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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8)화 (109/141)

<108화>

오래전,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자신이 축복한 정령사에게 내려 주었던 유물이 드라이어드의 손아귀 위로 떠올라 신성한 광채를 발했다.

아름다웠던 왕관의 형상이 마치 푸른 꽃비가 내리듯 서서히 흩날렸다.

그리고 숲의 정령왕의 손 위에는 오직 정결히 빛나는 원형의 구체만이 남겨졌다.

[나이아드의 근원 조각이야. 자, 이리 가까이 오렴.]

마리에는 긴장이 역력한 기색으로 드라이어드를 향해 걸어갔다.

[두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먹어야 해. ……가장 안정적인 상태일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드라이어드는 마리에의 심장 부근으로 나이아드의 근원 조각을 가까이 가져가며 나직이 읊조렸다.

[나이아드의 일부여, 그대가 가장 사랑했던 정령사의 후예에게 그대의 근원을 맡기고자 한다. 하니 그대, 이 아이에게 오직 영광과…… 무한한 생명만을 내리기를.]

그의 말이 끝맺어진 순간이었다.

사아아아-

“……!”

나이아드의 근원 조각이, 불현듯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놀라움 반, 두려움 반에 휩싸여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떨리는 숨결을 내뱉었다.

손가락 사이로 언뜻 보여 오는 광경은 시리도록 밝은 푸르름을 마주하며 비산하듯 흩날리는 연갈색 머리카락뿐이었다.

“아…….”

탄식일까, 고통에 찬 신음일까.

가녀린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마리에!”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광휘가 사라지며.

온전히 드러나 보인 광경 속, 가슴께를 부여잡고 주저앉은 마리에를 발견하고 나는 황급히 달려가 그 곁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 설마…… 부작용이.”

“아니……. 언니, 나는 괜찮아.”

마리에가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제 육신에 들어온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권능을 향한 경외의 기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일단은 성공적으로 동화했어. 근원이 저 아이의 육신에 온전히 녹아들었으니까.]

드라이어드가 마리에를 유심히 살피다 희색이 만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렇습니까.”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로소 안도했다.

“언니, 나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저…… 몸속을 흐르는 피가 이토록 세찼던지, 이렇게나 차갑고도 강렬했던지…… 영 어색해서 그랬어.”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바로 이야기해야 해. 알겠지?”

“응, 언니.”

마리에는 밝게 웃으며 내게 대답했다.

[그래, 약속대로 하카드엘라의 후예가 먼저 물의 유물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나의 차례겠지.]

드라이어드는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며 담담한 듯, 혹은 후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드라이어드 님.”

알키페 또한 결연한 기색으로 드라이어드를 향해 다가섰다.

[……애초부터, 나의 근원을 받아들일 인간이 존재한다면 오직 너희 일족뿐이었을 테지.]

숲의 정령왕은 잔잔한 미소 띤 낯으로 자신이 축복한 왕국의 군주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나의 근원을 공유하게 될 너희에게, 오직 영원한 축복만이 깃들기를.]

* * *

드라이어스의 국왕이 먼저 만남을 청해 왔다.

사흘이라.

생각보다 이른 시일이었다.

칼리드는 따라나서려는 부관을 제지하고 홀로 왕궁의 알현실에 들어섰다.

“며칠 만에 보는군, 일카이의 왕제여.”

“드라이어스의 국왕을 배알하나이다.”

그는 과연 어떤 답을 내어놓을까?

칼리드는 생각에 잠긴 고요한 시선으로 우미한 여인의 낯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제안한 거래의 내용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았어.”

어딘가, 다르다.

칼리드는 언뜻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눈매를 좁히며 생각했다.

분명 사흘 전만 해도 애써 평온을 가장하였으나, 숨길 수 없는 불안과 증오가 그녀의 안색에서 드러나 보였건만.

“하지만 어찌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더군.”

마치 우위를 선점한 듯.

묘하게 여유로워, 이는 나의 과한 생각일 수도 있으나…….

언뜻 조소의 기색마저 엿보이지 않는가.

“그러십니까. 답을 들려주십시오.”

어째서지?

사흘이라는 시일 동안 저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칼리드는 동요를 억누르고 국왕의 답을 기다렸다.

“거래를 거절하겠네. 과인은 하카드엘라의 공녀도, 물의 유물도. 무엇 하나 그대들에게 내어주지 않을 거야.”

“……그 말씀의 뜻은.”

이리되길 바라지 않았으나, 결국.

칼리드는 조용히 턱을 악물며 감정을 삭이고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양국 간 불가침에 대한 약조를 거부하시겠다는 것이로군요.”

“그러하네. 그따위 치욕스러운 평화 따위, 드라이어스에겐 필요하지 않아.”

드라이어스의 국왕, 알키페 드라이어드는 더없이 오연한 태도로 대꾸하며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제안에 대한 답은 충분히 내어준 것 같군.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시게.”

“필히 분란을 만드셔야 성미가 풀리시겠습니까?”

그 순간, 억눌린 음성으로 들려온 물음에 돌아서던 알키페의 걸음이 멎었다.

“……무슨 뜻이지?”

젊은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틀며 물음을 던졌다.

“정녕 니샤를 상대로 드라이어스 왕국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미 예견된 패배와 멸망의 길을, 어째서 고집하시려는 겁니까. 진정 백성과 나라의 평화를 고려한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을……. 드라이어스의 국왕이여, 당신은 진정으로 어리석습니다.”

칼리드는 냉혹히 얼어붙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

그러자, 알키페 드라이어드가 진정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니샤의 젊은 왕족이여.”

그녀는 더없이 우스운 존재를 응시하듯, 비소가 낭자한 눈길로 칼리드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드라이어스를 멸망시키고, 숲의 유물을 갈취하기 전에 물의 유물부터 그 손에 넣어야 최소한의 손해는 보지 않을 터. 하나 이를 어찌하나, 물의 유물은 영영 그대들이 얻을 수 없을 터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칼리드는 그 낯빛을 무섭도록 굳히며 물었다.

“하카드엘라의 첫째 공녀가 묘수를 내었지. 정령왕의 유물은 그저 껍데기일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유물이 품은 정령왕의 근원 조각이지 않은가? 하니 근원의 조각을 인간의 육신에 완전히 동화시킨다면, 설사 그 인간을 죽이더라도 정령왕의 근원을 무슨 수로 분리시키겠나. 하니 이 방도를 이용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

“말도 안 돼……. 그런 시도가, 성공할 리…….”

칼리드는 경악에 사로잡혀 황망히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숲의 정령왕께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셨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네. 완벽하게.”

알키페는 그의 혼란에 쐐기를 박았다.

“물의 유물도, 숲의 유물도 이 나를 비롯한 공녀의 육신에 온전히 동화되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충격에 망연해진 칼리드 일카이를 내려다보며, 알키페가 웃었다.

“하니 숲의 유물을 앗아 가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게나. 하나 이 육신에 근원의 조각이 완전히 녹아들었으니, 설사 내 목숨을 빼앗더라도…….”

광기에 가까이 느껴지는 미소를 짙게 머금은 채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너희는 결코, 너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웃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러이 물들이며, 혼란을 가져와 그의 뇌리를 잠식했다.

“안 돼……. 이건.”

모든 예상을 빗나간 최초의 이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혀 창백히 질린 낯으로 알키페를 응시하던 칼리드 일카이는 결국 도망치듯 알현실을 뛰쳐나갔다.

“……전하? 어찌 이리 다급히…….”

“로제 하카드엘라와 마리에 하카드엘라, 둘 중 하나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미칠 듯한 초조함에 집어삼켜져, 당혹스러운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관을 향해 명했다.

“분명 한 사람은 반드시 그라시아 왕궁을 빠져나갔을 것이니…….”

언제나 공허함으로 물들었던 회안이, 지금 이 순간.

더없이 맹렬한 의지를 품고 빛을 발했다.

* * *

“후…….”

드라이어스 왕국의 국경선.

나는 끝없이 이어진 능선을 내려다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사흘 전, 마리에가 물의 유물을 육신에 동화시킨 뒤.

나는 지체없이 그라시아 왕궁을 떠나 드라이어스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홀로 왕궁을 나서기 직전까지 나를 염려하며 막아서던 이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로제, 진정 홀로 떠나셔야 합니까?’

레제크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나를 붙잡으며, 시선을 떨구고 나직이 말했다.

‘결국 물의 유물을 마리에가 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이 저들의 시선을 돌리며 위험에 처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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