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뭐야?’
나는 얼이 빠진 채, 각자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여 백성들이 하카드엘라의 공녀를 알아볼 위험이 존재하니 로브의 후드를 머리에 푹 눌러쓴 뒤 사위를 돌아보며, 정말로 이곳이 얼마 전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나라의 모습이 맞는지 의문을 품었으나.
‘……평화로워.’
결론은 달라진 게 없었다.
묘한 기분에 잠긴 나는 나라가 망하든 상관치 않고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카드엘라 공은 죽음을 맞이하고.
공녀들은 사지를 넘나들며 니샤 왕국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한데 백성들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여, 그에 이질감이 듦과 함께…….
‘이상해. 이럴 수는…… 없어.’
역사상 전쟁에서 패한 어떤 나라도 백성들이 평온한 삶을 영위했다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토록 평화롭고도 일상적인 풍경이, 그 뒤에 존재하는 끔찍한 진상을 덮어 가리는 것 같다는…… 기묘한 감상을 지워 낼 수 없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아니니.’
나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을 애써 등지고 그리셸 선착장을 향해 여정을 떠났다.
내게 역사에 관여할 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사명은 오직 정령왕의 유물을 모아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는 것일 뿐이었으므로.
그리하여, 바로 현재에 다다랐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애초에 로제가 하카드엘라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기에 그동안은 별다른 검문도, 추적도 당하지 않고 나름대로 평탄히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목, 그리셸 선착장이다.
니샤 왕국에서도 로제가 이곳을 통해 도망칠 가능성을 염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는 긴장으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으며 짐마차에서 내려섰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황금빛 갈대밭과 짙푸르게 흐르는 강물.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네.”
[까악-!]
흐리게 미소 지으며 속삭인 말에 까마귀가 동의라도 하듯 고개를 젖히며 작게 울었다.
나는 자갈돌이 깔린 길을 밟으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 * *
금화 두 잎을 건네자 되돌아온 은화 스무 잎을 꼼꼼히 챙기고 환전소를 나섰다.
선착장에 정박한 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백성들이 기이할 만큼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한들 시국이 시국이었으니…….
나는 가장 크고 단단해 보이는 배의 앞에 지친 듯 앉아 있는 선장에게 다가가 은화 한 잎을 내밀었다.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사내가 나를 흘긋 올려다보며 수염으로 덥수룩한 입을 열었다.
“아가씨 혼자요?”
“……네.”
본능적으로 이는 경계심에 굳은 목소리로 답하자 손을 뻗어 은화를 받아 간 선장이 거스름돈으로 동화 아홉 잎을 돌려주며 말했다.
“경계할 필요 없소. 워낙 흉흉한 세상이라 염려가 되어 한 말이었으니.”
“…….”
이제 탑승해도 되겠지.
경계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배로 향하는 길목에 발을 들였다.
“잠시만, 아가씨.”
“!”
그 순간, 나를 부르는 굵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으나.
“……무슨 일이시죠?”
아무렇지 않은 듯 당황을 갈무리하고 뒤돌아 선장을 응시했다.
나를 계속해서 주시하던 선장은 곧 그의 발치에 놓여 있던 나무함을 열어 그 안을 뒤적거리더니 날카로운 검날이 달린 목재 창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내 키의 절반만 할까.
그런데 왜 저런 걸 지니고 다니는 거지?
의아함에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볼 때, 선장은 그 창을 다름 아닌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 배 안에는 거친 이들이 많이 있을 거요. 호신용으로 하나 챙겨 가시오.”
“……네?”
……그걸 나한테 주겠다고?
“값을 치르라는 건가요?”
나는 미심쩍은 어투로 물었다.
“그냥 공짜로 대여해 준다 치고 들고 가시오. 어서.”
아니, 왜 이걸 나한테 그냥 주는 건데?
영 의문스러워 머뭇거렸으나, 마치 강매하듯이 창을 내밀며 가져가라 말하는 선장의 요구에 결국 못 이기고 받아 들었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퍼뜩 들어가시오.”
그러고는 쫓아내듯 손을 휘휘 저어 보이는 선장의 행동을 얼떨떨하게 쳐다보다, 영 어색한 창대를 쥔 채 배로 올라섰다.
“너는…… 배 바깥에 올라가 있을래?”
[까악?]
여전히 내 어깨 한쪽에 올라탄 까마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작게 울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까마귀에게 다시 속삭였다.
“너를 데리고 선실에 들어가면 시선이 쏠릴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배 바깥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날아서 배를 따라와.”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는데.
다행히도 까마귀는 내 말을 이해한 듯 푸드덕 날갯짓하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아무래도 날아서 따라오려는 모양이었다.
삐걱-
습기로 인해 곳곳이 부식된 나무판자를 조심히 밟으며 들어선 선실은 생각보다 좁았고.
“……망할.”
거친 이들이 많을 거라는 선장의 말이 정확히 적중하여, 온갖 질 나빠 보이는 무리가 곳곳에 수두룩했으며.
겁에 질려 숨죽이고 앉아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유난히……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열 명 남짓한 수의 젊은 남자들이 있었다.
“…….”
나는 현재의 내 신분을 상기하고 다른 이들의 시선에 띄지 않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빈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별다른 눈길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엄습하는 불안감에, 어쩌다 보니 유일한 의지처가 된 창대를 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땀에 축축이 젖은 손아귀로 꾹 쥐었다.
부우-
짤막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선실이 서서히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침착하자. 별일 없을 거야.
이 배만 타고 가면 바로 드라이어스 왕국이고, 그곳에 가면…… 적어도 추적을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지.
훗날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고 하나, 드라이어스 왕국은 하카드엘라 공국과는 달리 곧장 멸망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조그마한 창문 바깥을 내다보며 푸른 물결과 점차 멀어져 가는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먼 훗날, 망국으로 기록될 나의 조상들이 살아가던 나라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 돌아올 일은 없겠지…….
일렁이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공국이 멸망을 맞이하니 속이 다 시원하군.”
그 순간,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차가운 물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일깨워졌다.
“약소국 주제에 우리 사업을 얼마나 방해했던지. 망한 게 다행이야.”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 패거리 중 한 사내가 킬킬거리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언뜻 보기에는 구황 작물의 일종처럼 보이는 열매가 들려 있었다.
“하카드엘라 공국이 사클란의 주 재배지만 아니었어도 저딴 나라에서 이때껏 버텼을 이유가 있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해 상황만 바라볼 적, 내 앞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건…… 파룸의 원료잖아요? 겪어 보지 못한 황홀경을 선사한다는 마약!”
“독성이 너무 강해서 한 번 중독되면 오래 가지 않아 반드시 죽는다는 마약인데…… 그 원료를 저리 자랑하듯 떠들고 있다니.”
그 모든 말소리에 담긴 내용을 이해한 순간, 내 심경에 들끓는 감정의 이름을 무어라 정확히 재단할 수 없었다.
저들이 말하는 논리대로라면 약한 나라는 옳지 못한 일이 행해지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막아서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오직 강함과 약함의 논리대로, 힘없는 자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누른 채 참고 굴복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니샤 왕국을 보라고. 아무리 어둠의 정령왕을 숭배하니, 교활하고 잔인하다는 말이 나돌아도 수천 년이 넘어가도록 잘만 번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번영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세를 키우는 것에 있어 어떠한 도덕도,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연민도 버린 채 오직 얻게 될 무언가에 대해서만 일념했기 때문이겠지.
“……그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흔들리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내겐 쥐고 있는 창대가 부서질 만큼 옥죄어 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그때 패거리의 하나가 마치 목이 꽉 막힌 듯한 신음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공기가 매캐한 것 같은……. 으아아악!”
“!”
일련의 대화가 이어지던 순간.
힘겨운 어투로 대꾸하던 사내가, 돌연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뒷걸음질 쳤다.
“이봐, 왜 그래?!”
동료들의 물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공포에 질린 시선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향한 채.
양팔을 허우적거리던 사내는 갑작스레 다른 사람들이 앉은 자리 위로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꺄아아악-!”
우당탕-
졸지에 봉변을 당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미친 듯 온몸을 비틀고 몸부림치는 사내를 피해 도망쳤다.
“아, 안 돼. 오지 마, 내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끄아아악!”
그는 시퍼렇다 못해 보랏빛으로 보일 지경의 안색으로 대체 누구에게 하는 것일지 모를 말을 허둥지둥 내뱉으며, 두 팔과 다리를 마구 비틀며 몸부림쳤다.
마치, 다른 이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