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어째서 저렇게까지 발버둥 치는 거지?
지혜의 정령왕이 내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여기기에는……. 꼭, 그로서는 이유를 알 길 없는 절박함에 매몰된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인간, 생경한 이변.
그로 인해 감시를 두었을 뿐인데…….
에시메드는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전령이 보내온 장면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이 우주의 죽음이었다.
저보다 더 참혹한 광경은 수도 없이 목도했다.
그저 지금과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면, 탄생 이후 에시메드가 마주했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숨이 끊어진 시신의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미약하여, 운명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하찮은 필멸자.
아르카네는 필멸자를 지독히도 혐오했다.
에시메드는 그들을 향해 별다른 사감은 없었으나 저를 사랑해 주는 형제가 배척하는 존재에게 굳이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처음이었다.
생명을 거두어야 할 시신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진정으로 마주한 것은.
시간이 흐르며 전령이 전해 오는 장면 속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이 나타났다.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왕국, 니샤의 왕족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로제 하카드엘라를 뒤쫓는 듯했다.
그들은 모든 반발을 원천에 끊어 내기 위해 어둠의 권능을 이용하여 로제 하카드엘라의 정신을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환각에 사로잡혀 모든 빛을 잃어버린 은빛 눈동자와, 닿을 수 없는 벽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
에시메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저 인간은 로어가 맡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죽은 자의 육신에 들어앉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대로 두면 니샤의 왕족에게 끌려갈 터인데, 그리된다면 본래의 사명을 이뤄 낼 수 있을 리가…….
[……이변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하루라도 빨리 미래에서 왔다는 저 인간의 영혼이 떠나고, 로제 하카드엘라의 영혼을 찾아 본래대로 생명을 앗아 가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그러니 이번 한 번 정도는 도움을 주어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에시메드는 현세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던 자신의 기조를 최초로 어기고, 권속을 향해 저 여인을 도울 이를 찾아내라 명했다.
그리하여 발견한 하카드엘라 일족의 사내가 위험에 처한 로제 하카드엘라를 구해 내었다.
그들은 위협으로부터 무사히 피신했다.
에시메드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다, 곧바로 낯빛을 굳히며 방금 자신이 안도하였다는 사실을 향해 의문을 품었다.
저 인간의 안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그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움을 주었을 뿐이었는데, 안도감을 느낄 것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불편한 감상은 계속해서 찜찜하게 남아 그를 괴롭혔다.
심기가 뒤틀린 에시메드는 부러 한동안 로제 하카드엘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죽은 자의 생명을 거두는 의무를 행하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호기심을 온전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향하는 것 같았는데, 로어가 내려 준 사명은 빠르게 이행하고 있나?
에시메드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그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권속에게 명해 로제 하카드엘라의 모습을 전하도록 했다.
그 장면 속에는 드라이어드를 숭배하는 일족의 군주를 마주하는 로제 하카드엘라가 존재했다.
그들은 정령왕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로제 하카드엘라는 군주의 뒤를 따라 드라이어드 왕가의 성소로 향했다.
아무리 죽음의 정령왕이더라도 다른 정령왕의 수호 아래 놓인 공간은 범접할 수 없었기에 자연히 권속을 물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그 인간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던 에시메드는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르카네.
형님을 숭배하는 일족의 나라, 니샤의 왕족은 어찌하여 저토록 집요하게 다른 정령왕의 유물을 앗아 가고자 하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다른 나라, 다른 속성의 정령왕의 근원 조각이 담겼을 뿐인 유물이 뭐가 그리 탐이 나서.
[……이만 가 보거라.]
에시메드는 과거에서 빠져나오며, 제 소임을 다한 권속을 다시금 돌려보내고는 드높은 설산의 정경과 시리도록 푸른 창공을 바라보았다.
[에시메드, 당분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해.]
[어째서지?]
그 순간 들려온 프린셔의 권유에 의문을 표하며, 에시메드가 그를 돌아보자.
[……너도 알긴 하잖아. 나이아드가 사랑한 왕국이 멸망을 맞이했다는 거.]
프린셔는 나이아드의 이름을 읊조리며, 기민하지 않은 자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 대한 비탄과 분명 이 일을 부추겼을 네 형제를 향한 증오에 몸서리치며 난동을 부리고 있어.]
본래대로였다면 알지도 못했을 사안이었으나, 로제 하카드엘라의 육신에 들어온 어느 인간의 행적을 지켜보며 우연찮게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랬군.]
사랑.
단 한 번도 그런 감정에 매몰되어 본 적이 없었기에 나이아드가 느끼는 비탄도, 증오도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에시메드, 만약 내가 너마저 잃게 된다면…… 나는 저 자연을 다스리는 정령왕들의 얄팍한 비탄과 분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절망하여, 결국 나 자신의 존재조차 갉아먹어 가면서까지 온 힘을 다해 보복하고 말겠지.]
사랑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냉혹한 저주와 증오를 쏟아부으며 고통을 감내하던 이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내게서 너를 앗아간 세상을 향해, 생명을 사랑하여 나를 버린 우주를 향해…….]
그러니 나로서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의 윤곽만을 더듬으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아무튼 정령계는 가지 마. 괜히 너에게 분풀이를 하려 들 수 있으니까.]
[알겠다. 한데, 너는 그에게 가지 않을 건가?]
[……무슨 말이야?]
프린셔가 의아하다는 기색을 설핏 드러내며 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아드가 그리도 괴로워한다는데. 그는 너의…….]
에시메드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읊듯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나이아드가 나를 보면 더욱 심기가 어지러워질 테니,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나아.]
프린셔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미소라고 칭하기에는 흐리고, 짙은 자조의 기색이 어려 있었지만…….
[정말 복잡하군.]
아, 감정이라는 것은 어찌 이리도 오묘하고 불분명하여, 나의 심기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에시메드는 불만에 차 인상을 찌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이것 놔, 놓으란 말이다!]
콰과과과-
정령계는 총 13개의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만해라, 나이아드!]
쿠궁-
자연계 정령왕들은 각기 한 차원을 부여받아 권속을 이끌고 그곳을 다스렸다.
생명, 죽음, 어둠을 비롯한 태고의 정령들과 지혜의 정령왕 또한 각자의 차원을 다스리며 군림했다.
나머지 한 차원은 이들을 제외한 정령들이 공존하며 머무르는 공간이었다.
[내게 답하라, 이그니스! 정녕 추악한 어둠이 모든 운명을 어그러뜨리는데도 침묵만을 유지할 것인가?!]
[나이아드!]
그리고 이곳은 가장 정결하고 신성한 권역.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다스리는 차원이었다.
[그만 진정하라, 이 무슨 행패란 말인가!]
자신이 사랑한 나라가 멸망을 맞이한 그 직후부터, 물의 정령왕은 빛의 정령왕이 머무는 궁전의 앞으로 달려와 정신을 놓은 이처럼 발악하며 이그니스를 향해 분노를 토해 내고 있었다.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는 그런 나이아드를 말리며 깊이 일그러진 낯으로 턱을 악물었다.
[나와, 나오란 말이다! 그 귀한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 늘 그랬듯 하등 쓸모없는 연민이라도 건네며 눈물 한 방울 떨구기라도 하란 말이야…….]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토해 내던 나이아드는 결국 자신을 붙든 오리에드의 품으로 무너지듯 기대며 소리 내어 흐느꼈다.
[……너의 심정을 나 또한 깊이 이해한다. 너보다 이르게, 나는 내가 축복한 나라를 잃었으니까.]
[하카드엘라……. 결국, 모든 게 사라지고 말았어. 나의 나라가, 나의 자랑이 아르카네의 발아래 무참히 짓밟혔다고!]
오리에드는 비참한 심경으로 나이아드를 달래며 이 순간마저도 단 하나의 움직임도 없이 고요한 빛의 궁전을 응시했다.
[진정으로 냉정하군……. 한 번쯤은 나와 줄 만도 하건만.]
하긴, 자신의 때에도 이러하지 않았던가.
오리에드는 입매를 비틀어 자조하듯 웃었다.
매 순간 지독히도 선량하고 다정하여, 어떤 무례를 당해도 분노 한번 보인 일이 없던 이그니스였으나…….
이럴 때면 오히려 그 상냥한 모습 뒤에 감춰진 냉정한 면모가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오리에드.]
나이아드의 울음이 잦아들고, 잠시간 소강상태가 이어지던 때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드라이어드? ……네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다름 아닌 숲의 정령왕, 드라이어드가 나타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