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어서 오시오, 하카드엘라의 첫 번째 공녀여.”
하얀 돌로 조각한 왕좌에 앉은 우미한 여인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하카드엘라의 공녀를 맞이했다.
“레제크에게 이야기로나마 들어 알고 있었소.”
이 젊은 여인은 숲의 왕국 드라이어스의 국왕, 알키페 드라이어드.
드라이어드라는 성에서 알아챌 수 있듯 숲의 대정령사 시시페아 드라이어드의 부모나 친척에 해당할 여인이었다.
나의 외할머니, 아타라 하카드엘라는 멸망한 물의 공국을 통치하던 가문의 후예였고.
숲의 대정령사, 시시페아 드라이어드는 역시 멸망한 숲의 왕국을 다스리던 왕가의 후예이니.
이 무슨 묘한 인연일지 모르겠다.
“드라이어스의 국왕 전하를 배알하나이다. 복잡한 사정이 있음에도…… 이토록 흔쾌히 저희 자매를 받아 주신 은혜, 갚을 길이 없어 난처할 따름입니다.”
“당연한 일이니 부채감을 가질 필요 없소. 드라이어스와 하카드엘라는 오랜 우방, 자매와 같은 나라의 어려움을 모른 척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알키페는 너그러운 말씨로 대꾸하며 물음을 던졌다.
“오는 길에 고초는 없었소?”
“……그것이.”
나는 레제크를 돌아보았다.
그가 낯빛을 살짝 굳히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실…… 아힐란 강을 건너오던 중, 니샤의 왕제에게 추적당하여 전투를 벌인 끝에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니샤의 왕제에게?”
칼리드 일카이, 신월의 왕제.
그를 마주했던 이야기를 꺼내자 알키페의 안색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일카이의 왕제였소?”
“예. 스스로를 그리 밝히더군요.”
“하…….”
내게서 그 왕제의 정체를 들은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고뇌에 찬 한숨을 내뱉었다.
“……하카드엘라가 무너졌으니, 분명 다음 차례는 드라이어스일 터.”
영롱한 녹색 안광에 비탄의 빛이 짙게 서렸다.
“사설이 길어졌군. 가장 궁금할 것은 물의 유물의 안위일 터요.”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알키페는 낯빛 위로 드리워졌던 모든 근심의 흔적을 지워 내며 말했다.
“레제크 공에게 듣기로는 숲의 유물과 함께 봉안해 두셨다고…….”
“맞소. 필생의 근원과 함께 그라시아 왕궁의 옆, 왕가의 숲에 봉안해 두었지.”
왕궁의 옆에 있던 거대한 숲.
그곳이 바로 드라이어드 왕가의 성소인 듯했다.
“그렇다면…… 물의 유물이 안전히 보관되어 있는지, 제가 확인해 보아도 괜찮을지요.”
물의 유물과 숲의 유물.
아직 망가지지 않고 온전한, 내게 있어 더없이 귀중한 유물들이었다.
“물의 유물은 본래 하카드엘라의 소유.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소. 지금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알키페가 왕좌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따라오시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드라이어스 왕국 또한 멸망한다는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니샤 왕국을 비롯하여, 아르카네의 손아귀로 넘어가기 전에.
두 개의 유물을 안전히 보관할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한다.
* * *
고요한 침묵만이 서린 공간, 장엄한 백색의 기둥들이 드높은 천장을 지탱하며 양옆으로 이어졌고.
그 너머로 비쳐 오는 광경 속, 훗날 로샨 제국에서 옛 드라이어스 왕국의 유산으로 칭하며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화초들이 침묵 속에서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며 고고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시야를 산란히 물들이는 각양각색의 색채로 흐드러지듯 피어난 나팔꽃.
그 너머에 존재하는 벽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하게 드리워진 담쟁이덩굴.
나를 멈춰 세운 알키페는 손을 뻗어, 자연이 드리운 장막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드러나 보인 회색 돌담 위로 곧은 손을 가져다 대었다.
“……!”
그녀의 손등 위로 옅은 녹색의 문양이 언뜻 모습을 보이며, 신비로운 빛을 발하다.
마치 내가 보았던 것이 환상인 양 순식간에 사라졌다.
쿠구구궁-
그 너머의 풍경을 온전히 차단하여, 하늘에 닿을 듯 드높고 견고하던 벽이 지반을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두어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공간을 형성하고서 벽은 움직이기를 멈추었고.
“이 너머가 바로 드라이어드 왕가의 성소, 정령왕께서 내리신 유물이 봉안되어 있는 곳이오.”
신비로움에 가려진 드라이어드 왕가의 숲, 알키페는 그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사박, 사박-
나직한 숨결, 풀잎을 지르밟는 소리만이 한동안 귓가를 채웠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협소한 통로를 벗어난 순간.
“……아.”
거대한 숲.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첩첩이 자라난 짙은 녹음의 나무.
그윽하고도 독특한 향내를 터뜨리며 만개한 화초.
작은 동물들이 서식하는 듯 바스락,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싸아아아-
듣는 이의 심경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묘하게 뒤흔드는 바람이 불어 들며, 하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저 넓은 창공 위로 떠나갔다.
고요하나, 더없이 강렬히 박동하는 생명의 마나가 서린 곳.
이곳이 바로 숲의 정령왕이 축복한 왕국의 성소였다.
“저건…….”
한동안 넋을 놓은 채 숲을 돌아보다, 마침내.
이 숲의 중심.
“……!”
수천 년은 더 오래되어 마치 이 숲의 심장이 되어 버린 듯.
일국의 역사를 그 몸에 아로새겨, 모든 시작과 끝을 함께할.
하늘에 닿을 듯 자라난 몸체.
수많은 가지를 촘촘히 얽어매어 드넓은 녹음을 드리운 천혜의 장막.
그를 투과한 햇볕이 마치 한낮에 뜬 별처럼 산산이 흩어져 나의 위로 쏟아져 내렸고.
경이와 압도, 그 둘 중 어느 영역에 존재할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힌 나는 넋을 잃은 채 위대한 자연이 빚어낸 신비를 우러러보았다.
“이 고목은 오래전, 드라이어드께서 직접 심어 돌보셨던 생명이오. 건국 직후부터 우리는 언제나 유물을 이 고목에게 맡겨 수호하도록 했지.”
오랜 세월이 아로새겨진 고목의 껍질 위로 알키페가 손을 가져다 대자, 다시금 그녀의 손등에 초록빛 문양이 나타나 환시처럼 빛을 발했다.
나무의 외피가 갈라져 타원형의 빈 공간을 이루었고.
깊은 어둠 속에서 고고히 빛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게, 바로…….”
유프스 백작이 내게 설명했던 그대로.
찬란한 색채로 물든 광휘가 서린, 씨앗의 형태를 취한 숲의 유물.
필생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숲의 유물의 곁에 오롯이 존재하는 것은…….
눈이 부시도록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크리스털.
찬연한 푸름을 머금은 아쿠아마린이 곳곳에 박혀, 그 어떤 군주의 관도 흉내 낼 수 없을 신비롭고도 고귀한 기류가 흐르는 왕관.
바로 이곳까지 향하는 시간 동안 내가 애타게 그려 왔던 물의 유물, 정령왕의 관이었다.
“정령왕의 관은 본래 물의 정령왕이 사용하던 왕관이었다고 전해지지.”
바로 나이아드의 진정한 왕관이었다.
그와 처음으로 마주했던 순간, 그의 짙푸른 머리칼 위로 드리웠던 산호초를 바라보며 마치 왕관 같다고 여기었는데…….
탄생 직후부터 사용했을 왕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사랑한 정령사에게 내어주었다니.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나이아드의 지극한 사랑에 경이로운 감회가 밀려들었다.
“자, 두 나라의 유물은 이로써 무사하오.”
놀라움도 잠시.
“……그렇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고뇌에 잠겼다.
먼 미래에는 결국 두 유물 모두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아무리 드라이어드 왕가의 성소에 봉안되어 있더라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재앙의 개시가 시작되면서, 드라이어드 왕국 또한 멸망을 맞이할 테니…….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 두 유물을 성소에서 빼내어.
왕가에서 수호하는 숲보다도 안전한 곳을 찾아 보호할 수 있을까?
“……직접 보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이만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 저 유물들을 이곳에 보관해서는 안 된다며,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면…….
보나 마나 미친 소리로 취급받고 말 것이 분명하니.
“하…….”
대체 어떤 방식으로 국왕을 설득해서 유물들을 이곳에서 빼내고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을까?
우선은 안전히 보관할 장소부터 찾아보는 게 나은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알키페와 함께 왕가의 숲을 빠져나갔다.
쿠구구궁-
그녀가 왕가의 숲으로 향하는 통로를 닫던 순간.
“전하, 로제!”
마치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창백한 안색을 한 레제크가 달려와.
“니샤의 왕제, 칼리드 일카이가…….”
잇새를 악물며 거칠게 씹어뱉듯 말했다.
“왕궁에 당도하여 전하께 알현을 청한다고 합니다.”
“……무어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스스로를 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말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검은 밤에 물든 사위,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차갑게 식은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돌려주었던 답이 더없이 소름 끼치는 감정을 동반하여 생생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