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92)화 (93/141)

<92화>

* * *

가장 순수한 눈을 녹여 내어 비단실로 자아낸다면 이토록 고울까.

너른 침실에 홀로 남은 소년은 고된 여정을 함께했던 행장을 거두는 중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새하얀 은빛의 머리칼에 잠시간 시선을 두었다.

“후…….”

곧 피로가 깃든 두 눈을 내리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낯빛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냉엄한 기색이 드리우고 있었다.

궂은일 한 번 하지 않은 여인의 것처럼 고운 손이 허공에 올라 멈추었고.

“시데라티오.”

나직한 속삭임이 고요한 허공으로 읊어진 순간.

카아아앙-

눈부신 푸른 빛이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나타나, 소년의 새하얀 머리칼과 옷자락이 허공에 비산하듯 휘날렸다.

차르륵-

그리하여 수백 개의 눈이 박힌 채 어지러이 굴러가는 궤적 속 살아 움직이는 지혜의 상징이 현현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아.”

그 상징 아래, 우주를 그대로 녹여 낸 듯 찬연히 빛을 발하는 지혜의 서를 내려다보며 소년이 나직이 읊조렸다.

“제 것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수천 년을 굶주린 듯 갈급하고도 포악스럽게 행동하지.”

[*아르카네, 금제를 강제로 파훼하여 세상에 나아갔으므로 본체의 절반에 달하는 권능이 제한된 상태.

*오리에드는 프린셔의 행방을 뒤쫓고 있으며, 나이아드 또한…….

*바람의 대정령사와 칸델의 마지막 혈족은 그들에게 닥친 재앙을-]

경이롭고도 신성한 기록을 읽어 내리는 소년의 은회색 눈동자는 지극히 차분하고도 이성적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리되었어야만 했던 이야기가 드디어 맞물리기 시작해.”

우주의 모든 비밀이 아로새겨진 권능의 산물.

그로부터 눈을 떼어, 검은 밤하늘이 펼쳐진 창가를 응시하며.

“아이야, 이제 그만 현실을 마주하여라.”

소년의 형상 속에 자리한 무언가는 조용히 읊조렸다.

* * *

검은 암흑만이 펼쳐진 시야.

어째서 이토록 망망대해 같은 어둠을 바라보게 된 걸까.

비로소 이상함을 느낀 그 순간.

“……헉!”

나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두 눈을 떠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여긴…… 어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몸을 일으켜 침상 밖으로 발을 디뎠다.

울다 지쳐 리아트의 품에 기대어 잠이 들어 버렸던 것은 어렴풋하게 기억나는데, 이곳은…….

“니샤의…… 왕궁인가?”

이 너른 침실에서 속속들이 보이는 이국적인 양식을 둘러본 뒤 나는 일행이 별 탈 없이 니샤의 왕궁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은 말끔히 씻겨진 상태였으며 옷은……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의복은 처음 입어 보는데…….”

이제는 까마득한 전생에서나 얼핏 보았던, 그래.

마치 오스만 제국의 여성 복식과 비슷한 양식의 옷이었다.

“아니지.”

나는 겹겹이 늘어뜨려진 색색의 옷자락을 신기하게 매만지다, 정신을 붙들고 손을 거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옷 따위가 아닌데 무슨 생각에 정신이 팔린 거야.

나는 뺨을 착착 내리치며 메카일라, 그리고 마인하르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다시금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려 우울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던 찰나.

무심코 돌아본 창가 너머로 비쳐 오는 하늘에.

“세상에…….”

나는 멍하니 탄성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문헌으로만 읽었던 니샤의 ‘검은 낮.’

이걸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빼곡히 조형된 건물 틈새로 태양의 빛이 내리쬐는 것이 보였으나, 하늘은 마치 한밤중처럼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밤과 낮의 경계가 흐려져 뒤섞인다면 이와 같을까?

똑똑-

잠시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응시하던 나는 곧이어 방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듯, 문이 열리고 들어선 젊은 여인은 시녀로 보이는 이였는데.

“아…… 세상에!”

역시 이국적인 복식을 취한 여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 한동안 입을 벌리며 놀란 반응을 내비치다, 기쁨 어린 미소를 낯빛에 떠올리며 외쳤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어서 국왕 전하를 모셔 오겠습니다!”

“어…….”

그녀는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나는 한 손을 허공에 뻗은 채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우당탕탕-

얼마 후, 무언가 다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가로 낯익은 남자가 등장했다.

“……리아트 님?”

숨을 옅게 몰아쉬며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사내의 정체는, 당연히도 리아트였다.

내가 그를 향해 말을 건 순간 퍼뜩 현실로 되돌아온 듯.

그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몸을 굽혀 나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몸은, 괜찮아?”

리아트가 나의 양쪽 어깨를 붙들어 쥐며 무서우리만치 집요하게 물었다.

“불편한 곳은 없어? 대체 무엇 때문에 깨어나지 못했던 거지? 이상이 있는 건…….”

“아뇨, 아주 멀쩡해요. 염려하실 필요는 없어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런데, 리아트 님. 제가 니샤로 온 후로 시일이 얼마나 흐른 건가요?”

제일 중요한 물음을 건네자 여전히 정신이 내 몸 상태에 쏠려 있는 리아트가 대수롭잖은 어투로 대꾸했다.

“대략 이틀 정도 지났다. 계속 흐느껴 울다 지쳐 잠든 네가 깨어나지 않아,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알아?”

네?

“……이틀이요?!”

세상에, 한시가 급한데 그 아까운 시간을 쳐 자느라 낭비하다니!

나는 경악에 잠겨 입을 벙긋거렸다.

마인하르트는, 메카일라 님은 무사하시겠지?

그래야 하는데……!

“어서 이드리스 영식을 불러 주세요. 메카일라 님이 그를 향해 지혜의 대정령사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라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 거예요!”

온몸에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리아트의 옷자락을 붙들고 다급히 말을 쏟아 냈다.

“지금 왔습니다. 대공녀님.”

그때, 문가에서 두어 번 노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그 특유의 청아한 미성이 낭랑히 읊조렸다.

나와 리아트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드리스는 살짝 어색함이 감도는 미소를 그리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 * *

리아트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상세히 알고 싶은 듯한 기색이었으나, 예상 밖으로.

“……세부적인 사안을 내가 알 필요는 없겠지. 나가 있을게.”

어딘지 복잡한 기색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뒤 침실을 나섰다.

“……스승님께 받으신 사명을 기억하시는지요.”

단둘이 남은 공간.

이드리스가 말의 운을 띄웠다.

‘우리는 분명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아르카네를 금제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아르카네는 금제가 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립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다시 세상을 향해 기어 나오려 하고 있어.’

‘이제 다시 한번 세상이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노쇠하였고, 이 모든 일을 그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어.’

‘지혜의 정령왕, 로어.’

“……우선, 이것부터 묻고 싶어요. 정신을 과거로 이동시킨다는 그 ‘지혜의 권능’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가요?”

아직도 생생한 그녀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이드리스는 지혜의 대정령사다. 그러니 ‘그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게야. 이디스, 그 후 너는 이드리스의 도움을 받아 과거로 가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네가 해야 할 일은 파괴되어 버린 유물들을 찾는 것이다. 비록 어둠의 정령왕에 의해 제 소명을 다하지 못하도록 망가졌으나 그 잔해를 찾아만 낸다면…… 정령왕의 근원을 품은 우리들, 대정령사가 고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그런 불확실한 희망에라도 기대야 할 상황이야.’

‘지혜의 권능은 육신을 과거로 이동시킬 수는 없으니 정신으로나마 과거로 돌아가 유물의 잔해들을 찾아내 너만이 아는 장소에 안전히 숨겨 두거라.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그 유물을 가지고 다시 이 리테라로 오는 것이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심정으로 물었다.

“…….”

안경을 벗은 이드리스는 깊이 침잠하여 처음 마주했던 때와 동일한 소년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빛나는 회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진정한 지혜란 과거와 미래, 현재를 모두 아우르는 정신이며…… 이는 시간을 초월하는 유일무이한 가치라고 하지요.”

“……?”

갑자기 뜻 모를 문장을 읊조리는 그의 행동에 의문을 품던 것도 잠시.

이드리스는 그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옅게나마 머금고 말했다.

“지혜의 정령왕께서 제게 주셨던 가르침입니다.”

“……그러고 보니, 영식은 지혜의 대정령사라 하셨죠.”

나는 조용히 물었다.

“어째서 그 사실을 숨기고 계셨던 건가요?”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속성을 물었을 때,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제 속성에 관해서는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답을 피했던 그의 반응을.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적이 많으십니다. 가장 앞장서 어둠의 정령왕과 대적하는 분이시니까요.”

“그럼…….”

“괜히 위험에 엮일 수 있으니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제 속성을 철저히 숨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 같군요.”

티 없이 순결한 미소를 그린 이드리스가 내뱉은 말에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지혜의 정령왕은 진정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사설이 길어졌군요.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대공녀께서 깨어나지 않으셨던 이틀간 지혜의 정령왕께서 제게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이드리스는 두 눈을 내리깔며 차분히 읊조렸다.

“……네? 직접 마주한 건가요? 그럼 저도……!”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말했으나.

“현현하시어 마주한 것이 아니라 뇌리에서 음성으로 내려 주시는 전언입니다.”

이드리스는 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옅게 웃고 말했다.

“대정령사들은 정령왕과 근원을 공유하므로 소환하지 않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아…….”

실망에 사로잡힌 나는 로어를, 그 귀하디귀한 모습을 직접 보겠다는 마음을 삼키고 작게 탄식했다.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당신을 현재로부터 백여 년 전의 과거.”

이드리스가 낯빛을 굳히며 이야기했다.

“망국을 맞이한 직후의 하카드엘라 공국으로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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