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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99)화 (100/141)

<99화>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창대를 고쳐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나갔…… 끄아아악!”

그 순간, 한패였던 이를 미친 사람 보듯 내려다보던 또 다른 사내가 흘긋 뒤를 돌아보더니 곧 저가 비난하던 동료와 똑같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무슨…….”

“선장을 불러와!”

“다들 왜 저러는 거야?!”

그들이 신호탄이었던 것일까.

곧이어 패거리의 모두가 하나같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응시하며 비명을 지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두서없이 중얼거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공포에 몸을 경련했다.

울부짖는 이,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이.

보기에 끔찍할 정도로 토악질을 해대는 이, 극심한 공포에 정신이 나간 듯 광소하는 이…….

‘설마……!’

그 광경을 응시하며 기이하리만치 익숙하다는 감상을 느끼던 찰나.

불현듯 과거의 한 장면이 뇌리에 떠올렸다.

검게 물든 리테라의 상공, 빽빽하게 들어찰 만큼 소환되어 있던 어둠의 정령들.

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환각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광기에 물들어 날뛰던 정령사들……!

나는 비로소 이 변고의 진상을 깨닫고 처음 이 선실에 들어섰던 순간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류.

타고나기를 지체 높은 이들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를 드리우고 곳곳에 자리했던 젊은 사내들을 떠올리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아니나 다를까.

소란 속에 잠시 눈길을 떼고 있던 찰나, 흩어진 채 조용히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일어서 바닥에 쓰러져 미친 듯 발작하는 이들 너머의 사람들을 소름 끼치리만큼 무표정한 낯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환각에 사로잡힌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이곳을 응시하는 자들…….

불길하기 그지없는 예상이었으나, 아무래도 적중한 듯했다.

나는 잇새를 악물며 후드를 더욱 깊이 눌러쓰고 생각했다.

어둠의 정령사다.

하필이면 이 배에 내가 탑승한 상황에서, 어둠의 정령사가 단체로 들어선 것에 대한 이유를 들자면…… 가장 유력한 것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도망친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를 뒤쫓기 위해 니샤 왕국이 보낸 추적자들인 것이 확실했다!

아, 저들이 니샤의 복식을 취하지 않았기에 분명 이상한 점을 직감했음에도 멍청하게 넘겨 버린 내 실책이었다.

처음에 알아챘더라면 당장 이 배에서 내려섰을 텐데……!

“다, 당신들 누구냐니까! 왜 거기 서서 우리를 쳐다보는 거요!”

환각에 사로잡혀 발작하는 이들로 인해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은 졸지에 선실의 뒤편으로 밀린 채 니샤 왕국이 보낸 정령사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지?

도망칠 퇴로는, 있나?

아니야, 이 상황에서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저들이 내 신분을 특정 지을 빌미를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대들에게 악의는 없지만.”

바로 그 순간, 무리 중 한 명이 입을 열어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가 찾는 분이 이곳에 계시는 터라. 그대들이 부득이하게 겪을 고통에 미리 사죄하지.”

“무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전조를 담은 말이 끝맺어졌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낯빛이 하나둘 공포에 질려 새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켜며 다시 저들을 돌아보던 순간.

‘……이디스.’

검은 암흑이 모든 공간을 집어삼키는 듯한 환시와 함께, 내 눈앞에 오롯이 나타난 이가 소름 돋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왔다.

나는 망연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어째서 숨어 다녔던 거니.’

어느새 나는 다시 어려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어린 모습.

그래, 이 모든 일이 시작된 때.

일곱 살로 되돌아간 나는 어느 좁은 궤짝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내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몸을 굽힌 거대한 남자는…….

‘사랑스러운 내 딸, 아버지가 왔단다.’

로베릭이었다.

그 역겨울 만큼 환한 미소를 청초한 낯에 가득 머금은 채.

손아귀에 불길한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검을 쥐고.

‘어서 가자, 그 좁고 추한 곳에서 나오렴.’

피가 점점이 튄 손을 내밀며 다정히 속삭였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이 어둠의 정령이 권능으로 이루어 낸 환상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망각하고.

마치 그 시절의 나로 되돌아간 것처럼 두려움과 끔찍한 혐오감에 질린 채.

‘하, 할아버지…….’

정처 없이 주위를 돌아보며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을 애타게 찾았다.

‘어디 계세요?’

그러나 어디에서도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 막막한 암흑 속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와 로베릭 뿐이었다.

‘……또, 그자를 찾는 거냐?’

넘치는 기쁨으로 젖었던 고아한 미성이 바로 그 순간 질척한 분노로 물들며 험악하게 뒤틀렸다.

‘……나를 봐! 내가 네 아비란 말이다!’

로베릭은 우악스럽게 내 두 팔을 잡아채 허공에 들어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으윽…….’

‘다 늙어 힘없는 노인 따위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내 딸이야, 내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자식이라고!’

거칠게 내 몸을 흔들며, 마주하기도 끔찍한 일그러진 얼굴로 해묵은 질시와 증오를 토해 내는 로베릭이.

그 순간의 나는 너무나 두렵게 여겨져서.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의 모든 것은 내가 빼앗았다. 이제 너만 손에 넣는다면 그놈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진데!’

저열한 열등감.

나를 동등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집착하는 물체인 것처럼 여기는 말.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디 계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그 입 다물어! 어리석은 것, 너를 이렇게나 아끼는 아비를 저버리고 조부를 찾는 것이냐?!’

‘아악!’

온 힘을 다해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할아버지를 찾던 순간, 로베릭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이 격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며 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온몸이 너무 아팠다.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아파서…….

‘흐윽, 으아아앙……. 할아버지! 할아버지이!’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검은 어둠을 손으로 긁어내리듯 기어가며 할아버지를 찾아 애타게 헤맸다.

끔찍했다.

눈물이 줄줄 흐를 만큼 온몸이 아파 왔고 눈앞에 존재하는 남자는 두렵고 혐오스러워, 두 번 다시는 이 두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멈추거라, 이디스. 고작 그따위 반항으로 네가 내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니야, 아니야…….’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눈물을 쏟아 내던 내 귓가에 로베릭의 목소리가 질척하게 메아리쳤다.

‘설사 네가 나의 작위를 가져간다 한들 세상 모든 이는 너를 내 딸로 여길 것이다. 역사에도 네 이름은 그리 남겠지. 로베릭 아르네 헤일리안의 유일한 여식! 하나 아비가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고 몰락한 외가를 복권시키기 위해 친부의 뜻을 저버리고 그를 박대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아니야, 할아버지는 잘못한 것이 없어, 어머니도…….’

‘실컷 부정해 보거라, 그리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지!’

이토록 혐오스럽고도 두려운 환상은 역설적이게도 그간 내가 은연중에 묻어왔던 불안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조롱하고 있었다.

모든 정령왕을 억제하고, 절대적인 의지로 균형을 조종하며 아르카네를 사랑하는 중립.

그가 지혜의 정령왕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마리에트가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나라고 한들 무슨 기적을 이뤄 낼 수 있겠는가.

미래를 예지하는 위대한 정령왕조차, 아르카네에게 유의미한 타격 하나 입히지 못하였는데……!

‘흐윽, 으아아앙!’

결국 나는 무력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이 더없이 끔찍했다.

도저히 벗어날 길 보이지 않는, 살아 있는 지옥이 나를 촘촘히 둘러싼 채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 속삭이며 조소하고 있었다.

“싫어, 제발, 그만…….”

“……이제 괜찮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처음으로, 로베릭이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조용히 읊조리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

눈을 뜬 나는 더 이상 사위가 막막한 암흑으로 물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아, 아아아악!”

눈물이 가득 고여 흐려진 시야 너머, 그 형태가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두 팔을 옥죈 손아귀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마치 로베릭이 아직도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나는 진정 공포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그 손을 떼어내기 위해 마구 몸부림쳤다.

똑, 똑…….

“……!”

그때였다. 나의 비명과 울음으로 점철되었던 귓가에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든 것은.

알 수 없을 연유로 퍼뜩 정신이 들어, 두 눈가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에 맑아진 시야로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채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그제야 오롯이 드러나 보였다.

“이제 조금이나마 진정되십니까?”

하얗고, 동시에 지울 수 없는 공허함이 깃든 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밤의 신이 인간의 몸으로 현현한다면 꼭 이와 같을까.

그가 등진 하늘의 색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를 지닌 수려한 외양의 젊은 사내는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연상시켰으나.

분명 매혹적임에도 서늘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던 그와는 달리.

“공녀.”

다정하고, 어딘가 깊은 슬픔이 감도는 것처럼…….

“당신은…….”

다 타 버린 재가 연상되는 색채를 머금은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로베릭이 아니었다.

끔찍했던 것은 모두 환상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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