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자, 잠시만!”
황망한 나머지, 다급히 막는다고 그의 손을 덥석 쥐었다가.
“아……!”
당연한 수순으로 몰려든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나는 황급히 두 손을 떼고 신음을 흘렸다.
살갗 위로 붉은 선혈이 가늘게 흘러내렸다.
미쳤나 봐, 저 손이 가시로 뒤덮인 걸 두 눈으로 보고서도 무턱대고 잡아 버리다니.
한편 내 생명을 거둬 가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던 정령은 뜻밖에도.
[…….]
내 행동에 매우 당황하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 손을 뻗은 채로 굳어 있다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아니, 아니야. 지금 손에서 흐르는 피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다급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외쳤다.
“지금…… 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하카드엘라, 라니요?”
[……너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건가?]
정령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로제 하카드엘라. 너의 이름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하카드엘라가, 물의 공국의 이름이자 대대로 공국을 다스려 온 가문을 뜻하는 게 맞는 건가요?”
몰려드는 황망함과 답답함에 외치듯 묻자 정령은 두 눈을 깜박이며 순순히 답했다.
[그래, 너는 나이아드가 축복한 정령사의 후손이다.]
“하…….”
이제야, 비로소 모든 단서가 맞춰지는 것 같았다.
지혜의 정령왕이라는 작자가 어째서 하카드엘라 공국이 멸망한 시점으로 나를 인도하였는지.
왜 하필 죽은 이의 육신에 내 영혼을 집어넣었던 건지…….
“그럼 이 로제 하카드엘라라는 사람은…….”
내 조상이었다.
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망연히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미친 것 같아.
“아무리 사명이 중요하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해……?”
기가 막히다 못해 두려움까지 치밀어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막 숨이 떠난 조상의 육신에 내 영혼을 집어넣다니.
지혜의 정령왕, 로어라는 작자는 아르카네와는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돌은 이가 분명했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유도해서 기어코 나를 이 몸에 집어넣었겠지!
[……보면 볼수록 이상하군.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
내가 충격에 잠겨 한동안 헛웃음만을 터뜨리자, 경악스러운 진실을 알려 준 정령은 세상 살다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뉘앙스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더 이상 시간을 줄 수는 없다.]
“잠시만, 안 돼요!”
그리고 또다시 내 영혼인지 생명인지를 거둬 가려는 듯 손을 뻗는 그의 행동에 나는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정령은 또 뭐, 라는 뜻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제 행동을 멈추었다.
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거냐고!
“……저, 저는 이 육신의 본래 주인이 아니에요!”
나는 속마음으로 제정신 아닌 일을 벌인 지혜의 정령왕을 향한 욕설을 쏟아부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뭐?]
그러자 정령은 이번엔 한층 더 인상을 찡그리며 무슨 개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어왔다.
……젠장, 부디 이 정령이 외관보다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녔기를 간절히 바라며.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지금 시점보다 먼 미래에서 온 영혼입니다. 지혜의 정령왕의 권능을 빌어 이 여인의 육신에 들어선 것이므로, 당신이 말하는 생명을 거두어 가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
침묵이 흘렀다.
필사적인 나머지 지혜의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까지 말해 버렸는데, 모르겠다.
부디 이 정령한테 설득이 먹히기를……!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
그러나, 불현듯 돌아온 답에 나는 멍청히 되물었다.
정령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읊조리듯 말했다.
[네가 그 몸의 본래 영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는 로제 하카드엘라의 생명을 거두어 가려 온 것이고, 너는 그 인간의 몸에 깃든 영혼일 뿐이니까.]
“아니…….”
나는 말문이 막혀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내가 간신히 쥐어 짜낸 말을 진실로 가치 없는 항변이라고 여기는 듯한 그의 태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까부터 정말 궁금했던 사실인데. ……당신은 대체 누구죠? 누구기에 인간의 생명을 거둬 가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건가요?”
그리하여 나는 어쩌면 맨 처음 물었어야 했던 질문을 던졌다.
[……인간들이 칭하기를.]
그는 한 치의 감상도 실리지 않은 차가운 동공에 나를 담으며 말했다.
[가장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세 정령왕을 태고의 정령들이라 한다지.]
“……!”
[나는 태고의 정령 중 하나, 죽음의 정령왕이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 생명의 정령왕 일리피아.
옛 창세 신화에서 그들의 뒤를 이어 태어난 정령왕이라 전해지나 그 진명조차 알 수 없어, 구전으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진 전설적인 존재…….
“당신이…… 죽음의 정령왕이라고요?”
나는 망연히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래.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나?]
당연한 일이었다.
죽음의 정령왕은 기이할 만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없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한눈에 알아본단 말인가?
게다가, 어째서 그 죽음의 정령왕의 모습이……. 에시메드와 이토록이나 닮을 일이지?
[질문은 다 끝났나? 더는 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사실은 내 두 눈앞에 나타난 전설적인 존재도, 그가 내가 아는 인간 소년과 유달리 닮은 외형을 지녔다는 점도 아니었다.
“…….”
이대로 죽음의 정령왕에게 생명을 빼앗기고 죽을 순 없었다.
나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과거로 왔다.
아르카네의 손에 파괴된 정령왕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찾아, 내가 살아가던 미래로 돌아가 리테라를 구해야 한단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태고의 정령이라 불리며 숭배받는 죽음의 정령왕께서, 진실로 죽은 이의 생명이 아닌 산 자의 생명을 마음대로 거둬 가셔도 되는 겁니까?”
나는 굳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감히 네가 판단할 가치가 아니다. 피조물은 하루에도 수없이 태어나고 덧없이 지는 존재.]
죽음의 정령왕은 지독히도 권위적이며, 동시에 짙은 무료함이 서린 어조로 답했다.
[가치 있는 생명의 범주에 들지도 못하는 존재들이야. 한둘쯤 잃거나 바꿔치기 당하더라도 이 세상의 섭리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지.]
“……그렇군요. 정령왕의 말씀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에시메드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어찌 저토록 인간과 생명을 경원시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걸까.
나는 고요히 치미는 분노에 잇새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하찮게 여기는 일개 피조물에 속한 존재일지언정.
“그러나 제가 내뱉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죽음의 정령왕께서 논하는 생명의 가치에 따르자면, 저는 하찮은 일개 피조물의 영혼에 속하나.”
조금 특별한 뒷배를 지녔으므로.
“다름 아닌 지혜의 정령왕께서 친히 이 여인의 몸으로 보낸 자입니다.”
[……지혜의 정령왕이라. 로어를 말하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그를 아는 모양인지 죽음의 정령왕은 에시메드와 소름 끼치리만큼 닮은 푸른 눈을 냉정하게 빛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을 따르기 위해 저는 이 여인의 몸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죽음을 다스리는 정령왕이시라 한들, 지혜의 정령왕의 허락도 없이 저의 생명을 함부로 거둬 가셔도 괜찮은 것인지요?”
[…….]
죽음의 정령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했다.
아무리 태고의 정령이라 한들 동등한 지위의 정령왕이 행한 일을 함부로 어그러뜨리는 것은 그 또한 고민해야 하는 일인 듯했다.
그렇다면.
나는 옅은 미소를 그리고 뒤이어 말했다.
“제가 이 육신에 머물러 있는 한, 어디론가 사라진 이 몸의 본래 영혼은 반드시 그 자신의 육신에 이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때 죽음의 정령왕께서 그 영혼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되는 일입니다.”
비록 내 조상의 영혼이라고는 하나……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진 조상의 영혼을 향해 명복을 빌며 차분히 읊조렸다.
“그러니 저를 감시하시되 제 사명을 막아서진 마십시오. 당신께서는 죽은 자의 생명만 앗아 가시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신기하구나.]
내 말을 경청하던 죽음의 정령왕이 문득 깨달은 듯 말했다.
[로어가 죽은 자의 육신에 다른 영혼을 집어넣은 일도 처음이고, 아무리 한이 맺혔을지언정 감히 나의 앞에서 이토록 분명히 제 주장을 밝히는 인간도 처음이야.]
그가 천천히 몸을 굽혀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기울였다.
짙은 그림자가 나의 위로 드리워졌다.
낯익은 모습에 허물어졌던 본능적인 두려움이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잇새를 악물며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래, 참으로 신기해.]
잔혹하지만 노골적일 만큼 순수한 호기심이 티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르른 안광에 제 존재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