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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89)화 (90/141)

<89화>

절절한 고백이었으나 메카일라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서 담담히 이야기했다.

“에리얼 님. 저는 필멸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더라도 머지않은 날 죽음을 맞이할 거예요.”

[그것만은 내 속이 다 뭉개지더라도 참을 수 있다!]

끝내 에리얼이 역정을 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감정을 참지 못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메카일라를 바라보던 그가 짓씹듯 말했다.

[아르카네의 손에 잃는 것만은 결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단 말이다.]

“…….”

[그러니 내 뜻을 따라. 어차피 일리피아가 아끼는 소녀와 너의 제자, 그리고 저 청년을 제외한 다른 자들은 앞으로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만큼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니.]

메카일라는 속으로 그가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에리얼 님.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당신께서 제 뜻을 꺾으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존재하긴 하던가요?”

[…….]

에리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그 앞에서 메카일라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 택한 모든 순간이 옳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제 선택으로 운명을 가르고자 합니다.”

[……메카일라.]

“하나 저는 이미 노쇠하였으니, 이제는 일리피아께서 귀애하시는 소녀에게 모든 것을 맡겨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녀가 낯 위로 그려 보인, 어린 날 곧잘 그를 향해 짓곤 했던 재기 넘치는 미소를 내려다보던 에리얼은 결국 아무런 반론도 내뱉지 못했다.

“의장님…….”

“내려가서 헤일리안 대공녀와 내 제자를 데려오거라. 분명 그들의 곁에 있을 니샤의 국왕도 함께.”

“알겠습니다.”

늙은 리테라의 의원은 의장이 품은 뜻을 어렴풋이 짐작한 듯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메카일라는 손을 까닥이며 어서 가 보라 손짓한 뒤.

다시금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검은 하늘을 돌아보았다.

* * *

“대공녀님, 이곳에 계셨군요!”

“……이드리스 영식?”

리아트와 함께 복잡한 인파를 헤매며 에시메드를 찾아다니던 도중, 누군가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인파를 헤치며 다가오는 낯익은 소년을 발견하고 놀라 외쳤다.

이드리스는 눈물마저 맺힌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안도 어린 미소를 짓고 나의 손을 꼭 붙들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 영식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얼떨떨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던 것도 잠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느덧 이드리스와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작금 닥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스승님이 염려됩니다. 아무리 대정령사이시라고는 하나, 이미 노쇠하셨는데…….”

“……저 또한 의장님이 염려되기는 마찬가지예요. 제가 뭐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좋을 텐데.”

“헤일리안 대공녀, 이드리스 사제!”

바로 그때, 어느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이드리스와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트라엘 의원님?”

리테라의 고위 의원으로 추정되는, 눈썹마저 하얗게 센 노인은 깊은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장님께서 헤일리안 대공녀와 이드리스 사제, 그리고 니샤의 국왕을 부르십니다.”

“……!”

“제 뒤를 따라오시지요.”

메카일라 의장이 우리를?

나는 리아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옅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일단 가 보도록 하지.”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내 등을 살짝 밀며 말했다.

“가 보면 알게 될 테니.”

나는 지혜의 신전을 나서며 다시 한번 에시메드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고.

아쉬움을 안은 채 지혜의 신전을 빠져나갔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에시메드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 * *

부름을 받고 올라간 첨탑에는 당연하게도 메카일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인하르트는…….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첨탑에 홀로 서 있는 마인하르트를 바라보다 어렵게 시선을 떼어내었다.

그러다 문득, 메카일라의 곁에 서 있는 미려한 청년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분명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정령인데, 저토록 인간의 모습과 흡사한 외형이라면…….

“이분은 바람의 정령왕이시다.”

“네?!”

바람의 정령왕?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람의 정령왕, 에리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골똘히 바라보는 듯싶더니, 곧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거두었다.

“이디스 로넨 헤일리안. 작금 닥쳐 온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

“……어둠의 정령왕이 권속에게 명해 리테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그래,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메카일라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완전히 어둠으로 물든 하늘을 돌아보았다.

“이미 리테라는 어둠의 권역에 거의 삼켜졌다. 외부로 통하는 수단도 모두 막혀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어.”

“어떻게…….”

“이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구나. 젊은 날 수도 없이 겪었던 재앙의 전조를…….”

메카일라는 쓸쓸히 읊조리며 가슴 위로 한 손을 짚고 말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에 비해 미숙하고 어리석어 때때로 성급한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내겐 거의 남지 않은 빛나는 생기가 있었고 인간의 경계를 아득히 벗어난 경이로운 권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지.”

“메카일라 님…….”

“이디스. 너는 네 외조부모와 우리가 어떻게 재앙을 종식할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느냐?”

나는 뜻밖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과정은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고.

모든 문헌에서는 그저 대정령사들이 재앙을 물리쳐 세상에 구원을 가져왔다는 식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으니.

“지금 말해 주마. 바로 어둠의 정령왕을 직접 대면해 그와 맞서 싸워, 스스로의 영혼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그를 봉인하였기 때문이다.”

“네? 그게, 무슨…….”

아무리 대정령사라 한들, 인간의 몸으로 정령왕과 맞섰다니?

나는 거대한 충격에 짓눌려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처음에는 전장에 투입되어 어둠의 권속을 물리쳤으나, 진정 원인 되는 존재는 건드리지도 않고 졸개들만 해친다면 재앙이 종식될 수가 있겠느냐. 우리의 길을 인도하셨던 분은 지혜의 정령왕이셨다.”

메카일라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적지를 넘나들며 어둠의 정령왕에게 가장 가까워졌을 때, 그분께선 재앙의 근원인 어둠의 정령왕을 봉인하는 법을 알려 주셨지.”

지혜의 정령왕……!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말아쥐며 그의 이야기를 새겨들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반신반의하였다. 아무리 우리가 정령왕의 근원 일부를 품고 태어난 대정령사라 한들, 어찌 태고부터 존재하였던 정령왕과 맞서 이길 수 있겠느냐.”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령왕은 불멸의 존재, 아무리 특별하다 하나 필멸에 속하는 대정령사가 어떻게…….

“우리의 반론에 지혜의 정령왕께선 답하셨다. 어찌하여 이토록 끔찍한 재앙이 세상에 도래하였는지, 태고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은 전쟁은 어찌하여 종막이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쿠궁-

메카일라가 그 부분까지 이야기했을 때,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곁에 있던 리아트의 팔에 몸을 의지했다.

메카일라는 마인하르트가 있는 곳을 흘긋 돌아보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균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

그 순간, 나는 과거 마인하르트가 이야기했던 것과 동일한 단어를 이야기하는 메카일라를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절대적인 중립은 모든 세력의 공평함을 추구한다. 어둠의 정령왕은 태고부터 생명을 혐오해 왔으며, 언제든 세상을 파괴시키고 궁극적인 침묵을 가져오기만을 바라지.”

리아트의 팔을 붙든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생명과 동시에 탄생할 수 있었던 정령왕 중 몇몇은 그러한 아르카네의 심중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며 경계했다. 그렇게 첨예한 갈등이 이어져 오던 어느 날, 정령왕 중 하나가 직접 나서 중립에게 요청했지.”

메카일라는 서늘한 기운을 그 푸른 벽안에 드리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언제나 균형을 추구한다면서, 어째서 뜻을 함께하는 정령왕들이 다수를 이뤄 우리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와 대적하는 일조차도 허락지 않는 것이냐고. 당신에게는 태고의 어둠이 너무나 소중하여 우리의 존재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고.”

“……!”

“그러자 중립은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정령왕에게 물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고. 그러자, 그 정령왕은 답했지.”

[수백 년에 한 번, 일곱 명의 정령왕이 모두 동의를 표함을 전제하여 어둠의 정령왕의 모든 힘을 빼앗고 금제에 묶어 수백 년 동안 그를 봉인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바로 그때, 천공을 응시하던 에리얼이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멍하니 바람의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중립은 동의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한 정령왕을 필두로 하여 그와 뜻을 함께하던 일곱 명의 정령왕은 어둠의 정령왕에게 금제를 내리는 결단을 ‘상징’할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근원을 떼어내어 하나의 물건으로 만들었다.”

메카일라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그게 바로 세간에서 칭하기를, ‘정령왕의 유물’이라 전해지는 것들이었다.”

이때까지는 그저, 정령왕들이 자신이 아낀 정령사들을 위해 내린 보물이라 생각해왔는데…….

“일곱 명의 정령왕은 각자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던 정령사에게 유물을 맡겼다. 어둠의 정령왕을 막아설 ‘기회’를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들에게 주었던 것이지.”

그 순간, 나는 이 기나긴 이야기 뒤에 숨겨진 내막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인간은 가장 약하여 정령이 지켜 주어야 할 존재이자 아르카네의 악의가 향하는 정점이었기에.”

어딘가 짙은 씁쓸함이 감도는 그녀의 목소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불멸자들의 사랑을 읊조렸다.

“하지만 그들이 인간에게 주었던 사랑이 길고 긴 비극을 가져오게 될 줄은 몰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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