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그는 오리에드의 품에 힘없이 주저앉은 나이아드를 떨리는 눈빛으로 응시하다 시선을 들었다.
[이그니스를 만나러 왔어. ……고집스럽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만, 나는 무엇을 요구하러 온 것이 아니니 들여보내 주겠지.]
[드라이어드! 나 또한 들어가게 해 줘. 이그니스를 만나야 한다, 제발…….]
드라이어드의 답이 돌아온 그 순간, 나이아드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외쳤다.
그는 오리에드를 떨쳐 내고 당장에라도 드라이어드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오리에드는 나이아드를 단단히 붙들며 말했다.
[드라이어드, 어서 들어가라. 나이아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
[아니야, 안 돼! 제발, 드라이어드!]
[……잠시만, 오리에드.]
나이아드의 몸부림이 더욱 심해졌다.
그 절박한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드라이어드는, 곧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나이아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인 뒤 물러났다.
[……무슨.]
그러나 놀랍게도, 대체 드라이어드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나이아드는 발악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중얼거리며 떨리는 눈빛으로 드라이어드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야. 물의 유물은 안전할 것이며, 공국의 대는 끊기지 않을 거야.]
드라이어드는 생긋, 미소 지으며 나이아드를 향해 확언했다.
[보복의 때는 반드시 온다. 하니 기다려, 나이아드.]
일순, 길게 찢어진 황금빛 안광에 예기가 깃들었고.
[언제까지나 인내하라는 법은 없으니.]
서늘히 가라앉은 어조로 이야기한 드라이어드는 곧 모든 것이 착각인 것처럼 밝게 웃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갔다.
남겨진 나이아드와 오리에드는 멀어지는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 * *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봐?]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는 드라이어드의 물음에 그보다 더 해사할 수 없이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마침 적적하던 차였는데, 잘 되었습니다. 앉으시지요.]
여전히, 신기할 만큼 웃음이 가시지 않는 낯빛이었다.
드라이어드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동등한 정령왕이 보기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의 이그니스를 응시하다, 툭 던지듯 말했다.
[이번에 멸망을 맞이한 하카드엘라 공국의 후예가 말이야, 내게 부탁을 한 가지 했어.]
[……부탁이라니요?]
이그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왔다.
드라이어드는 다시 곱씹어 보아도 신기할 만큼 당돌했던 소녀를 떠올리며 느릿하게 웃었다.
[정령왕의 유물이 담은 근원 조각을 인간의 육신에 녹여 낼 수 없겠느냐고 하더군.]
[……예?]
놀라운 일이긴 한 모양이다.
그 이그니스가 모든 미소를 지워 내며 당혹감을 드러내다니.
드라이어드는 그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며 이어 말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부탁하지 말아라. 그리 엄포를 하고 거절했는데도 참 끈질겼지. 그래서, 결국 그리 해 주었어.]
[드라이어드,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그토록 절박하게 부탁하는데, 내가 어찌 거절하겠어?]
이그니스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드라이어드를 응시하다, 입술을 짓씹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연약한 필멸의 몸으로 그토록 위험한 시도를 감행하면 안 될 터인데…….]
[뭐, 그 청을 올린 아이가 아닌 걔 동생이 대신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것도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 때문이 아니라, 유물을 동생이 지니게 한 뒤 저가 미끼가 되어 적을 유인하고자 함이었으니.]
참, 안타깝고…… 이렇게 떠나보내기엔 아까운 인간이었지.
드라이어드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흘긋, 이그니스를 응시했다.
[…….]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저 경악스러울 만큼 고지식한 성정상, 분명히 내가 말한 아이를 찾아가 앞으로는 그리하지 말라 당부하고 말릴 것이 분명하니.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드라이어드는 회심의 미소를 그리며 생각했다.
그 아이, 로제 하카드엘라는 그 육신에 어둠의 권능을 짙게 흩뿌리는 이물을 품고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어그러뜨리고, 계속 방치한다면 생명이 모조리 갉아먹어 죽음에 이르는 위험천만한 상태였지만 드라이어드에게는 그 이물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하니 어둠이 예로부터 가장 증오하여, 그가 자리하는 곳에 그림자 한 톨 남기지 않던 존재를 데려다주면 그만이지.
……이제야 그 아이도 조금이나마 무사해지겠구나.
부디, 나의 이 선택이 너의 앞날에 축복으로 작용하기를.
드라이어드는 그렇게 소망하며 눈을 감았다.
10. 빛으로 향하는 길
“여기가…… 바로.”
나는 들뜬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로샨 제국이었다.
드라이어스 왕국의 국경선에 도달할 때까지, 나는 다음으로 향해야 할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담…….’
우선 망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가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그곳에 유물의 잔해가 남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발길을 정하려다가도.
‘……아르카네같이 음흉한 작자가 그리 쉬운 장소에 유물의 잔해를 두었을까.’
혹시 그곳에 없다면, 그야말로 시간 낭비에 체력 낭비에…….
‘아, 정말! 아무런 단서도 없는데, 나보고 대체 어떻게 찾으라고요!’
나는 굽이친 산맥을 향해 소리치며,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눌렀다.
‘하……. 그래. 어차피 어디를 가도 망할 확률이 똑같은데.’
차라리 내게 익숙한 나라를 먼저 가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로샨 제국에 향하기로 결심했다.
유일하게 내가 살아가던 시간대까지 현존하던 불의 유물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사라지긴 했으나 옛 에피스 제국의 수도였던 바람의 도시와 아스트라페의 축복을 받은 칸델 공작가.
그리고 고대 루멘 제국의 후예인 헤일리안 대공가가 존재하는, 대륙의 모든 신비가 맺힌 나라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나라였으므로.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 있게 향했는데…….
“꺄아아악-!”
우르르릉-
불의 신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찾다, 좀 돌아가긴 해야 하지만 정상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나의 업보인 걸까?
산길을 오르기 전, 바로 어젯밤까지 폭우가 쏟아져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민의 말을 듣고 돌아서야 했는데……!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토사와 속수무책으로 뿌리째 뽑혀 추락하는 나무를 바라보며 비명을 내지르던 나는, 살기 위해 달렸으나 탁 트인 곳에서 산사태에 휩쓸리느니 차라리 폐쇄된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쿠과과광-
“헉, 허억…….”
간발의 차로 뛰어 들어온 동굴 밖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으로 무섭도록 쏟아지는 토사를 응시하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구사일생으로 피하긴 했지만…….
“동굴 밖이 산사태로 엉망이 되었는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언제일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시간, 동굴 안에 갇혀 있다가.
“굶어 죽는다면……. 아, 이러나저러나 끔찍하긴 매한가지잖아!”
어째서 내게 이런 시련을!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망에 잠겼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여 비로소 보이게 된 동굴의 바닥은 자칫 잘못 걸으면 미끄러져 다칠 정도로 매끈한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천장 아래로 거대한 종유석이 내려와 그 끝에 물방울을 매달고 있었다.
똑, 똑…….
저 안쪽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마실 물은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때였다.
“……음?”
토사로 완전히 틀어막힌 동굴의 입구, 그 틈새로 무언가 희끄무레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한동안 미간을 좁힌 채 그곳을 응시하다, 조심스레 다가가자 드러난 것은…….
“뭐야, 사람이잖아?!”
동굴로 뛰쳐 들어올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나처럼 이곳으로 도망치려던 사람인 듯했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토사가 쏟아지는 바람에 온전히 들어오지는 못한 것 같고…….
“……살아, 있으려나?”
섬뜩한 기분에 잠겨 중얼거리던 나는, 곧 정신을 다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진 사람의 몸을 흔들었다.
“저기,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가까운 곳에서 내려다보니 아직 어린 티가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소년이었다.
“어떡하지…….”
정말 다행히도, 미약하게나마 숨결을 내쉬고 있었으나 하반신이 질퍽한 토사에 완전히 끼어 버린 터라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겨도 빼낼 수가 없었다.
나는 애를 태우며 입술만 깨물었다.
“……뾰족한 돌이라도 구해 와서, 흙을 파낸다면.”
이대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을 듯해, 허무맹랑한 방도라도 일단 시행해 보기로 결심하고 뒤로 돌아서던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웬 거대한 형체가 형형한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지? 괴물? 말로만 듣던 곰인가?
그런데 곰이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던가?
영문을 알 길이 없었으나, 아무튼 식겁하여 비명을 지르던 그때.
[……그리 놀랄 것까지는 없지 않나?]
“……어?”
그 거대한 형체가 나직이 읊조렸고, 나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게다가 저 시리도록 푸른 눈……. 설마?
“죽음의 정령왕?!”
아니,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정체를 깨달았음에도 당황은 가시지 않았다.
[……네가.]
그런 나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죽음의 정령왕이 다시금 읊조리던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로제 하카드엘라의 육신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의 기억을 상기해 본다면, 죽음의 정령왕은 죽은 이의 생명을 직접 거둬들이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그가 나타난 이유가.
다름 아닌 죽은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면……!
“아, 안 돼!”
설마, 이 소년이 결국 죽어 버린 건가?
나는 황급히 주저앉으며 정신을 잃은 소년을 살피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눈앞에서 떠나 보내다니…….
[……그자.]
분노일까, 슬픔일까.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손을 그러쥐던 그 순간.
[안 죽었다.]
“……예?”
죽음의 정령왕이 내뱉은 말에, 잠시 뇌가 멈추었던 나는 멍하니 되물으며 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