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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7)화 (108/141)

<107화>

[정말,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드라이어드는 창백한 기색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마치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러나, 그 또한 작금 상황의 심각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드라이어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이며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드라이어드 님…….”

알키페는 두려움에 찬 기색으로 숲의 정령왕을 불렀다.

[알키페.]

마침내 드라이어드가 침묵을 깨고 알키페를 돌아보았다.

[하카드엘라의 후예가 한 말을 들었겠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온 근원의 조각은 현재까지 유물 속에 보관된 채 너희의 시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어.]

숲의 정령왕은 자신이 축복한 나라의 군주를 내려다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 한 번도, 인간의 육신에 유물을 융화시키는 일은 시도조차 행해진 적이 없었지.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혹여 모를 부작용을 두려워하며 어떠한 일도 행하지 않기엔…… 너무나 급박해.]

그 순간, 선연한 녹음이 허공에 흩날렸고.

[하카드엘라의 후예야.]

숲의 정령왕이 그 날카로운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음을 던졌다.

[너는 진정으로 네 육신에 유물이 품은 정령왕의 근원을 담아낼 수 있겠니?]

“그것은…….”

[가능과 불가능의 여부가 아닌, 너의 의지를 묻는 거야.]

입을 달싹이며 어렵게 말을 꺼냈으나, 드라이어드의 강고한 어조에 말문이 막혔다.

생동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숲의 정령왕은 지금 이 순간 더없이 진지한 기색으로 나의 의지를 확답받고자 했다.

그래서 더더욱 답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

이 육신이 나의 것이라면, 망설임 없이 그리하겠노라 답하였겠지만.

나는 물의 유물을 로제의 육신에 품을 생각이 없었다.

“숲의 정령왕께서 제 청을 들어주셨으니, 제 계획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로제는 이미 죽었다.

죽은 자의 육신에 유물을 보관해 둘 수는 없는 일.

또한 나는 다른 유물의 잔해를 추적해야 하는 입장이니, 더더욱 물의 유물이라는 중한 가치를 품고 몸을 사릴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해결할 길 보이지 않는 죄책감을 그러안은 채.

“저는 미끼가 되고자 합니다. 제가 물의 유물을 지닌 채 멀리 달아났다고, 니샤에서 그리 착각하여 저의 뒤를 쫓도록.”

[그럼…….]

“언니 된 자로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저 또한 괴롭습니다. 하나, 가장 안전한 선택은……. 제가 아닌 마리에의 육신에 물의 유물을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마리에에게 넘겨야만 했다.

정녕 다른 수가 없을까.

수없이 고민했으나 방계에 속하는 레제크보다는 직계인 마리에가 조금이나마 물의 유물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레제크와 마리에, 두 사람 중 누가 나의 외할머니 아타라 하카드엘라의 부모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이 선택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몰고 올 것인지, 벗어날 길 없는 두려움이 나를 잠식했지만.

“그러니 숲의 정령왕이시여, 제가 마리에를 설득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사명만을 생각해야 한다.

아르카네의 손에 파괴된 유물들의 잔해를 찾아낼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못한 상황에서, 아직 온전한 숲의 유물과, 물의 유물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야 해.

[……그래. 다녀오렴. 알키페, 너도 마음을 정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드라이어드의 나직한 답에 알키페의 낯빛이 짙은 고뇌의 그림자로 물들었다.

[단, 물의 유물을 인간의 육신에 담아내는 시도를 먼저 감행할 거야. ……아무리 유물을 보호하는 것이 중하다 한들, 나의 아이들을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예, 따르겠습니다.”

드라이어드의 마음을 돌린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는 굳은 어조로 대꾸한 뒤 서둘러 왕가의 성소를 빠져나갔다.

* * *

“언니, 대체 무슨 일이야? 레제크 오라버니에게 몇 번을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고, 나만 빼놓고……. 그런데, 안색이 왜 그래?”

마리에의 처소로 들어서자마자, 연갈색 고수머리를 휘날리며 마치 작은 다람쥐처럼 후다닥 달려온 소녀가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러다, 소녀는 나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듯 멍하니 물었다.

“……마리에, 너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며 침묵하다, 끝내 말했다.

“니샤 왕국에서는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물의 유물을 온전히 파멸시키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카드엘라 공국의 모든 것을 짓밟아 없애 버린 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드라이어스 왕국이 될 테고.”

나의 이야기를 듣던 마리에의 안색이 더없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돼? 어디를 도망쳐도, 그자들이 끝까지 쫓아온다면…….”

“그래서, 내가 방도를 찾았어.”

힘겹게 꺼낸 대답에 마리에가 환히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 다행이다! 역시 언니야, 무슨 방도인데?”

“……물의 유물과 숲의 유물, 그것들이 품은 정령왕의 근원 조각을, 인간의 육신에 녹여 내는 것.”

찬연한 은빛 눈망울이 일순간 망연해졌다.

“……뭐? 아니, 잠시만. 유물을…… 그 안의 근원을, 인간의 육신에 녹여 낸다니? 언니, 그게 무슨…….”

“마리에,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야. 만약 유물이 육신에 완벽히 동화된다면, 설사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해도 유물을 파멸시킬 수는 없게 되겠지. 나 자신, 그 자체로서 정령왕의 유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니까.”

마리에는 멍하니 나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화들짝 몸을 떨며 내 두 손을 쥐었다.

“언니, 설마……. 그 위험한 시도를, 언니 몸에 할 생각은 아니지? 응?”

“……마리에. 나는…… 너에게, 유물을 맡기고 싶어.”

두려움과 염려가 뒤섞여 하얗게 질렸던 마리에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나는 죄책감에 잠겨 마리에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전에 그러했듯, 나는 미끼가 될 생각이야. 저들 또한 공국의 후계자를 더욱 주시하며 뒤를 쫓을 테고. 너는 유물을 네 육신에 품고 레제크 오라버니와 함께, 안전한 장소에 숨어 있으면…….”

만약, 마리에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토록 괴로운 심경으로, 위험한 선택을 거부하는 마리에에게 네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 뜻에 따르라, 강요한다면…….

내가 가장 경멸하던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사명만이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잔인한 위선자가 되고 마는 거야…….

“내가 할게, 언니.”

혼란에 잠겨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던 그 순간이었다.

“뭐……?”

너무나 확고한 어조로 울려 퍼진 목소리에, 나는 망연히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리에가 웃고 있었다.

더없이 기쁘다는 듯, 가장 티 없이 맑고도 강인한 미소를 여린 낯 위로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언니의 짐을 내가 덜어 줄 수 있게 되었어.”

마리에는 나직이 읊조리며 맞잡은 손을 힘주어 쥐었다.

“기뻐, 언니. 이때까지……. 늘, 혼자서 모든 일을 짊어지려 했잖아. 그런데 처음으로, 내게 도움을 청해 주는구나.”

“마리에…….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그 앞에서, 결국 무너지는 표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아.”

엉망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건넨 물음에, 앳된 소녀는 그보다 더 다정할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분명, 내게 부탁하는 언니의 마음이 나보다 훨씬 많이 상처 입었을 테니까.”

잠잠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결국, 언니의 부탁에 자기 자신조차 이토록 흔쾌히 내맡기는 소녀의 발치로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눈물을 떨구었다.

마리에는 그런 나와 함께 주저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다독여 줄 뿐이었다.

* * *

[알키페, 정녕 네가 필생의 근원을 품을 거니?]

예상치 못했다는 듯, 드라이어드가 알키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국왕이고, 너 말고도 방계 왕족은 꽤 있으니 다른 이를 추천할 줄 알았는데…….]

“국왕 된 자로서 어찌 위험을 다른 이에게 떠넘길 수 있겠습니까.”

알키페는 결연한 목소리로 답하며, 서로 손을 붙든 마리에와 나를 돌아보았다.

“……예로부터 하카드엘라와 드라이어드는 자매의 연을 맺고 서로의 고락을 함께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니, 대의를 위해 제 한 몸을 바치는 어린 공녀와 위험을 동행하고자 합니다.”

그가 대단한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드라이어스의 국왕을 향해 경의를 품으며 깊이 묵례했다.

[그래, 나이아드와 나는 대등한 정령왕. 물은 나의 권속이 아니라 하지만, 같은 정령왕의 근원 조각을 품고 있으니 그 정도쯤은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지.]

그리하여, 나의 절박함으로 비롯된 위험한 결단이.

[가까이 오렴, 하카드엘라의 후예야. 너에게 먼저 유물의 근원을 내어줄 테니.]

지금 이 순간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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