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드라이어스 왕국.
“그곳은…… 숲의 정령왕을 숭배하던 나라였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떠 현실로 돌아왔다.
육신의 감정에 동화되기라도 하는 걸까.
그리 중얼거리던 눈가 아래로 어느새 고여 있던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마리에에게 물의 유물을 맡겼구나.”
그 이름을 들은 순간 떠오르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어머니, 마리에트였다.
……조상의 이름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기라도 했던 걸까.
“중요한 건…….”
로샨 제국의 황실 깊이 숨겨져 먼 훗날 내가 살아갈 때까지 보존된 불의 유물을 제외하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물의 유물과.
아직 멸망하지 않은 드라이어스 왕국의…….
“숲의 유물, 필생의 근원.”
나는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눈가에 얼룩진 물기를 거칠게 닦아 냈다.
로제의 동생, 마리에 하카드엘라는 물의 유물을 지니고 ‘레제크 오라버니’라는 자와 함께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니 드라이어스 왕국에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정령왕의 유물이 두 개나 존재하는 것이다.
“우선은 멀쩡한 유물부터 찾아 확보하는 게 낫겠지.”
나는 기운을 차리고 버려진 성의 홀에서 우뚝 일어섰다.
[까아아악-]
“……아직, 있었구나.”
내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푸드덕 날갯짓하며 날아와 크게 울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데, 웬 까마귀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
남아 있던 깊은 슬픔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거짓말처럼 싹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까마귀를 어깨에 앉히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둥, 둥.
일정한 박자를 띄고 울리는 음산한 북소리, 어둑어둑한 방 안을 곳곳에서 밝히는 촛불.
금빛의 향로에선 쉼 없이 흐릿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시조를 칭하여 영원히 꿈꾸는 안누시카라 하였던가.
칼리드는 하얀 가리개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성소’의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일카이의 후손이 안누시카의 무녀에게 예언을 청하고자 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잠잠히 울려 퍼진 순간, 방의 한가운데에서 무언가에 혼을 빼앗긴 듯 빙그르르, 돌며 춤추던 이가.
우뚝,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를 덮어 발치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장막과도 같은 베일.
장식이라고는 오직 이마 부근에 새겨진 금빛의 뱀 자수뿐인 사각형의 모자를 눌러쓰고, 색색의 화려한 깃털이 달려 눈이 아플 만큼 풍성한 치맛자락이 흩날리듯 허공에 떠오르며.
여러 갈래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혼탁하여 초점이 사라진 회색 눈동자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 돌아서 칼리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귓가에서 버거울 만큼 무거운 보석과 깃털이 주렁주렁 달린 귀걸이가 촛불에 표면이 반사되어 어지러이 빛났다.
그를 응시한다는 것은 그가 올린 청을 허락한다는 증명.
칼리드는 ‘무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침착히 말했다.
“로제 하카드엘라의 행방을 찾으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북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촛불이 위태로이 흔들리며 방 안에 그림자를 키워 갔고.
무녀는 초점이 텅 빈 눈으로 어둠이 일렁이는 허공을 응시하며.
“죽음, 선착장, 백의 사자……. 위대한, 찬탈.”
두서가 없는 단어와 문장을 내뱉고는, 고개를 꺾어 천장을 두 눈에 담은 채.
“드라이어스…….”
흩어질 듯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리드의 회안에 파문이 일던 순간, 무녀는 몸을 경련하듯 떨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미동 한 점 없이 떨구어진 얼굴은 모든 예언이 끝났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칼리드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깊이 묵례한 뒤 일어섰다.
성소를 나서자, 그를 기다리던 부관이 다가와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며 물었다.
“전하, 예언은 받아 보셨습니까?”
칼리드는 호흡부를 가리던 가리개를 풀어 손에 쥔 채 느지막이 답했다.
“네 단어는 기묘했다. 죽음과 선착장, 백의 사자…… 그리고, 위대한 찬탈이라니.”
그러나 무녀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단어는 명확한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드라이어스라고 말씀하시더군.”
“드라이어스라면…… 안 그래도 마리에 하카드엘라 공녀가 도망친 소재지로 유력한 나라가 아닙니까.”
“그래, 이르마크. 우리는 우리의 직감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짙은 향내가 배어 손아귀에 쥐어진 채 힘없이 늘어진 천을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누군가를 착취하여 얻어 내는…… 예언이 아니라.”
그가 떠난 길목엔 쓸쓸한 그림자와 짙은 향만이 남아 깊이 감돌았다.
8. 신월의 왕제
로제 하카드엘라는 니샤의 억압 끝에 결국 군주를 잃고 멸망한 물의 공국의 후계자였다.
또한, 그녀는 알지 못할 연유로 인해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으윽…….”
하카드엘라의 후손인 그녀는 분명 물의 정령왕이나 그에 속하는 정령의 축복을 받았을 테니.
나이아드를 불러 도움을 청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시도했던 첫 소환에서 차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 뒤.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로제의 정확한 속성을 알아내기 위해, 또한 어떻게든 정령 소환에 한 번이라도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정령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닉스…… 커헉!’
고작 물의 하위 정령을 소환하려던 순간에도 어김없이 찾아든 격통에 한참을 앓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더 하다간 진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여기서 죽는 수가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대체 몸 상태가 왜 이런 거지…….”
나는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롯이 내 힘으로 드라이어스 왕국을 향한 여정을 이어 가고 있었다.
아, 또다시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
나는 짐마차의 난간을 꼭 붙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본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했던 육신이라 이런 걸까.
그래서 정령 소환도 불가능하고, 정령의 권능을 끌어와 사용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굳이 정령의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이런…… 격통에 시달릴 필요는 없잖아.”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만 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암담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 불쑥불쑥 솟구쳐 올랐다.
나는 밀려드는 깊은 우울감에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까악, 까아악-!]
“시끄러워…… 너는 제발 조용히 좀 해.”
내가 기운 없이 축 처질 때면 귀신같이 그를 알아채고 시끄럽게 울어대며 고개를 기웃거리는 까마귀를 원망스레 쳐다보며 손으로 살짝 밀었다.
죽음의 정령왕이란 자는 섬뜩하고도 고요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권속은 도대체 왜 이런 건지.
“그럼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꼴도 전부 보았겠구나, 그 정령왕.”
이젠 어떤 감정을 느낄 기력조차 없었다.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 모습을 보고 어떤 감상을 느꼈을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괜히 에시메드를 닮아서 자꾸 생각난단 말이야.
“아.”
그 순간, 나는 스스로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무릎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런 하잘것없는 순간에 결국 생각하고 말았다.
에시메드, 너는 과연 무사할까.
그리고…….
‘당신이 무사하시다면 저 또한 사는 것이고, 당신이 죽음을 맞이하신다면 저 또한 영원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엔 제가 약조를 청하겠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당신을 기다릴 테니, 당신 또한 무사히 돌아와 주십시오.’
찌를 듯이 높은 첨탑에 위태로이 선 채 홀로 어둠을 밝히던 그 사람.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나를 향해 지어 보였던 미소와, 서러울 만큼 올곧고 다정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메아리쳐서.
“그만하자, 그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떠오르는 상을 먹칠해 버렸다.
“그리셸 선착장입니다, 내리실 분은 내리십시오!”
버려진 성을 떠나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떠나겠다는 목표를 세운 직후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였던 나는 우선 로제가 지닌 물건을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도 걸치고 있던 회색의 무거운 로브를 벗어 바닥에 펼치자.
‘세상에…….’
묵직한 주머니 속, 가득 채워진 금화를 발견하고 나는 멍하니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살던 시대와 과거의 물가 차이를 알지는 못 하지만 눈대중으로 보아도 여비는 충분하다 못해 넉넉한 수준이었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돈이라도 충분해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후 다른 소지품을 들어 올렸다.
물에 젖었던 모양인지 엉망으로 구겨진 종잇조각을 펼쳐 들자, 시야에 들어찬 것은 하카드엘라 공국과 그 주위의 나라가 담긴 지도였다.
드라이어스 왕국은 하카드엘라 공국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양국 간의 사이에는 아힐란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강이 가로지르고 있을 뿐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셸 선착장…… 이곳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바로 드라이어스 왕국이구나.’
이 선착장으로만 가면 다 해결되겠다.
로제가 지녔던 소지품은 그게 전부였다.
‘정령을 소환하는 게 낫겠지?’
그리고 나는 정령 소환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위에 설명한 대로 무참한 실패.
그 때문에 시간만 소모하고 아무런 성과는 얻지도 못한 채.
‘으으으으…….’
오직 몸 하나로 간신히 내려온 절벽 아래의 풍경은.
‘맞다, 하카드엘라 공국은 전쟁에서 패한 상태였지…….’
몸이 죽도록 고되어 잠시 잊고 있었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곳의 끔찍한 참상을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뒤늦게 잠기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길이 좀 어질러졌네요.’
‘어이, 로한! 여기 와서 이 쓰러진 나무 좀 같이 치워보세.’
군대가 지나간 길목인 듯 곳곳에 커다란 나무가 꺾여 쓰러져 있으며, 민가가 조금 파손된 것을 빼고는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