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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5)화 (106/141)

<105화>

“…….”

나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그러쥐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뒤를 밟았구나.

“니샤의 왕제가, 알현을 원한다고…….”

알키페 또한 낯빛을 무겁게 굳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단은 응해야겠지.”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며 레제크를 향해 당부했다.

“공녀들을 데리고, 처소 바깥으로 나오지 말고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전하.”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응시하며 자책했다.

분명히 나의 뒤를 밟았을 것이다.

내가 그날, 그 배에 탑승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왕가의 숲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굳게 닫혀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생각해 내야 한다.

두 개의 유물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방도를.

* * *

알키페 드라이어드는 몸이 떨려오는 동요를 누르며 의연한 기색으로 왕좌에 자리했다.

곧 경박하지도 않으나, 쓸데없는 무게감도 서리지 않은 가붓한 기척과 함께.

밤 그 자체를 녹여 낸 듯 아름다운 젊은 왕제가 모습을 드러내 하얀 회안에 알키페를 비추었다.

“드라이어스의 국왕을 배알하나이다.”

그가 한 손을 가슴 위로 올려 깊이 묵례하여 타국의 왕을 향한 예를 취했다.

고요하나, 더없이 섬뜩한 긴장감을 담은 기류가 알현실을 흘렀다.

“일카이의 왕제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군.”

알키페는 평온한 어투로 타국의 왕제를 향해 첫말을 읊었다.

“이토록 급작스레 드라이어스에 방문한 이유가 무엇인가?”

속에서 들끓는 모든 적의를 억누른 채 그녀가 건넨 물음에, 칼리드 일카이는 고요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희의 목적을 이미 짐작하고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역시나.

알키페는 순간 이를 악물었고,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짐작이라. 미안하네만 과인은 일카이의 왕제만큼 영명하지 못하여, 그대가 뜻하고자 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물음에 대한 답을 넘겼다.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를 보호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리드는 기색에 한 점의 변화도 없이 자신의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그 무슨 망언인가, 일카이의 왕제여?”

알키페는 표정을 무섭도록 굳히며 짙은 분노 서린 목소리로 매섭게 내뱉었다.

“근거 없는 추론을 그토록 당당하게 내뱉으며 감히 일국의 왕을 추궁하는 것인가? 니샤 왕국보다 그 세가 약하다고 하나, 드라이어스 왕국은 엄연히 자주적인 통치권 아래 놓인 나라다. 내가 그대의 물음에 일일이 대꾸해 줄 필요는 없거니와, 하물며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계자를 왜 그라시아 왕궁에서 찾으려 드는지……!”

“고루한 언쟁을 주고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드라이어스의 국왕이시어.”

진노한 목소리를 끊으며, 칼리드가 침착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안?”

알키페는 왕좌의 팔걸이를 손아귀로 억세게 틀어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당한 대가가 오가는, 서로에게 하나 해 될 것이 없는…… 일종의 거래이지요.”

거래.

“……무엇을 대가로, 무슨 거래를 하고자 함이지?”

엄습하는 불안감에 알키페가 물음을 던지자 칼리드는 그녀의 시선을 직시하며 답했다.

“여전히 제 속내를 떠보려 하시는군요. 거래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드라이어스 왕국을 영구히 침공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대가로 드리며, 제가 원하는 것을 받아 가고자 함이지요.”

“무어라?”

알키페는 귀를 의심하며 인상을 찡그리고 되물었다.

“……영구히, 드라이어스를 침공하지 않겠다?”

“예. 니샤의 군권을 통솔하는 일카이의 왕제로서 드라이어스의 국왕께 맹세하나이다.”

알키페는 도저히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니샤가 어떤 나라이던가.

저들에게 신의라는 가치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던 것.

속을 들여다볼 수 없이 교활하고 잔악하여, 건국 이래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진 역사를 지닌 이민족일 뿐이었거늘…….

알키페가 그의 의중을 추론하며 불안을 품던 그 순간이었다.

“하니 제가 약조하는 대가를 받으시고……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의 신변과.”

“……!”

“봉안해 두셨을 물의 유물을 양도해 주십시오.”

지독히도 평온한 목소리로, 칼리드 일카이가 거래의 대가를 청구했다.

아, 그래.

알키페는 낯빛을 굳히며 시리도록 차가운 시선으로 칼리드를 내려다보았다.

너희 니샤의 왕족들이 저열함을 저버릴 리가 없겠지.

“내가, 제안에 응하지 않겠다면?”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알키페는 나직이 깔린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그리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드라이어스를 침공할 것인가?”

증오와 경멸이 뒤섞인 물음이 그 뒤를 이었다.

“……당장은 어렵겠지요.”

일카이의 왕제는 여전히 동요 없이 평온한 기색으로 답했다.

“그러나 언제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공허하게 빛을 발하는 회안에 알키페를 가둔 채.

“저희는 저희의 목표를 수행할 것입니다.”

잠잠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목표, 라.”

알키페 드라이어드는 날 선 비소를 터뜨렸다.

지친 듯, 진저리가 난 듯.

왕좌에 몸을 기댄 채, 뒤틀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내며.

“참으로 대단해, 잔악하고도 탐욕스럽기가 이제는 감탄스러울 지경이야. ……이 내가, 선조께서 물려주신 나라를 그토록 쉽게 짓밟히도록 둘 것 같은가!”

나직이 읊조리던 목소리는 곧 노호로 끝맺어져 드넓은 알현실에 메아리쳤다.

그토록 진노한 국왕의 시선을 마주하며, 칼리드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두 눈으로 보시지 않았습니까. 하카드엘라 공국이 어찌하여 그토록 허무하게 멸망하였는지.”

“……!”

그리고 야속하리만치 정중한 어투로 비극을 이야기했다.

“바로 그 나라의 백성이 먼저 자신의 나라를 저버렸기에 그리되었던 것이었지요.”

영롱한 녹음이 서린 안광에 거센 파문이 일었다.

“드라이어스 왕국의 민심 또한 서서히 요동치고 있는 바.”

알키페 드라이어드의 동요를 주시하며, 칼리드는 여전히 존중 어린 태도로 인사를 올린 뒤.

“오늘은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드라이어스의 국왕이시어, 부디 현명한 선택을 내리시기를.”

그리하여 니샤의 왕제가 떠난 알현실.

홀로 남은 알키페의 낯빛은 극심한 혼란이 드리워져 무겁게 경직되어 있었다.

* * *

“드라이어스의 국왕께선…… 평소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이셨나요?”

알키페의 부름이 떨어졌다.

칼리드 일카이 왕제가 돌아갔으니, 레제크와 함께 알현실로 오라고.

그리하여 마리에를 남겨 두고 그와 함께 왕궁을 거닐던 중, 나는 불안 반 호기심 반으로 레제크에게 물어보았다.

칼리드 일카이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녀에게 건네었을지 모르니까.

국왕이 배신할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예와 신의를 중요히 여기시니, 결코 거짓으로 상대를 속이거나 배신을 저지를 성정은 아니십니다.”

“그런가요…….”

레제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대꾸했다.

그는 현 국왕과 피가 섞인 가족이니……. 그 성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나는 레제크의 확언에 조금이나마 안도하며 묵묵히 알현실로 향했다.

* * *

“왔느냐, 레제크. 공녀 또한 오셨소.”

아니나 다를까, 깊은 수심이 어린 기색으로 왕좌에 자리한 알키페가 우리를 맞이했다.

“……니샤의 왕제가 무슨 말을 지껄이던지요.”

레제크는 경어조차 사용하지 않은 채 칼리드 일카이를 칭하며 적의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

잠시간 침묵하던 알키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드라이어스의 평화를 영구히 위협하지 않겠다는 대가로…… 로제 하카드엘라 공녀와 물의 유물을 내어놓으라고 제안하더군.”

“……!”

역시나,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지독한 불안에 잠겨 드라이어드의 국왕을 응시했다.

……알키페 드라이어드, 당신은 어떤 결단을 내릴 거지?

“……그렇습니까.”

한편, 레제크는 몸속을 흐르는 피조차 얼어붙을 듯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떠한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까.”

“……레제크.”

알키페가 복잡한 기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레제크는 멈추지 않은 채.

“저 또한 드라이어드 왕가의 일원입니다. 하나 저열하기 그지없는 적국과의 거래로 오랜 동맹국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 내어 얻는 평화라면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배반에 불과하니, 마땅히 거부할 것입니다!”

차가운 분노, 결코 꺾이지 않을 증오를 드러내며 외쳤다.

“…….”

알키페는 곤혹스러운 듯 두 눈을 내리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격렬한 언쟁이 오가는 와중, 나는 망연히 생각에 잠겼다.

‘정령왕이 인세에 개입하는 것은 고대 이후로 철저히 금지된 영역……. 하니 우리의 희망은 나이아드께서 하사하신 물의 유물을 끝까지 보호하는 것뿐이야.’

로제의 기억 속에서 정령왕은 인세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러니, 설사 다른 정령사의 도움을 받아 나이아드를 소환하더라도 그에게서 조력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정말로 숲의 유물과 물의 유물,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전하,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니샤 왕국이 침략하지 않겠다 약조한들 훗날 닥칠 재앙의 개시로 인해 드라이어스 왕국 또한 멸망하고 만다.

차악을 선택해 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결론은 단 하나, 칼리드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직 파괴되지 않은 두 개의 유물을 모두 지켜 내야만 한다.

“……근원의 주인, 숲의 정령왕이라면.”

그 순간, 하나의 방도가 뇌리를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고.

“……공녀?”

사람이 한계의 한계까지 내몰리면 제정신인 상태로는 감히 떠올릴 수 없을 미친 생각에 사로잡히곤 하지.

“드라이어스의 국왕이시어, 숲의 정령왕을 소환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나는 필사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채, 알키페를 향해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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