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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93)화 (94/141)

<93화>

“……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속삭였다.

“하카드엘라라면…….”

외할머니의 모국.

나의 조상들이 다스리던, 물의 정령왕이 사랑한 나라.

“어째서……?”

나는 망연히 중얼거리며 이드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곳으로 나를 보내라 한 거지?

악의를 품고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냉혹한 처사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시기가 가장 적합한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나를 향해 이드리스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덧붙여 말했다.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시고 일을 계획하시니…… 그분의 뜻을 따르시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겁니다.”

“……현명한, 선택이라고요.”

지금 나를 지배하는 이 감정의 이름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그 현명한 선택을 따르기 위해 내 어머니 마리에트는 세상의 비난과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나는, 외할머니의 모국이 무참히 멸망한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해야 한단 말인가?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마리에트는 너무도 가혹한 사명을 부여받았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정신만 이동시킬 수 있다고 했었죠. 권능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 정신을 이동시킨다는 게 정확히 어떤 방법인지 설명해 주세요.”

나는 밀려드는 고뇌를 애써 물리치고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과거의 인물에게 빙의한다고 해야 할까요. 대공녀께선 과거의 인물로 녹아들어 모든 사명을 이행하게 되실 겁니다.”

“……정확히, 누구에게요?”

비참히 몰락한 망국의 풍경을 오래도록 보아야 할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한계의 한계까지 내몰린 내가 바라는 소원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로 가신 후에는 빙의한 인물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실 터이나,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니 지금부터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결국 또 말할 수 없다, 인가.

나는 체념하고 이드리스에게서 흘러나올 말을 기다렸다.

“하카드엘라 공국을 멸망으로 이끈 나라는 현재의 니샤 왕국입니다.”

“……뭐, 라고요?”

그러나 또다시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나는 충격에 잠겨 되물었다.

메카일라가 지나가듯 흘렸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숲의 왕국 드라이어스는 재앙의 개시가 일어나기 수십여 년 전부터 물의 공국과 함께…… 니샤 왕국의 압박에 거의 멸망 직전에 처한 상태였어.’

그러나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기에 애써 무시하고 리테라를 벗어났다.

“니샤가, ……제 외할머니의 모국을 멸망시켰다니요?”

순간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어둠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들을 학대했던 황제에게 분노했던 과거도.

에시메드가 저지른 죄를 감싸며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과거도.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하는 니샤의 국왕인 리아트를 향해 적의를 품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은연중에 연민하며 정을 주었던 나의 과거도…….

“대공녀님, 우선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나요? 어떻게!”

그러자 이때껏 어둠의 정령사를 은연중에 동정했던 나의 과거가 모순적이게도,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나 자신을 향한 분노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외할머니의 고국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니샤 왕국으로 인해 멸망했는데…….

나는, 어떻게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을까.

아무리 어떠한 기록도 남지 않았다 해도, 노력했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과거는 과거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지금의 국왕은…….”

울분을 토해 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나를 향해 다급히 말을 잇던 이드리스는, 순간 말을 멈추고.

“……이디스 대공녀님.”

나의 어깨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수많은 진실이 뒤엉켜 일렁이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드리기는 어려울 듯싶군요. 지금 당장 권능을 사용할 테니, 부디…… 무탈히 다녀오시길 소원하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숨결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입을 열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정령의 언어를 읊조렸고.

화아아악-!

그 순간, 나의 발밑 아래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 만큼 순결한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지혜의 신전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문양이 빛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사위를 휘감았다.

“……!”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리다.

결국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길.

험하게 깎아지른 산비탈을 위태로이 오르던 여인이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거렸다.

바다처럼 짙푸른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시야 아래로 힘없이 흘러내리고.

가냘픈 몸피에 유달리 창백한 낯빛은 한눈에 연약함을 자아냈으나, 그 중심부에서 형형히 번뜩이는 은빛 눈동자에 꺾이지 않는 의지와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명예로운 하카드엘라의 마지막 공녀시여.’

여인은 숨을 헐떡이며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소신은 공녀의 모친이신 하카드엘라 공 전하를 섬기던 신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숨을 거두셨으니 관례대로라면 당신께서 작위를 계승하셔야 하지요.’

‘……나라는 망국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이 없고, 모든 권한과 명예는 저들의 손에 빼앗겼는데.’

냉기가 스며든 창살을 붙들고 힘겹게 몸을 지탱한 그녀가 조용히 답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명분이 무어가 중요하겠습니까.’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의미 없지 않습니다. 돌아가신 공 전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수십 년간 안팎에서 악독한 저의를 품고 나라를 좀먹어 가던 니샤 왕국은 결국 한 달 전 병력을 동원해 하카드엘라 공국을 침공했다.

이성으로 일군 문명과 평화를 숭상하며, 그 어떤 나라와도 피 흘리는 전쟁을 해 본 적 없던 역사와 맞물려 이미 쇠락해 가던 하카드엘라 공국은 건국 이후부터 전쟁과 약탈을 일삼아 왔던 잔인하고 교활한 이민족의 계략 아래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당대의 하카드엘라 공이었던 모친은 식솔과 측근을 데리고 국외로 도주하는 대신 최후의 전장에 나서 명예롭지만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카드엘라의 첫 번째 공녀이자 공국의 후계자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마지막 유지를 간신히 완수한 뒤 곧바로 니샤의 군사들에게 억류되어 포로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하카드엘라 공국의 시조가 나이아드에게서 받은 보물, 정령왕의 관.

처음부터 니샤가 노리던 것은 하카드엘라 공국에 전해져 내려오던 정령왕의 유물이었다.

그것을 빼앗아 무참히 망가뜨리기 위해 한 나라를 짓밟은 것이었다.

물의 유물이 있는 위치를 말하라며 여인을 심문하던 니샤의 군사들은 그녀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자 점점 협박의 수위를 높여 갔다.

‘……그들이 가한 고문으로 인해 나는 하위 정령조차 소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포기하지 않으셨다 한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몸에 강제로 심은 마나의 흐름을 억제하는 아티팩트로 인해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쳐 무언가에 의지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정령 소환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격통이 몰려와 고통을 삭이기 위해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이토록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떤, 결연한 의지일지언정……. 서서히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괴로움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절망에 물든 눈빛으로 창살 앞에 꿇어앉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물의 유물만은 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멀리 떠나보냈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재상, 저들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옥으로 돌아가세요.’

그녀의 앞에 피투성이의 참혹한 몰골로 꿇어앉은 사내는 망국의 재상이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파도치고, 절망의 세기가 점점 짙어졌다.

그녀는 두 눈을 내리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그것을 아십니까? 비록 제가 충성을 맹세했던 주군은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러나 하카드엘라 공국, 아마도 최후의 재상일 터인 니할라는 결연함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도망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카드엘라의 명맥은 아직 끊기지 않았습니다.’

‘…….’

그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둘째 공녀께선 무사히 살아남아 도망치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공녀께선 비록 저들의 손에 억류되어 고초를 겪으셨음에도…… 이렇게, 제 눈앞에 살아 계시지요.’

말을 잇던 도중 감정이 북받친 듯 붉어진 눈가를 한 재상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하카드엘라의 기사들에게 사력을 다해 할 수 있는 가장 오랫동안 소란을 일으키라 뜻을 전해 놓았습니다. 니샤의 군사들은 한동안 이곳으로 오지 못할 테니, 어서 옥을 나와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그리고 재상은 핏물이 고인 바닥에 작은 쇳덩이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갇힌 옥의 열쇠였다.

‘……그럼, 재상은요.’

그녀는 일렁이는 마음을 간신히 눌러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이곳에 남아 시간을 끌어야지요.’

‘…….’

‘공녀님, 망설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제가 돌아가신 공 전하께 바칠 수 있는 마지막 충정입니다.’

잔악한 이민족의 발아래 치욕스레 짓밟힌 망국의 재상은 감옥의 문 앞에 선 망국의 공녀를 향해 두 무릎을 꿇고 앉아, 피투성이의 참혹한 몰골임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신념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마지막으로 간언했다.

‘부디 무사히 도망치셔서 둘째 공녀님과 함께 하카드엘라의 완전한 멸망을 막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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