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바보같이 주저하지 마.
반드시 해야 할 일이야.
설사 내 목숨을 걸더라도, 사력을 다해서 이뤄야 할…….
“그래, 내 너의 약속을 믿으마. 한시가 급하니 어서 가거라.”
메카일라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요, 메카일라 님. 리아트 님, 미리 내려가서 채비를 해 주세요.”
하지만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기나길 여정이 시작되기 전에…….
나는 저 멀리 솟은 첨탑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빨리 내려와.”
리아트는 내가 인사하겠다는 사람의 정체를 눈치챈 듯 설핏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그가 내게서 돌아서자 검은 옷자락이 분노한 바람결에 휘날렸고.
“저 첨탑까지 안내해 주세요.”
어머니의 비밀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유하는 사람.
내 모든 것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그와의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나는 의원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디뎠다.
* * *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천지를 진동시키며 내리꽂히는 벼락으로 사위가 광휘로 물들었다, 다시금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더없이 위태로운 기류가 감도는 첨탑의 꼭대기에 그가 홀로 서 있었다.
“……이디스 님?”
나의 기척을 느낀 듯 마인하르트가 돌아서며 놀란 듯 말했다.
“이곳엔 어떻게……. 무사하신 겁니까?”
곧이어 나의 안위를 살펴 오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삼키고 애써 웃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웃어 봤자 마음이 가려질 리는 없는데.
“…….”
그 또한 나의 이상을 감지한 듯 얼굴을 굳히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마인하르트, 저는 이제 니샤로 떠나야 해요.”
그 순간, 내가 내뱉은 말에 그가 움직임을 멎었고.
그의 손이 마치 허공에 박제된 듯 머물렀다.
“오늘 메카일라 님에게서 얼마나 많은 비밀을 전해 들었는지 몰라요. 분명 정령사 자격시험을 치르러 리테라에 온 것일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거대한 일에 휘말리게 된 걸까요?”
“……이디스.”
나는 그의 물음도, 눈길도 피한 채 고개를 돌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어쩌면 이게 제 타고난 운명일지도 몰라요. 어머니께서도 지혜의 정령왕이 맡긴 사명을 이루시려다 끝내 돌아가셨으니까……. 저는 어머니의 유지를 잇는 거죠.”
침묵만이 아프게 맴돌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말로 치환하지 못할 감정이 비쳐 오는 그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며 다시금 웃었다.
두 볼을 타고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러니 다녀올게요.”
모든 두려움과 내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최대한 빨리. 그때까지…….”
무너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막으며 엉망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꼭, 살아계셔야 해요.”
“…….”
마인하르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알 수 없을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
몇 해 전, 아르카네로 인해 과거에 떨어져.
사랑을 잊고 포악함에 물든 대지의 정령왕을 앞에 두고 내게 지었던 것처럼, 믿지 못할 만큼 따스한 미소를 그 낯 위로 그려 보이며.
몸을 숙여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무사하시다면 저 또한 사는 것이고,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신다면 저 또한 영원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던 때.
그의 잔잔한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그러니 이번엔 제가 약조를 청하겠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당신을 기다릴 테니, 당신 또한 무사히 돌아와 주십시오.”
“…….”
위태롭게 넘실대던 눈물이 다시금 볼을 타고 흐르던 순간.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인하르트는 어린아이처럼 우는 나를 품에 끌어안고 가만히 등을 도닥였다.
“이디스! 곧 아르카네의 그림자가 들이닥칠 거다, 어서 내려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리아트의 품에 안겨 거칠게 내달리는 말을 타고 리테라를 벗어났다.
떠나는 우리의 뒤로 장엄한 절벽 위 고독히 세워진 리테라를 한 점 미물로 보이게 만드는.
쿠구구구-
일렁이는 어둠으로 그 육신을 이루고, 눈자위를 불길한 녹색 안광으로 번뜩이는 거대한 뱀의 머리가 천공을 뚫고 내려오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혼절한 나를 끌어안은 리아트는 대륙 유일무이한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하는 나라.
니샤로 향했다.
7. 가장 어두운 밤
오래전, 바람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와 빛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를 필두로 세워진 두 개의 제국이 역사에 그 치세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시절.
머나먼 변방.
그 어떤 일족도 터를 잡지 않고 등한시했던, 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땅에.
수장을 잃고 그 자식이었던 세 형제를 위시한 작은 무리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들이 이주한 대지는 어둠의 그림자에 속하는 권역이라, 그 주인의 영향을 받아 한 해의 삼 분의 이가 넘는 시간이 태양이 떠올랐음에도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세간에서 칭하는 밝은 낮이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므로 기괴하고도 위험한 지역으로 여겨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발을 들이기를 꺼렸다.
또한 그것뿐이었을까.
그 대지의 주인이 지독히도 생명을 미워하였기에 혹여라도 들어서는 인간들은 족족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으니.
그리하여 종래 어떠한 이도 발을 들이지 않고 두려워하던 그 땅에, 한 어리석은 민족이 스스로 들어선 것이었다.
도망자였던가.
어디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초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던가.
그 척박하고 불길한 땅에 그들이 들어섰던 이유를 이제 와 알 길은 없으나, 무리는 그곳에 터를 잡고 세 형제를 군주로서 받들었다.
‘첫째는 홀로 떨어진 아이나르.
둘째는 영원히 꿈꾸는 안누시카.
셋째는 천공으로 올라선 일카이.’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은 세 형제의 이름을 노래했다.
‘형제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너희 모두를 이끌고 이 땅으로 들어와 터를 잡은 이 또한 나이니, 왕좌는 이 나와 나의 후손들이 물려받아야만 마땅하다.’
세 개의 왕가가 만들어졌으나 왕위에 오르는 가문은 오직 하나.
맏이였던 아이나르와 그의 후손들 뿐이었다.
안누시카와 일카이의 후손들은 왕족으로서 군림하였으나 왕좌에만은 오를 수 없었다.
복종을 요구하는 맏이를 향한 아우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형제의 명령에 순응하였고.
세 형제는 태어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성으로 물려주었다.
그 자녀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부모의 이름을 물려주었으며,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흘러 니샤의 왕족들은 각자의 성으로서 자신들의 시조를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왕의 자리에 오른 아이나르와 그 후손들은 자신들의 민족과 나라를 더없이 사랑했다.
하나 그들의 자애는 자신들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타국과 이민족들을 무자비하게 해치며 착취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고.
그리하여 니샤 왕국은 개국 후 수천 년 동안 대륙 모든 나라를 공포에 떨게 만든 침략자로서 그 악명을 드높였다.
오래도록 기다려 온, 찬탈의 때가 도래하기 전까지.
* * *
억센 빗줄기가 수없이 내리는 검은 하늘을 뚫고 세 마리의 말이 어둠에 잠긴 왕궁 앞에 멈춰 섰다.
리아트는 울다 지쳐 잠든 이후 깨어나지 못하는 작은 소녀가 내리는 빗물에 젖지 않도록, 그 몸을 감싼 망토를 더욱 단단히 싸매고서 소중히 안아 든 채 말 아래로 내렸다.
그는 수하에게 턱짓하며 문지기에게 신분을 밝히라 명했다.
끼이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왕궁의 성문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열리며 니샤의 군사들이 자신의 국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따라와.”
리아트는 이디스를 받쳐 안고 남은 한 손을 뻗어 이드리스의 팔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군주의 귀환을 전해 듣고 서둘러 나온 파샤는 여느 때와는 달리 리아트가 안은, 또 그 팔을 붙들고 있는 생경한 두 아이의 모습을 마주하며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전하, 이르게 돌아오셨군요. 한데 그 아이들은 누구…….”
“리테라에서 데려온 아이들이다.”
리아트는 턱을 까닥이며 짤막하게 답했다.
“이 아이들의 존재가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아라. 또한 당분간 귀빈의 신분으로 왕궁에서 지낼 것이니 거처를 준비해.”
“군주의 명을 받드나이다.”
파샤는 의문을 던지는 대신 복종을 표했다.
“시녀들이 너를 안내할 거다. 그를 따라가도록 해라.”
“이디스 대공녀께선…….”
“이디스는 내가 돌볼 터,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드리스는 정신을 잃은 이디스가 걱정스러운 듯 말문을 열었으나 리아트는 소년의 목소리를 차갑게 끊으며 이디스를 고쳐 안고 내실로 향했다.
“…….”
“공자님,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홀로 남겨진 소년의 회안에 리아트를 마주하던 순간과 완전히 상반된 차가운 빛이 설핏 번뜩였으나 곧 그 흔적을 감추었고.
이드리스는 니샤의 시녀들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 *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늘 명랑한 목소리로 종알거리곤 하던 아이가 깊이 잠들었기에 고요함만이 감도는 침실.
리아트는 곤히 감긴 두 눈을 뜰 생각조차 보이지 않는 무구한 낯을 내려다보며 괴로이 중얼거렸다.
“이토록 급작스레 아르카네가 인세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무엇이지?”
리테라는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형체조차 남지 않고 무너져 사라지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니샤를 제외한 타국에서는 이미 리테라가 어둠의 정령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커다란 혼돈에 휩싸였다고 한다.
하지만, 메카일라 의장이 이디스에게 내린 사명으로 인해 확실한 움직임조차 취할 수 없으니…….
으득, 이를 악물다 못해 부서질 정도로 억세게 턱을 다물던 리아트는 불현듯 떠오른 존재를 상기하며 놀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놈들이 있었군.”
아무리 전능한 아르카네라 한들, 수십 년 전 대정령사들로 인해 금제에 얽매인 그가 소환자도 없이 그토록 무수한 어둠의 정령들을 이끌고 리테라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조력자가 존재할 터였다.
“설마……. 아자르!”
리아트는 순식간에 낯빛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부르셨습니까, 국왕 전하.”
곧바로 나타나 가슴에 손을 올려 묵례하는 수하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던 리아트는 곧 날 선 목소리로 뇌까렸다.
“아이나르 왕부에서 이상한 낌새가 보고된 것은 없나?”
“전하께서는 모든 보고를 확인하셨습니다. 그 외에 새로이 올라온 것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건만…….
“만약 아이나르가 또다시 미친 짓거리를 벌인다면…… 그때는.”
어찌하여 이리도 서늘한 불안이 몰려드는 것일까.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아이나르의 거동을 더욱 긴밀하게 주시하도록 해라.”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리던 리아트는 수하를 향해 당부하듯 명했다.
“군주의 명을 받드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