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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09)화 (110/141)

<109화>

비록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지만…….

나는 복잡한 심경을 삼키고 레제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레제크, 저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국왕 전하께서 칼리드 일카이에게 나와 마리에, 둘 중 누가 유물을 품었는지 말씀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하셨으니…… 할 수 있는 한, 저들의 신경을 분산시켜 시간을 끌어야죠.’

‘하지만 당신은 정령을 소환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당신께서 이곳에 남으시고, 제가 떠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에와 함께하는 것처럼 저들의 눈을 속이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은 물의 유물과 숲의 유물만을 지켜 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르카네에게 빼앗겨 망가진 유물들이 남긴 잔해를 찾아내어,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두고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하니 이들은 나의 여정을 함께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과거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고 싶지 않으니까.

‘레제크, 나를 막아서지 마세요. 이제부터 내가 아닌 마리에를 온 힘을 다해 지켜 주세요. 물의 유물을 품은 이상, 이제 마리에가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계자이니.’

‘로제,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계자는 바로 당신…….’

‘레제크.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있지 말아요. 현실을 생각해요.’

어쩌면 두 번 다시는 이들을 마주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니 작별 인사를 대신하여, 나는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당신과 미래를 함께할 사람은 내가 아닌 마리에니까.’

‘로제…….’

더는 시일을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떠나 지금에 이르렀다.

“……잊자.”

나는 붉은 해가 내려앉은 지평선을 응시하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가 문제네.”

유물을 보호하느라 정신을 쏙 빼놓았던 사이, 죽음의 전령은 그새 또 어디를 갔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석양으로 인해 타오르는 불꽃의 색채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간 검은 형체를 찾다, 그만 포기하고 시선을 내렸다.

이미 망가진 유물의 잔해를 대체 어디서, 무슨 방도로 찾아낼 수 있을까.

막막한 앞날을 향한 고민이 나를 집어삼켰으나.

“……두려워할 시간도 없어.”

그럼에도 사명을 이뤄 내야 했기에.

나는 모든 고민을 뒤로하고 걸음을 디뎠다.

과거에 떨어져 헤매듯 시작한 여정의 두 번째 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外. 막간극

아주 흔치 않은 경우로, 죽음의 정령왕에게는 탄생 직후의 기억이 존재했다.

[결국…… 네가 비롯되고 말았구나.]

검고, 검은 눈동자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머금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존재를 자각한 순간 가장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 동공에 비친 형상으로 죽음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여, 미처 가시지 않은 탄생 직후의 생경한 여운에 휩싸인 채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하염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만을 올려다보았다.

[이 무슨 일입니까? 방금 있었던 파동은…….]

그리고 태초의 시절.

아직 냉혹하지도, 뒤틀리지도 않았던.

우주를 감싸는 장대하고도 포근한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어 놀란 기색으로 외쳤다.

[너는…….]

무지했던 어린 죽음은 아직 미의 가치도, 추함의 영역도 알지 못하였으나.

훗날 되새겨 보았을 때 그 순간 처음으로 마주했던 어둠이 더없이 아름다웠노라고 생각했다.

연약한 생명을 마주하는 순간 일말의 자비 없이 공허한 나락으로 추락시키는 그의 눈은 하얗고, 동시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으며.

멍하니 어린 죽음을 내려다보던 어둠의 창백한 낯 위로 곧 찬란한 기쁨이 피어났다.

[바누스, 이 아이를 보십시오.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들뜬 기색을 내비치던 어둠은 죽음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죽음이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 보았던 가장 순수한 애정이었다.

[에시메드.]

회상에 잠겨 있던 그를 현실로 이끈 것은 하얀 서리가 낀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

검은 공허에 창백한 푸름을 떨어뜨려 그려 낸 듯한 모습의 죽음은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을 부른 상대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짙푸른 심해를 담은 안광.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머리칼이 발치까지 흘러내렸고.

여인인지, 사내인지 일순간 구별조차 어려웠으나.

눈앞에 존재함이 환상인 것처럼, 금방이라도 꿈결처럼 바스러질 듯 연약한 눈의 결정을 닮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존재가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얼음의 정령왕, 프린셔였다.

[아니……. 아무것도.]

죽음의 정령왕, 에시메드는 나직이 답하며 심경에 남은 감정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 냈다.

[전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때가 많아 보여.]

프린셔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으로 에시메드를 주시하며 이야기했다.

[별일 아니다.]

에시메드는 딱 잘라 부정했으나, 은연중 프린셔의 기민함을 인정하며 얼음의 벽 너머, 탁 트인 창공을 돌아보았다.

전령이 올 때가 되었건만.

[네가 아니라니 구태여 말을 덧붙이진 않겠어. 하지만 요즘 네가 이상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냉담하고도 미려한 음성이 에시메드의 변화를 지적했다.

심해를 담은 눈동자가 새하얀 장막 너머 일순간 모습을 감추었고.

[너의 ‘형제’가 그 이변을 눈치채지 않게 조심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경각을 요구하는 충고였다.

[그의 성정에 너를 조금이라도 변화하게 만든 존재를 가만히 둘 리 없으니.]

[……새겨듣도록 하지.]

형제.

에시메드는 깊이 침잠한 눈빛으로 그 단어가 지닌 의미를 곱씹으며,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형제라 칭할 수 있는 존재를 떠올렸다.

[에시메드, 너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로서 이 세상에 난 존재란다.]

가끔은 버겁게 느껴질 만치 무한한 애정을 내어주며, 바라는 것은 오직 자신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것이라 이야기하곤 했던 이.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였다.

[그러니 일리피아로 인해 탄생한 저들은 너보다 하등한 존재이지. 동등하게 어울릴 만한 자들이 아니니 헛된 관심은 품지 말 거라.]

그 충고를 듣게 된 시절은 이 우주가 다채로운 빛으로 채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아직 어렸던 에시메드는 그의 뒤를 이어 태어난 빛의 정령왕을 비롯하여 ‘동등한’ 정령왕이라는 존재들에게 자연히 관심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의 어둠은 그런 에시메드를 못마땅하게 여기었고, 그는 어린 죽음을 붙들고 수없이 타일렀다.

그들과 우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니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아르카네는 이 우주에서 에시메드를 가장 사랑해 주는 존재였다.

하니 그의 말은 마땅히 순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에시메드는 아르카네를 제외한 정령왕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왕들 또한 어둠이 지극히 사랑하다 못해 집착하는 죽음의 정령왕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눈앞의 저, 모두가 기피하는 죽음의 정령왕에게 먼저 관심을 표했던 특이한 정령을 제외하면.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에시메드?]

[아무것도 아니다.]

프린셔는 에시메드가 그나마 가깝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령왕이었다.

다행히도 형님께서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기에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 가고 있지만…….

까악-

[……!]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기던 그 순간, 먼 하늘에서부터 전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온 것이다.

자신이 목격한 현세의 일을 전하기 위해.

에시메드는 돌아온 죽음의 권속이 내려앉게끔 손을 뻗었다.

권속은 주인의 시선을 마주하며 자신의 눈에 담은 광경을 바쳤다.

그 모든 장면의 주인공은, 로제 하카드엘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인간의 육신에 들어앉은 정체 모를 영혼이었다.

스스로 이르기를, 지혜의 정령왕이 사명을 맡겼다고 하였나.

‘죽음의 정령왕께서 논하는 생명의 가치에 따르자면, 저는 하찮은 일개 피조물의 영혼에 속하나 다름 아닌 지혜의 정령왕께서 친히 이 여인의 몸으로 보낸 자입니다.’

‘그분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을 따르기 위해 저는 이 여인의 몸에 들어앉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죽음을 다스리는 정령왕이시라 한들, 지혜의 정령왕의 허락도 없이 저의 생명을 함부로 거둬 가셔도 괜찮은 것인지요?’

‘제가 이 육신에 머물러 있는 한, 어디론가 사라진 이 몸의 본래 영혼은 반드시 그 자신의 육신에 이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때 죽음의 정령왕께서 그 영혼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저를 감시하시되 제 사명을 막아서진 마십시오. 당신께서는 죽은 자의 생명만 앗아 가시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신기하리만치 담대하여, 그를 향해 말하는 태도에 거침이 없었던.

특이한 인간.

[…….]

분명 처음의 감상은 그러했다.

모든 순간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아, 더없이 안정적이고도 무료하던 시간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생겨났다고 여기며…… 아주 약간 들떴을 정도.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으나, 지금은.

에시메드는 험한 산비탈을 힘겹게 올라가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나이아드……. 컥, 으윽…….’

생명을 거둬야 할 영혼은 온데간데없고, 신기한 인간과 마주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

그 여인, 로제 하카드엘라의 육신은 낯익은 권능을 품고 있었다.

생명을 갉아먹으며 마나의 흐름을 틀어막아, 어떠한 정령의 소환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어둠의 권능.

대체 어쩌다 저런 것을 인간이 품게 된 것이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었다.

그 여인은 수도 없이 피를 토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정령 소환을 시도했다.

죽음의 정령왕마저 더 이상 바라보기 힘겨울 정도로,

대체 무엇이 그토록 절박하게 내몬 것인지 알 수 없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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