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9. 필생의 근원, 정령왕의 관
온몸이 젖은 상태로, 끝도 없이 이어진 얼어붙은 강물 위를 얼마나 내달렸던가.
냉기가 올라오는 빙판 위를 벗어나지 못하여 얼굴과 손발에 감각이 사라지다 종래 몸을 떨 기력조차 바닥났던 때.
드디어 녹음으로 우거진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로제.”
한참 후, 레제크가 나를 단단한 대지 위로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싸고, 조금이라도 온기를 보전하기 위해 애를 쓰며 대꾸했다.
“아니요…….”
그야말로 얼어 죽을 것 같았다.
불의 정령을 소환하여 이 젖은 몸을 말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애타게 갈망하며, 입에서 내뱉어지는 숨결조차 차가워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에 다다랐을 때.
“……송구합니다만, 잠시.”
“……!”
입술을 깨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레제크가 돌연 나를 품속으로 끌어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추위에 괴로워하던 와중에도 어딘지 기묘해진 상황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굴렸다.
비록 로제의 기억에서 그의 정체와 어린 시절을 엿보았음에도, 내겐 분명히 낯선 사내에 속하는 이의 심장 울리는 소리가 너무도 가까이에서 들려와.
이미 한참 동안이나 안겨 있던 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얼어붙일 듯한 냉기가 올라오던 빙판 위를 벗어나 한시름 돌린 지금에 다다라서 유달리 커다랗게 느껴졌다.
에일 듯 차가운 냉기를 품은 그가 나를 끌어안아 봤자, 따듯해질 리도 없는데.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서로를 마주 안고 있으려니 몸을 고통으로 몰아붙이던 한기가 마치 거짓말처럼 조금이나마 물러나는 듯했다.
나는 망설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제크의 팔을 짚어 밀어냈다.
그의 품에서 얼굴을 들어 은빛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조금, 괜찮으십니까?”
“……네.”
로제는…… 어린 시절이긴 했지만, 레제크에게 존대를 사용한 것 같았으니.
나는 낯선 기분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답했다.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깊은 심정을 들여다볼 수도 없을 만큼 절절한 목소리가 전해 온 말에.
나는 손끝을 움찔 떨며 멍하니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생각하는 제가 너무도 추악하여 수치스러웠음에도, 함께 도망치는 사람이 마리에가 아닌 당신이었다면…… 그리 생각하고 말 만큼…….”
깊은 고뇌가 서린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리던 그가 미려한 낯을 일그러뜨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때맞춰 그 새가 날아들지 않았더라면, 끝내 당신을 놓치고 말았겠지요. 그리되었다면 저는…… 어떤 참담함에 잠겨 죽을 듯이 괴로워했을까요.”
로제를 향한 깊은 그리움, 애절함…….
얼핏 드러나 보인 그 감정의 윤곽을 목도하고 당황에 빠진 나는, 그 표면을 계속해서 더듬다가는 끝내 속에 든 진의를 낱낱이 파악해 버릴 것만 같아서.
“……새, 라니요?”
그에게서 손을 떼고 서둘러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순간, 비로소 죽음의 정령왕이 내게 붙였던 감시꾼이 떠올라 설마 하는 심정으로 레제크를 올려다보던 때.
“……검은 새 한 마리였습니다. 물가에서 그리셸 선착장으로 향할 선박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때, 유달리 다급하게 날아와 제 머리 위를 맴돌더군요. 마치……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세상에, 그저 시끄럽게 내 주위만 맴도는 멍청한 새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까마귀가 나를 구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잖아?
나는 몰려드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이어지는 레제크의 말을 경청했다.
“그토록 검은 색채를 지닌 새의 출현은 예로부터 불길한 소식을 상징하고는 했지요. 그래서 선박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강물을 얼어 붙여 무작정 새가 날아가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갑판 위에서, 니샤의 끄나풀로 보이는 사내 앞에 몰린 당신을 발견하고 제 때에 구출할 수 있었지요.”
“……그 새가, 나를 구했군요.”
죽음의 정령왕이 내게 붙여 놓은 권속.
굳이 나를 도울 이유는 없었을 터인데, 어째서?
의문에 잠겨 중얼거리던 찰나, 눈앞에서 내려다보는 사내의 시선을 마주하고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제 하카드엘라의 육신에 들어선 직후 가장 먼저 마주한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죽음의 정령왕이다.
그러니 로제 하카드엘라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영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지만 이 사람은, 로제가 살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겠지.
마리에라는 이름의, 로제의 자매 또한…….
“천운이 따라 주었군요.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자의 손에 끌려갔을 거예요.”
언니가 살아 있다고 믿겠지…….
나는 괴로움에 밭은 숨을 토해 내며 생각했다.
진실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이들이 로제 하카드엘라가 살아 있다고 믿게끔 행동해야 한다.
원치 않게 떠안은 죄책감을 억지로 외면하더라도.
“한데…….”
영롱한 은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레제크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어째서 정령을 소환하지 않으셨습니까. 사위가 물이었으니, 권능을 빌리시기에도 수월하셨을 터인데.”
그 순간, 세상에 현존하지 않는 새벽의 정령처럼 신비롭던 그의 낯이 무참히 일그러지며.
“설마…… 그들이, 당신의 몸에 무슨 짓을 가한 겁니까?”
레제크가 무섭도록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거짓말처럼 정령을 소환하려 했던 때마다 몰려들었던 지독한 격통이 생생히 떠올랐고.
“그건…….”
나는 소름 끼치는 감정에 휩싸였으나, 확실한 진실을 알지 못했기에 망설이며 대답을 미루던 때.
“……으윽,”
기묘한 어지러움과 동시에 어떠한 기억이, 마치 물감이 쏟아지듯 순식간에 뇌리를 적시며 시야를 잠식했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가만히 있으십시오.’
시야의 주인, 기억의 주인공.
로제가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으나 니샤의 군사들은 그녀를 포박하였고.
옷깃을 내려 드러난 등을 향해 무언가 날카로운 것을 박아 넣었다.
‘……!’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한 섬뜩한 고통.
뜨겁도록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를 비집고 들어온 불쾌하고 이질적인 물체.
육신을 흐르던 생명의 근원을 억지로 틀어막는 듯한 족쇄.
그 순간 이후 정령을 소환하는 것도, 권능을 끌어오는 것도.
어떠한 시도도 성공할 수 없었다.
끔찍한 고통, 충격, 절망.
마침내 이룰 길 없는 분노로 끝맺으며.
“로제.”
몸을 붙드는 손길에 현실로 돌아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망연히 읊조렸다.
“그들의 나의 등을 베어…… 무언가를 집어넣었어요. 그 이후로 정령 소환을 시도할 때마다 격통이 밀려들었고, 심하면 피를 토하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내가 나인 건지, 다른 이가 나의 입을 빌려 대신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정령을 소환할 수도, 권능을 빌려올 수도…… 없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에 잠겨 모든 것을 토로했다.
“……모든 반발을.”
레제크가 참담함으로 무너진 목소리로 말했다.
“원천에 끊어 버린 것이로군요.”
그리고 독기 어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저열하고도 잔악한 것들.”
그의 한마디가 바로 니샤 왕국을 지배하는 일족을 상징하는 수식어였다.
저열하고, 잔악한 적.
그저 증오하며 비참히 몰락하기만을 간원할 대상.
“……배를 침몰시켰다고는 하나, 언제 다시 그들이 우리를 추적해 올지 모릅니다.”
레제크는 몸을 일으키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드라이어스 왕궁으로 향하도록 하지요.”
“……네.”
아직도 기억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만 나의 일부분을 넘겨준 채.
나는 억지로 쥐어 짜낸 목소리로 답하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 * *
“로제.”
인근 도시에 도착하여 여관의 방에 들어선 직후.
레제크가 나를 향해 심각한 기색으로 물음을 건넸다.
“그들이 당신의 등을 베어 무언가를 심었다고 말씀하셨지요. 실례인 것은 압니다만……. 제가 환부를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의 뜻은 이해하지만.
처음으로 눈을 떴던 버려진 성에서부터 그리셸 선착장으로 향하던 도중, 몇 차례나 여관에 머무르며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고 거울에 비추어 본 적이 다수였음에도.
“……상처는 모두 아물었어요. 작은 흉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죠.”
이미 아문 흉터를 다시 찢어 이물을 찾아내려 한다 해도, 혈관을 타고 흘러갔다면 그 또한 허사로 되돌아갈 뿐.
“그렇습니까. ……송구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더 일찍 당신을 구하러 갔더라면…….”
“아니요, 이건 당신의 탓이 아니에요.”
레제크가 죄책감에 잠겨 괴로이 중얼거렸다.
나는 망설이다 그의 손을 살짝 붙들며 말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음에도, 나는 만전을 기하기 위해 창가 바깥을 내다본 다음 레제크를 돌아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레제크 오라버니, 마리에와 유물은 안전한가요?”
“아, 다행히도 드라이어스의 국왕께서 마리에 공녀님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레제크는 한발 더 나아가 창가에 커튼을 단단히 치며 답했다.
“물의 유물과 숲의 유물을 함께 봉안해 두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