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1)화 (102/141)

<101화>

그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순간, 뇌리에 하나의 기억이 솟구쳐 올랐다.

‘인사하렴. 너희의 육촌 오라버니, 레제크 드라이어드 하카드엘라란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중년의 여인이었으나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여인이 바로 하카드엘라 공이자, 로제와 마리에의 어머니라고.

바다처럼 짙푸른 머리칼을 틀어 올려 우아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영롱한 푸르름을 머금은 사파이어가 굵직하게 박힌 티아라로 장식하고.

그 자체로 파도를 형상화한 듯 화려한 백색과 청색이 어우러진 드레스 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서늘한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자신의 허리에도 닿지 못할 만큼 자그마한 남자아이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어미의 사촌, 너희에게는 당숙이 되는 데릭 하카드엘라 경이 드라이어스의 왕녀와 혼인하며 하카드엘라를 떠났던 터라 이곳의 문화에는 익숙지 않을 테다.’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고운 은발을 눈가까지 늘어뜨린, 순간 여자아이로 착각할 만큼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가 시선을 내리깐 채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또한 얼마 전 부모님을 여읜 딱한 사정이기도 하니……. 로제, 네가 오라버니를 잘 돌봐 주렴.’

이 기억의 주인, 로제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더없이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답했다.

‘네, 어머니.’

딸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 하카드엘라 공이 내실을 떠났다.

로제보다도 더욱 어려, 고작 다섯 살 남짓해 보이는 마리에는 로제의 옷깃을 꼭 쥔 채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레제크를 바라볼 뿐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레제크는 또 그대로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작은 두 손을 꾹 말아쥐며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뻐요, 오라버니.’

그 적막을 깨고 입을 연 자는 로제였다.

앳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레제크를 향해 다가선 로제는 마치 악수를 청하듯 자그마한 손을 내밀고 말했다.

‘제 이름은 로제 하카드엘라예요. 앞으로 서로를 친남매처럼 여기며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단호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으나.

레제크라는 소년은 그 고운 미간을 눈에 띄게 찡그리며.

‘친한 척하지 마, 소름 끼치는 계집애.’

그 요정처럼 반짝이는 외양으로 내뱉을 말이라고는 절대 예상치 못할 정도로 표독히 쏘아붙인 뒤 매몰차게 돌아설 뿐이었다.

‘허억……!’

마리에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숨을 들이켰다.

그 상황의 로제는, 글쎄.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게도, 무미건조한 심경으로 멀어지는 어린 소년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뭐지?’

내 접근 방식이 틀린 건가?

라는, 지나치게 사무적인 생각만을 떠올릴 뿐이었다.

우드득-!

“!”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섬뜩한 소리로 인해, 과거에 사로잡혔던 나는 불현듯 현실로 돌아와 강물의 범람을 이기지 못해 부서져 가는 배를 멀거니 응시했다.

저 안에는 칼리드와 니샤의 정령사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타고 있었는데……!

뒤늦게 죄 없는 사람들의 면면이 떠올랐으나 수면 위로 떠 있을 힘도 없어 레제크의 품에 기대어 있는 내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끔찍한 피해를 끼치고 말았다.

나는 몰려드는 죄책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기억 속에서 엿보았던 싸가지 없는 태도와 상반된 정중한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아…… 아뇨.”

나는 망설이다 대꾸했다.

환각에서 깨어난 직후 황망한 심경이 제대로 가라앉지도 않았을뿐더러, 차가운 물에 한동안 휩쓸려 다녔더니 몸이 굳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솔직하게 내뱉은 답에 레제크는 다시 한번 더 나를 단단히 고쳐 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어느 정도 발목을 잡아 놓은 듯하니, 이만 떠나도 될 것 같습니다.”

떠난다니, 물을 다스려 육지로 이동하겠다는 말인가?

무심코 그리 생각하던 순간.

차가가각-

“!”

검고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던 강물이, 한순간에 하얀 서리가 낀 얼음으로 변모하였다.

“얼음의 정령…….”

그 신비로우면서도 낯익은 조화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심장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수면 위로 휘몰아치며 서서히 그 면적을 넓혀 갔다.

레제크는 나를 한쪽 팔에 끌어안은 채 단단한 빙판 위로 성큼 올라서, 곧 나를 완전히 안아 든 채 단단히 얼어붙은 강 위로 걸음을 디뎠다.

하아-

그의 입에서 하얀 서리 같은 숨결이 밭게 흘러나왔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차가운 숨결을 멍하니 응시하던 순간, 퍼뜩 몰려드는 불안에 사로잡혀.

나는 혹여 니샤의 왕제가 쫓아오진 않을까 싶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그러나 강물 아래로 침몰하는 배는 더 이상의 추적이 없을 것이라 단언하는 것만 같았고.

나는 한숨을 돌리며 끝없이 펼쳐진 하얀 강을 바라보았다.

* * *

“왕제 전하, 괜찮으십니까!”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던 배는 곧 검은 안개에 휘감겨.

“…….”

하얀 냉기가 감도는 공기 위로 떠올라, 차가운 강물을 흘려보냈다.

“……전하.”

다급히 주군을 찾던 이르마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판 위에 홀로 선 검은 사내를 발견하고 무릎을 꿇으며 떨어질 하명을 기다렸다.

“…….”

칼리드는 시야를 흐리는 젖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뜻 모를 감정이 담겨 깊이 침잠한 눈빛으로 인적이 사라진 얼어붙은 강을 응시했다.

“물을 다스리던 규모로 보아 상위 정령, 얼음의 권능 또한 함께 다스린다…….”

갑작스레 나타나 계획을 어그러뜨린 자의 정보를 하나둘 읊던 칼리드는, 곧 뇌리에 스치는 인물 중 부합하는 이를 가려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레제크 드라이어드로군.”

드라이어스 왕국과 하카드엘라 공국의 계승권을 동시에 지닌 젊은 왕족은 이전부터 니샤에서도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다.

마리에 하카드엘라 공녀를 데리고 잠적한 인물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이였는데…….

“둘째 공녀는 드라이어스 왕국에 둔 것인가. 그렇다면 유물 또한…….”

무사히 도주하기 위해 미끼로 남겨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첫째 공녀마저 구출해 가기 위해 나타나다니.

“…….”

원치 않게도, 예상했던 대로.

“결국 망국을 앞당겨야 하는가…….”

수려한 낯빛에 근심의 기색이 서려 파문을 남겼다.

그는 마치 한탄하듯 낮고도 고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욱씬-

수도 없이 난도질당해 출혈이 지속되는 것도 모자라 차가운 물기마저 스며든 환부에서 묵직한 통각이 느껴졌다.

칼리드는 피가 흘러내리는 팔목을 손으로 감싸 지혈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상흔을 남긴 이는, 방금 사라진 하카드엘라의 첫째 공녀였다.

로제 하카드엘라로 추정되는 여인을 찾았다는 부관의 보고를 받고 향했던 갑판 위에서.

‘아니야, 그만…….’

온몸을 간헐적으로 떨며 위태로이 선, 가냘픈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카네의 권능이 자아낸 환각에 사로잡혀 두려움으로 물든 은빛 눈은 분명 그를 향해 있었음에도 현실을 비추지 않았고.

‘오지 마, 내게, 오지 말란 말이야…….’

괴로움에 젖은 목소리로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리면서도, 날카로운 창대가 마치 제 목숨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붙든 채.

떨리는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리드를 향해 겨누었다.

‘……공녀.’

그녀가 어떠한 환각을 보고 있을지 알 도리는 없었지만.

칼리드는 나직이 입술을 달싹이며 한 걸음 더 다가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내게, 손대지 마!’

바로 그때, 로제 하카드엘라가 발악하듯 고함을 지르며 창을 휘둘렀다.

푹-

날 벼린 칼날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붉은 선혈이 마치 허공에 꽃망울을 틔우듯 흩날렸다.

‘……!’

그 선연한 색채를 마주하며, 공허한 회안에 짙은 파문이 일었다.

‘전하!’

그의 부관이 다급히 공녀를 제압하려는 듯 다가왔으나.

‘……오지, 마라.’

칼리드는 창날이 관통하지 않은 팔을 들어 부하를 막았다.

‘환각이 가라앉을 때까지 내가 공녀를 살필 것이다. 하니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라.’

주군의 명령에 부하는 순응하여 그 자리에 멈추었다.

칼리드는 자신의 팔을 관통한 창대를 다른 손으로 감싸 쥐며,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공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당신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해치지 않을 테니.

‘하니, 이제 그만…….’

나라를 멸망시키고, 정령을 소환하지 못하도록 생명마저 갉아먹는 이물을 몸속에 박아넣고.

마침내 정령왕의 유물조차 앗아 가려는 대상을.

‘…….’

두려워하지 말라, 니.

‘나는…….’

만약 내가 당신과 같은 처지로 내몰린다면…….

이와 같은 위선적인 말을 내뱉는 원수에게, 감히 순응할 수 있겠는가?

‘아, 아아악-!’

스걱-

또다시 눈앞에 붉은 핏방울이 흩어지며, 코끝에 와닿는 비릿한 향과 함께.

‘불가능하겠지…….’

칼리드는 고통조차 잊은 채 망연히 중얼거렸다.

“…….”

그러나 그의 육신과 영혼을 속박하는 맹세는 자유를 허락지 않았고.

“지금부터.”

칼리드는 하얗게 얼어붙은 은빛 강물로부터 돌아서 명령했다.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향한다.”

어디를 가든, 어디로 숨든.

개의치 않고 찾아내어 반드시 물의 유물을 이 손아귀에 넘겨받고 말 테니.

“주군의 뜻을 받드나이다.”

하얀 달의 뒷면을 닮은 회색 눈동자에 공허한 집념이 깃들어 스산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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