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 무슨, 설마 정령왕께 도움을 청하고자 함이오?”
나의 청이 당황스러운 듯, 알키페가 머뭇거리며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공녀, 그대의 모국이 멸망하였듯이 그와 같은 시도는 소용없는 일에 불과…….”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러합니다. 하니 부탁드립니다, 전하.”
강고한 어조로 내뱉은 부탁에 알키페는 고민에 잠긴 듯했다.
“……알겠소. 왕가의 숲에서 그분을 소환하도록 하지.”
그러나 끝내 승낙하며 왕좌에서 일어섰다.
“로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곁에서 레제크가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무슨 수라도 써 봐야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나는 레제크에게 짧게 대꾸한 후 알키페의 뒤를 따라 다시금 왕가의 숲으로 향했다.
* * *
“그대, 멸하지 않는 생명의 자식들이여. 그대가 불멸의 마음으로 축복한 이의 부름에 답하여라. [드라이어드].”
은은한 바람결만이 불어오는 고요한 사위.
오래전, 숲의 정령왕이 직접 피워 내 보살폈던 고목의 아래에 멈추어 선 알키페가 소환의 주문을 읊조렸다.
“-!”
진득하고, 씁쓸하며.
동시에 코끝을 톡 쏘는 듯 강렬한 꽃향기가 공기 중으로 흐르는 듯했고.
화아아악-
곧이어 소용돌이치는 바람결에 머리칼이 비산하듯 흩날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파동은 가라앉았으나,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향은 한층 정제되어 은은히 공기를 맴돌았다.
[무슨 용무로 나를 소환하였니? 알키페.]
“드라이어드 님.”
더없이 고혹적이면서도 넘쳐흐르는 활기로 명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려 눈앞의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나이아드, 일리피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인간 여인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으나…….
옅은 갈색을 띤 피부.
푸른색, 분홍색, 노란색, 다채로운 색채로 물든 꽃을 엮은 관을 머리 위에 올린 그는 금빛을 띤 날카로운 세로 동공을 좁히며 알키페 드라이어드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고 순결한 꽃 그 자체를 입은 듯 우아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흘러내리는 옷자락 너머 물결치는 머리카락은 짙은 녹색의 가시 돋친 덩굴로 이루어져 있었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응시하듯 아름답고 상냥한 눈빛으로 자신이 축복한 나라의 군주를 응시하던 드라이어드가 곧 나를 돌아보았다.
그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고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녔던 나이아드와 상반되는, 강렬히 박동하는 야성과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이 그 주위로 넘쳐흘렀다.
[너는…….]
한동안 나를 살피던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는 곧 가벼운 탄성과 함께 입을 열어 외쳤다.
[하카드엘라의 후예잖아?]
놀란 기색을 확연히 내비치며, 드라이어드는 알키페를 홱 돌아보았다.
[하카드엘라의 아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니? 게다가 이 기운은…… 정령왕의 관이잖아? 맙소사, 나이아드의 일부를 왜 나의 아이가 품고 있는 거야?]
새가 지저귀듯 물음을 쏟아 내던 드라이어드는 ‘아이’라고 칭한, 거대한 고목을 손으로 가리키며 더욱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그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이때껏 내가 마주했던 여타의 정령왕들과는 달리…… 마치 인간처럼 생동감 있고, 더없이 친근히 여겨지는 그의 특이한 성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라이어드 님. 일이 이렇게 된 연유는…… 얼마 전, 하카드엘라 공국이 멸망한 사실은 드라이어드 님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 그래. 그랬지.]
넘쳐흐르는 호기심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라이어드는 알키페의 답에 멈칫, 행동을 멈추며.
서서히 그 낯빛을 굳히고 침묵에 잠겼다.
“하카드엘라의 공녀들은 물의 유물이 니샤 왕국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 드라이어스로 와 유물의 보호를 부탁했으며…… 저는 그를 승낙하여 필생의 근원과 함께 봉안하였나이다.”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잘했어, 알키페.]
가라앉은 어조로 그렇게 읊조리던 드라이어드는, 깊은 연민이 서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카드엘라의 아이야, 네 이름이 무엇이니?]
“……로제 하카드엘라입니다.”
죽음의 정령왕은 관할하는 권역이 죽음이기에 이상을 알아챘던 것이었을까.
나는 살짝 긴장한 채 그에게 대답하며 생각했다.
사실 나는 이 육신의 본래 주인이 아니고, 로제 하카드엘라는 원래대로였다면 이미 죽었어야 했을 운명인데…….
[로제. 로제라. 그렇구나. 가엾은 것, 그간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기에, 이토록 야위었을까?]
드라이어드는 한 치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한 듯 나를 다정한 눈길로 살피며 그리 이야기했다.
아무튼, 내게 호의적인 듯해 다행이었다.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기에는 조금 꺼려지니…….
“저, 드라이어드 님. 혹시 물의 정령왕께서 지금 어찌 지내고 계신지 답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우선 나이아드의 행방부터 물어보자.
아무리 정령왕이 인세에 개입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니샤 왕국의 침략 아래 그가 사랑했던 나라가 멸망한 지금.
그가, 대체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
그 순간, 드라이어드의 안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으며.
[그것을 묻는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이는 정령왕의 영역.]
강렬히 맥동하는 활기, 상냥함이 깃들어 있던 이전과는 상반된 굳은 어조로 답했다.
[인간에게 답할 의무는 없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다정하고도 친근한 태도였는데…….
나이아드의 행방을 묻자마자 이토록 가라앉은 반응을 보이다니.
뜻밖의 상황에, 나는 살짝 망설였지만.
“……그렇군요.”
물러날 수는 없었다.
“국왕 전하께 드라이어드 님의 소환을 청한 이는 저입니다.”
[그렇구나. 어째서 나를 만나고자 했니?]
드라이어드가 약간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현재 니샤 왕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저와 물의 유물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드라이어드 님께서도 분명 알고 계시겠지요.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의 유물을 완전히 망가뜨려 하카드엘라 공국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것임을.”
사실은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의 뜻 아래 그를 봉인할 수 있는 조각 중 하나를 망가뜨리고자 함이지만…….
이러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모로 보나 부자연스러우니.
나는 말을 마치고 내렸던 고개를 들어 드라이어드의 시선을 마주했다.
[…….]
그 또한 점점 세상에 드리우고 있는 암운을 직감하는 듯, 짙은 근심의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니 감히 말씀드립니다. 정령왕의 유물을 저들에게서 온전히 보호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는 본론을 읊었다.
“유물을, 인간의 육신에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뭐?]
“공녀, 그 무슨……!”
내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알키페와 드라이어드의 안색이 일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잠시만. ……정령왕의 유물을, 인간의 몸에 넣겠다고?]
드라이어드는 자신이 대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믿기지 않는 듯, 괴악한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그래, 나도 안다.
정신 나간 생각인 거.
하지만.
“작금 처한 위기를 고려해 주십시오. 지금은 물의 유물이나, 그다음은 반드시 숲의 유물일 것입니다. 두 유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들의 허를 찌르는 수를 고려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설득하며 말을 이었다.
“니샤의 일족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악한지는 오랜 역사가 증명해 왔지요. 하니 아무리 유물을 온전히 보존하려 한들…… 평범한 방도로는 끝내 지켜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숲의 정령왕이시여, 정령왕의 유물을 인간의 육신에 녹여 낼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방도를 떠올릴 수 있던 것은, 내가 바로 대정령사라는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령왕의 근원 일부를 영혼에 담고 태어난 존재.
그러한 처사가 가능하다는 건, 평범한 인간의 영혼은 버거울 수도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근원을 품어 낼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잖아.
메카일라가 해 주었던 이야기에 따르면 정령왕들 또한 이미 재앙이 도래할 미래를 예지하고 있을 테니.
대정령사라는 존재를 창조하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었을 테고.
드라이어드 또한 어느 정도 수월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과연 처음 들어보는 경악스러운 발상이구나. 정령왕의 근원 일부를 품은 유물을,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야?]
예상 밖으로, 드라이어드는 고개를 내저으며 강경한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그 아무리 강대한 정령사라 해도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이는 유물이 창조된 이래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네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포기해.]
“그건…….”
나는 그의 완강한 반대를 마주하고 당황에 잠겼다.
어째서?
대정령사가 될 운명을 짊어진 영혼은 평범한 정령사의 영혼과는 어딘가 다른 존재인가?
……하지만, 다른 방도는 없어.
“어디에 숨겨 놓아도 온전할 것이라 믿을 수 없으니, 나 자신의 육신에 숨겨 놓아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나는 끝내 물러서지 않고 주장했다.
“설사 내 숨이 끊어지더라도, 육신과 영혼에 녹아든 유물을 앗아 가지도, 파멸시킬 수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