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망연히 중얼거리던 나는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던, 끊임없이 액체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에 무심코 시선을 내린 후 화들짝 놀랐다.
“피……?”
갑판 위, 손을 짚은 채 쓰러지듯 주저앉은 내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의 한쪽 팔이.
수없이 날붙이로 베어 낸 듯한 상흔으로 난도질 된 채 붉은 혈흔을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이질적인 소리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을 깨닫자마자 어떻게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것인지 모를 만큼 진하게 와닿는 비릿한 혈향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사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둠에 물들어 곳곳에 별이 떠올라 반짝이고 있었다.
배에 오르던 때까지만 해도, 선실에서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만 해도 아직 파란 낮이었는데.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환각에 빠져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이 남자의 정체는 분명히…….
“……나를 공녀라고 칭하셨지요.”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보며 퇴로가 있는지 확인한 후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은 배의 끄트머리.
뒤에 있는 것이라고는 밤을 삼킨 듯 캄캄하게 요동치는 차가운 강물뿐.
선실 안에 있던 내가 어쩌다 이곳에 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대체 누구기에, 내게 그런 끔찍한 환각을……!”
“……소개가 늦었군요.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마주하지 못할 만큼 깊이 베여 쉼 없이 피를 떨어뜨리는 상처가 정녕 아무렇지도 않은지.
남자는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니샤의 군주께서 저를 친히 보내셨습니다. 그대를 모셔 가기 위해.”
“!”
나는 눈앞이 암담해지는 절망에 사로잡혀, 손톱이 부러질 만큼 억세게 갑판을 긁어내리며 짓씹듯 사납게 내뱉었다.
“기어코 나를 다시 붙잡아 가려고……. 이런 저열한 짓을!”
저들로 인해 내가 겪어야 했던 공포가 얼마나 짙고도 혐오스러웠던가.
나는 뼛속까지 떨리게 만드는 증오에 사로잡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그가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읊조렸다.
“군주의 명을 받들기 위해 그대를 기다렸습니다. 그로 인해 겪으셔야 했던 고통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 남자의 행동에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당황에 잠겼다.
니샤의 인간들은 저보다 약한 이는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으며 모멸스레 짓밟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남자는 내가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정중하게 예를 갖춰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기억 속에는 이자의 얼굴이 남아 있지 않는데…….
“……군주의 뜻을 받들어 나를 뒤쫓은 당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십시오.”
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는 잠시간 나의 심중을 읽으려는 듯 나를 내려다보다.
곧 입을 열어 답했다.
“아이나르 왕가의 형제 가문, 신월新月의 일카이의 수장.”
그의 위로 드리운 밤하늘.
“이름은 칼리드 일카이라 하나, 공녀께서는 저를 왕제라 칭하시면 적절하겠지요.”
금방에라도 사라질 듯 하얗게 빛나는 초승달이 눈가에 선연히 비쳤다.
“칼리드…… 일카이?”
몰아치는 일들에 어느 순간 잊고 있었던 낯익은 이름.
나는 조용히 그 이름을 읊조리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리아트?
‘나의 이름은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
‘니샤 왕국의 군주다.’
분명 리아트의 성일 것이라 생각했던 칼리드가 자신의 이름이라 하고, 일카이를 출신 가문이라 이야기하는 남자의 말에 당혹감이 먼저 치밀었다.
“…….”
아니다, 그만 생각하자.
이 사람이 리아트와 피로 이어진 조상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으며.
그 외의 것에 의문을 가질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왕제께서는 저를 데려가실 심산이시겠군요.”
물에 뛰어들면, 저자가 나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나?
설사 저자가 포기하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강물 속에서…… 이런 몸 상태로 헤엄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물의 유물의 행방을 얻어 내기 위해?”
나는 지긋지긋한 마음에 날카로이 외쳤다.
칼리드는 침묵 끝에 조용히 대꾸했다.
“군주의 뜻이 그러하니.”
하, 나는 실소를 토해 냈다.
드라이어스 왕국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마리에를 다시 만나, 물의 유물이 안전한지 확인하지도 못했는데…….
‘과거는 과거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지금의 국왕은…….’
과거는 과거에 불과하다니?
그렇다면 나와 하카드엘라 공국이 겪은 이 고통과 수모는 대체 누가 갚아 준단 말인가.
이토록 잔혹한 현실이 훗날의 역사에 단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비참한 미래를, 어떻게 감내하라는 말인가.
“다 알면서 나를 농락하는 겁니까?”
거친 기침을 두어 번 토해 낸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거친 갑판 위로 손을 짚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반항할 기운 한 터럭조차 내겐 남아 있지 않은데.”
바닥에 닿아 길게 늘어뜨려진 짙푸른 머리칼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작게 흩날렸다.
“강물에 뛰어든다 한들 그대들이 다시 건져 내면 그만일 테고.”
“……스스로를 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말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검은 강물을 응시하며 내뱉은 말에는 당연하게도 긍정이 되돌아왔다.
자포자기한 심정이 그 연유였기 때문일까.
나는 퇴로가 없음을 전제하고 저자에게 끌려간 후 겪게 될 심문과 고문을 어찌 견뎌 내야 할지에 대하여 생각했다.
싸아아아-
“……?”
바로 그때였다.
배 아래 조용히 물결치던 강물의 흐름이 어딘가 이상해졌다.
무언가의 압력에 의해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잔잔히 흔들리던 배를 거세게 뒤흔들고 있었다.
“무슨…….”
“이건……!”
당혹에 잠긴 나와 달리 이 현상의 이유를 알아챈 듯 칼리드가 그 잿빛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곧 눈매를 살짝 일그러뜨렸고.
“물의 정령사다, 경계해라!”
뒤로 돌아서 날카롭게 외쳤다.
“……물의 정령사?”
나는 그의 당황을 응시하며 멍하니 생각했다.
……대체, 누구지?
“!”
쿠과아아아-
바로 그때, 검게 소용돌이치던 물결이 밤하늘을 가를 듯 거대하게 솟구쳐 올라 갑판을 향해 쇄도했다.
황급히,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으나 공격은 나를 완전히 빗겨 갔고.
오직 칼리드만을 노린 것처럼 그를 향해 무섭도록 몰아닥쳤다.
“큭…….”
그러나 칼리드는 예의 검은 궤적을 형상화한 듯한 월도를 현현하여, 팔을 뒤로 젖힌 뒤 그 반동을 타 거칠게 휘두르며 허공을 양단했다.
서걱-
오래전, 리아트가 나이아드의 공격을 마치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베어 냈듯이.
기세를 잃어버린 공격은 구심점을 잃고 물로 되돌아가 힘없이 흐트러졌다.
“……아!”
그로 인해 목표를 잃고 갑판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의 장막을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심장이 내려앉던 무렵.
“로제.”
어느샌가 내 뒤로 다가온 이가 주저앉은 내 몸을 끌어당겨 품에 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로제 하카드엘라를, 아는 사람?
“……!”
낯선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커다랗게 뜨던 순간.
콰아아아-!
나를 끌어안은 남자와 나만을 피해, 물의 장막이 무섭도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심하십시오. 모셔 가기 위해 왔습니다.”
“누구-”
“설명은 후에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가 나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갑판을 달려 강물을 향해 뛰어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심장이 허공에 부웅, 뜨는 것만 같은 감각.
풍덩-
“!”
갑작스레 코와 입으로 들어차는 차가운 물에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푸하-!”
수면 바깥으로 얼굴이 떠오른 직후, 매섭게 달라붙는 서늘한 냉기에 뼛속까지 차갑게 식어 이가 절로 달달 떨렸다.
그 짧은 시간 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것 같은 정신을 온 힘을 다해 붙들었다.
그리고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또다시 강물을 요동치게 하는 정체 모를 이를 안간힘을 다해 돌아보았다.
흐린 푸른 기를 띤 은빛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추우십니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물에 젖어 더욱 창백해진 낯빛.
새벽이 인간을 사랑하여 자신을 닮은 피조물을 창조한 것처럼, 동이 터 오기 직전의 하늘을 닮은 미려한 청년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낯빛 속, 고요히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는 한눈에 보아도 로제의 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그 모든 사실을 조합한 순간, 나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레제크…….”
“늦어서 송구합니다, 로제.”
망연한 중얼거림에 답한 그는 은빛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다시 한번 강물을 요동치게 하여 거센 물보라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