되긴 하나 불의 대정령사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현재로선 알지 못할 영역에 불과하고.

나는 리아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와 동시에 내가 어째서 리테라로 오는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천둥이 내리쳤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했다.

어둠의 정령이 가하는 정신계 마법에 저항하기 위해 계속해서 뇌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성을 마비시키며 스스로를 잠식하던 두려움을 가까스로 내려놓았으나, 곧 현재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방도를 찾아 고민에 잠겼다.

“오리에드와 나이아드를 소환하면 이 상황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이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 소환도 가능해졌는데.”

“……오는 길에 어둠의 정령을 제외한 정령의 모습을 본 적이 있나?”

어라, 나는 멈칫하며 리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리만큼 보지 못했다.

상황이 워낙 끔찍하고 긴박하여 찬찬히 살펴볼 도리가 없긴 했지만.

리테라의 모든 정령사가 상시 소환 상태를 유지한다 해도, 이와 같은 변고에는 정령을 직접 소환해 함께 싸울 법도 한데……?

“어둠의 정령왕이 가장 두려운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강림하는 곳을 그의 권역으로 잠식시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이도 결코 발 들이지 못하게 해. 그 상대가 정령왕일지라도.”

“그렇지만…….”

반문하던 순간,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절망에 잠겼다.

칸델 가문의 허상에 갇혔던 때.

오리에드가 그의 힘으로서는 들어올 수조차 없어 그 위험천만한 유히리안의 인격을 깨워 내지 않았던가.

“아르카네는 태고의 정령왕 중에서도 가장 오래 묵은 존재다. ……그만큼 격이 다르지 않겠나.”

맙소사, 진정으로 이 위기를 돌파할 방도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빛의 정령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지혜의 신전 입구로 누군가 다급히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나 또한 그 얼굴을 알던 사람이었다.

시험 감독관을 맡았던 정령사였으므로.

중년의 정령사는 숨을 거칠게 헐떡이며 빛의 속성을 가진 정령사를 애타게 찾아 헤맸다.

“의장님과 전기의 정령사님께서 맞서고 계시나 중하위 어둠의 정령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바깥에 남은 사람들이 대피하지 못하고 계시니, 한 사람이라도 더 힘을 합쳐 주십시오!”

수많은 인파 속 열 명 남짓한 청년들이 망설이며 앞으로 나섰다.

정령사는 그들을 데리고 서둘러 신전을 빠져나갔다.

그토록 긴박한 상황이 바로 지금 리테라가 처한 위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혹시 지혜의 신전에 결계를 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능력은 없나요?”

마지막 희망으로 던진 물음이었지만, 리아트는 두 눈을 내리감으며 답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진작에 의장이 사용했겠지. 지혜의 정령왕은 정신계 정령이라 물리적인 행사는 거의 불가능해.”

유프스 백작이 알려 주었던, 빛의 제국을 다스리던 황가가 나의 선조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빛의 정령왕에게 축복받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워한 적이 없었는데.

“…….”

지금과 같이 무력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그 사실이 이토록 괴로울 수가 없었다.

* * *

별 하나 없이 캄캄한 하늘.

그 높은 곳에서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꼿꼿이 선 초로의 여인.

메카일라는 눈을 굴려 가장 높은 첨탑에서 끊임없이 벼락을 내리치는 청년을 응시하고, 아직 ‘진짜’ 재앙은 닥쳐오지 않았음에도 혼란과 고통에 잠겨 아수라장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바로 그때, 옥구슬이 울리듯 고아한 미성이 말을 걸어 왔다.

메카일라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귀에 달린 장신구가 청명한 소리를 내며 눈부신 광채를 내뿜었다.

“에리얼 님.”

[아르카네가 이곳에 곧 제 그림자를 보내올 것이다.]

섬세히 장식한 하늘색 머리칼이 스산히 감도는 바람결에 나부끼듯 흩날렸다.

에리얼은 고개를 들어 검은 하늘을 응시했다.

메카일라는 에리얼의 심기를 반영한 듯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고요하나, 숨길 수 없이 포악한 기세를 품은 바람에 흐트러진 옷자락을 손으로 두어 번 도닥여 정리하고는 답했다.

“무슨 도리가 있을까요. 이미 외부로 통하는 모든 통로는 탐욕스러운 어둠에 막혔습니다.”

[거짓말.]

에리얼은 메카일라의 말을 단 한 번에 일축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늘 청명하여, 그 속이 어찌할 수 없이 훤히 드러나 보이던 하늘빛 눈동자는 격정으로 일그러진 채였다.

[너는 알고 있다. 나의 힘을 빌린다면 너와 아스트라페가 축복한 청년, 너의 제자. 그리고 일리피아가 귀애하는 소녀만은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한다면 떠난 자리에 남을 수많은 자들은요.”

메카일라는 에리얼을 마주 응시하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에리얼은 날 선 어조로 대꾸했다.

[내게는 네가 가장 중요해. 저 청년과 너의 제자와, 이 아래에 존재하는 소녀는 다른 정령왕이 아끼는 존재이니 함께 데려가겠으나 그 외의 피조물들은 내 알 바가 아니지.]

에리얼은 비명과 광기가 낭자한 아래를 흘긋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그니스는 평화를 소원하며 모든 비극을 방관하고, 로어는 도무지 꺾을 도리 없이 강경하다. 그동안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너만은 안 돼.]

분노로 물든 푸른 눈동자가 메카일라를 돌아보았다.

[운명의 흐름 속에서 나는 태고의 시절부터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을 빼앗겨 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남은 건 네가 마지막이야. 내가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존재는, 이제 너 하나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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