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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96)화 (97/141)

<96화>

더 이상은,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죽음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한계라고 생각하던 때.

[네 말에 동의를 표하지. 유예를 내려 주마, 네가 로어가 내려 준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비로소 내 위로 드리워졌던 거대한 그림자를 거두며 죽음의 정령왕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 감시는 붙이도록 하겠다.]

그가 허공에 가벼이 손을 내젓자, 무참히 깨져 가림막의 역할조차 하지 못하던 창가 바깥에서 새카맣고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죽음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나의 권속이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네게서 눈길을 떼지 않을 것이니 유의하도록.]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은 것처럼 깃털이 살짝 일렁이는 점만 빼면 그저 평범한 새의 모습을 한 까마귀가 사뿐히 날아내려 내 발치를 향해 타박타박 걸어왔다.

[까악-!]

검은 눈동자가 영리하게 반짝이는 정령의 모습을 신기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적, 죽음의 정령왕이 말했다.

[잊지 말거라. 나는 너에게 유예를 주었을 뿐,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음을.]

“……!”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아, 텅 비어 공허하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 말을 남긴 죽음의 정령왕은 일순간 검은 안개로 그 형체를 무너뜨렸다.

검은 안개는 잠시 그 자리를 맴돌다 깨진 창가 너머로 고요히 흘러가 자취를 감추었다.

“……큰일 날 뻔했네.”

까악-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 망연히 중얼거리던 내 곁에서 그가 남기고 떠난 감시꾼 까마귀가 두어 번 소리 내어 울었다.

아직 해야 할 사명은 시작도 못 했는데, 초장부터 이런 경악과 공포와 위기의 연속이라니.

아, 나는 바닥에 널브러지듯 누우며 막막한 앞날을 상기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 * *

장중한 어둠만이 들어찬 성, 화려하나 동시에 참독한 죄악으로 쌓아 올린 드높은 왕좌에 기대어 앉은 이의 발치로 수십여 명의 군사들이 꿇어앉았다.

쨍그랑-

니샤의 국왕, 오르한 아이나르는 노여운 낯으로 한 손에 쥔 술잔을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깟 망국의 공녀 하나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놓쳤단 말이냐?!”

“……군주께 죄를 청하옵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것들. 수십여 년을 공들여 무너뜨린 물의 공국이다. 그동안 우리가 얻은 손실을 상기하면 벌써 물의 유물을 찾아 어둠의 정령왕께 바쳤어야 했단 말이다!”

오르한은 격노로 인해 홧홧해진 안면을 마른손으로 쓸어내리며 거친 숨결을 토해 냈다.

로제 하카드엘라.

공국의 단 둘뿐인 후계자 중 하나이자, 그들이 확보했던 유일한 하카드엘라 가문의 혈족이었다.

하카드엘라의 재상과 그 외의 고위 관료들은 손발은 물론이요, 사지를 다 짓이기고 끔찍한 환각을 보여 주며 협박해도 끝끝내 유물의 위치를 토로하지 않아 결국 참수형에 처했으니.

“그 계집을 찾아야 해……!”

타국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일국의 공녀를 사로잡아, 설사 반쯤 죽여 놓더라도.

반드시 물의 유물의 소재를 알아내어야 했다.

“그것을 바쳐야만 우리의 번영이 다시 수백 년간 이어질 수 있단 말이다……!”

오르한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애타게 중얼거렸다.

군주의 격노 아래 숨죽인 니샤의 군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색을 굳혔다.

“전하, 일카이 왕제께서 드셨습니다.”

그 순간,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왕의 곁에 다가가 고한 말에 오르한이 두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어서 들이도록 해라, 어서!”

그가 물러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훤칠한 체구의 젊은 청년이 너른 보폭으로 왕좌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일카이의 수장이 아이나르의 군주를 배알 하나이다.”

왕을 배알했다.

“왜 이토록 늦었느냐, 칼리드!”

그 왕제.

“하카드엘라 공국을 멸망시킨 일로…….”

칼리드 일카이가 다시 일어서 오르한과 시선을 마주했다.

“로샨 제국에서 이를 강하게 비난하며 타국을 선동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바, 대륙의 정세를 보고한 문건을 확인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나이다.”

담담히 읊조리는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기품이 어려 듣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일으켰다.

니샤의 병사들은 구원자를 마주한 듯 선망과 충심이 깃든 눈빛으로 젊은 왕제를 우러러보았다.

“로샨 제국 따위의 언동은 중요치 않다. 늘 말로만 정의니, 평화니 외칠 뿐 실상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는 위선자에 불과하지 않더냐!”

오르한은 니샤의 젊은 여인들 중 그를 생각하며 상사병에 괴로워하지 않는 이가 없다는 소문이 돌 만큼 수려한 왕제의 낯을 내려다보며 격분을 억누르고 천천히 읊조렸다.

“칼리드. 너 또한 작금 우리가 맞이한 문제를 알고 있겠지.”

니샤의 왕족임을 상징하는 하얗고 공허한 잿빛 눈동자를 내리깔며.

“……예. 하카드엘라의 공녀께서 옥을 탈출하셨다지요.”

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했다.

“존칭 따위 쓰지 마라! 망할 계집년, 순순히 물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위치만 토로해도 내 이리 속을 썩이진 않을 것이다.”

오르한은 분노를 담은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왕좌에 올라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니 명분이 필요하다. 칼리드, 너는 우리 아이나르의 형제인 일카이 왕가의 수장이자, 그간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타국에도 너의 위명과 인망은 자자히 알려져 있지.”

오르한이 탁하게 물든 회안을 번뜩이며 씹어뱉듯 말했다.

“루이사를 그 계집의 몸에 삽입했다. 신체에 흐르는 마나를 강제로 틀어막아 시도 때도 없이 격통이 밀려들고, 생명이 서서히 갉아 먹혀 끝내는 죽음에 이르지. 그 몸 상태로는 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거야.”

“군주께서 제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안누시카의 예언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하카드엘라 공국령으로 가도록 해라. 아직 니샤 왕국의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니, 네 재량껏 사용하도록 하고. 또한…….”

오직 자신들의 풍요와 번영을 위해서.

“로제 하카드엘라를 산 채로 포획해라.”

아이나르의 후손은 잔혹함으로 벼린 칼날을 품고 명했다.

“물의 유물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반드시 토해 내게 만들어. 그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일카이의 왕제로서.”

순간, 칼리드는 그 낯 위에 드러났던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금 무릎을 꿇으며.

“군주의 명을 받드나이다.”

복종을 표했다.

그리하여 바독범과 같이 집요하리만치 잔인한 어둠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온전히 쏠리게 되었다.

* * *

너무 피곤한 나머지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선잠은 어지러운 기억을 비춰 드러내었는데, 아무래도 나의 기억은 아니었으니.

이 육신의 주인. 로제 하카드엘라가 품은 기억인 듯했다.

내려앉은 공기는 폐가 에일 듯 차갑고도 날카로웠고.

푸르고 하얀 천정, 깊은 바닷속에 잠긴 듯 고요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정경을 품은 이곳은…… 하카드엘라의 공작이 머무는 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선 물의 유물을 지니고 도망치라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도망쳐 버린다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가 없어. 또한 함께 떠났다가 저들에게 붙잡힌다면 아무런 희망이 남지 않는 상황이야.’

냉정하고 이성적인 목소리가 담담히, 그와 동시에 결연한 의지를 품고 말했다.

‘언니, 제발 그만해!’

내 눈앞에 뒤돌아선 채 몸을 파르르 떨던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홱 돌아서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어떻게 언니를 두고 나만 도망칠 수 있겠어? 언니가 그 흉악한 니샤 놈들에게 붙잡혀서 무슨 고초를 겪을 줄 알고!’

구불거리는 연한 갈색 머리카락, 말간 은빛 눈동자.

유순하고 사랑스러운 외양을 지닌 앳된 소녀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럽게 말했다.

‘언니…… 같이 도망치자. 나는 언니를 두고는 못 가, 절대!’

아무래도 이 소녀는, 이 육신의 주인이자 나의 조상인 로제 하카드엘라의 동생인 듯했다.

‘…….’

로제는 자매로 추측되는 소녀의 간청에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은 마치 갈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때는 끝났어.’

그러나, 곧 그 냉담하면서도 고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마리에 하카드엘라.’

로제가 제 동생의 이름을 읊조렸다.

마리에, 하카드엘라.

‘네 신분과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사명을 기억하렴.’

‘흐윽…… 싫어, 나는 싫단 말이야…….’

‘……그만 울고 정신 차려!’

그 순간, 사력을 다해 유지하던 평정이 깨진 것처럼.

로제가 격분한 외침을 내지르며 제 동생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무구한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마리에가 로제를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 찬연하게 빛나는 은빛 눈동자 속에 비친 형상은 푸른 머리칼과, 자매와 같은 은빛 눈동자를 지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 뒤에 소름이 일 정도로 냉엄한 아름다움을 드리운 소녀가 그 낯을 아프게 일그러뜨린 채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어, 언니…….’

‘하카드엘라의 피를 이은 것은 특권임과 동시에 막중한 사명을 짊어지는 것과 다름없어. 지금껏 평범한 백성이라면 감히 누리지 못할 호화로움 속에서 살아왔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하지.’

로제는 마리에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며 드높은 천정까지 맞닿을 만큼 거대한 문 위로 손을 짚었다.

‘정령왕이 인세에 개입하는 것은 고대 이후로 철저히 금지된 영역……. 하니 우리의 희망은 나이아드께서 하사하신 물의 유물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뿐이야.’

‘언니…….’

‘울지 마렴. 어머니도, 나도. 이제 더는…… 너를 곁에서 지켜 줄 수 없으니까.’

마리에는 로제의 말을 마침내 이해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굵은 눈물방울만 뚝뚝 흘려보냈다.

그 순간, 마치 내가 그 상황 속의 로제 하카드엘라가 된 듯 심장을 날카로운 비수로 관통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덜덜 떨려 오는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주어 평정을 가장했다.

아, 애써 의연하게 이야기하고, 동생을 다그쳤으나 그렇게 행동하는 그녀 자신의 마음도 넝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로제는 더 이상 숨죽이고 흐느끼는 동생을 바라보기가 힘겨운 듯 애써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레제크 오라버니께서 기다리고 계셔. 물의 유물을 가지고, 우리의 오랜 동맹국인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떠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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