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안 죽었다고?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죽음의 정령왕은 어딘지 착잡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죽을 운명은 아니니.]
“그럼…….”
다행이긴 한데.
나는 얼떨떨하게 대꾸하다, 의문에 잠겨 죽음의 정령왕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죽은 사람도 없는데.
[그건…….]
나의 물음에, 죽음의 정령왕은 눈에 띄게 멈칫하며 답을 미루었다.
[…….]
왜 저러는 거지?
답은 자신이 알고 있을 텐데, 오히려 내게 이유를 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무튼, 죽은 것은 아니니까.”
원래 하려던 일이나 해야겠다.
나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두운 동굴 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디뎠다.
[어디로 가는 거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침묵하던 죽음의 정령왕은 뜬금없이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
“죽지 않았다고 해도 계속 저렇게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하찮은’ 피조물을 구하는 일에 당신이 도움을 줄 리도 없고…….
“그러니 돌덩이라도 찾아볼 생각이에요. 토사를 파내서 저 소년을 꺼낼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어두운 사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과 바닥을 짚으며 적당한 바위 조각을 찾아 헤맸다.
“……저걸 딱 부서뜨려서 사용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땅히 사용할 만한 돌덩이가 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천장 아래로 자라난 커다란 종유석을 올려다보며 아쉬움에 중얼거렸다.
누구 힘센 사람이 딱 나타나서, 저 종유석을 똑 부러뜨려 내게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한참 전부터 뒤에서 서성거리는 거대한 형체를 돌아보았다.
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광원으로 빛나는 벽안이 살짝 흔들리며, 그가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생각해 보니까, 아힐란 강을 건너 드라이어스 왕국으로 향하던 때 죽음의 권속이 나를 도와준 적이 있지 않았나?
내가 칼리드 일카이의 손에 꼼짝없이 붙들릴 위기에 처했을 때, 죽음의 권속이 레제크의 앞에 나타나 곁을 맴돌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고 했었다.
권속에게 자기 의지가 존재할 리 없으니, 그 내막에 죽음의 정령왕의 명령이 있었다면…….
“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이 존재가, 나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지난번 죽음의 정령왕께서 제게 감시역으로 붙여 두셨던 까마귀가 저를 도와준 일이 있었어요.”
[…….]
죽음의 정령왕은 그저 침묵했다.
나는 잠시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으면 끝까지 해보기로 결심하고 이어서 말했다.
“말씀해 주세요. 그날, 니샤의 왕제에게 끌려갈 위험에 처했던 제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조력자를 불러 주셨던 이유를.”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
답은 예상 밖으로 빠르게 돌아왔다.
단단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한시라도 빨리 로어가 네게 주었다는 사명을 이루고, 나는 본래 거두었어야 할 생명을 회수하고.]
그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모든 일을 순리대로 되돌리기 위해.]
죽음의 정령왕은 나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가 나를 도왔던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되었으니, 차라리 좋은 일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청해도 되겠네요.”
[……?]
나직이 중얼거리며 흘긋 시선을 들어 올리자, 죽음의 정령왕은 나의 말이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었다.
모든 것은 서로의 윈윈을 위해서.
“제가 가장 빠르게 사명을 이루고, 이 육신에서 떠나 죽음의 정령왕님과 깔끔하게 이별하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정령왕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뭐?]
그의 의문을 무시하고, 나는 손을 들어 가장 탐나는 종유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려면 우선 이 동굴부터 빠져나가야 하겠죠. 하지만 바로 눈앞에 산 사람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이 동굴을 나갈 수는 없어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죽음의 정령왕이시여. 저 종유석을 부러뜨려서 제게 주실 수 있으실까요?”
[…….]
어두워서 세세한 것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선 이 존재가 진심으로 황당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어쩔 거야. 여기서 당신이 안 도와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게다가 동굴 바깥으로 데려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천장의 종유석 하나 부러뜨려 달라는 부탁이잖아.
과하지도 않고, 딱 적당한 도움 요청인데 이걸 거부한다면…….
아무리 당신이 에시메드와 닮았더라도, 더는 좋게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
물론 나의 호감 따위야 당신에겐 하등 가치 없는 존재겠지만.
그렇지만 어쩌라고. 방법이 없는데.
나는 철면피를 깔기로 결심했다.
[내가 살다 살다…… 너 같은 인간은 정말 처음 본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 못해 충격의 기색마저 어린 목소리로 읊조리던 죽음의 정령왕은, 푸른 눈을 내리감으며 잠시간 고민하는 듯하다.
[…….]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 정확히 내가 가리켰던 종유석을 손쉽게 떼어 내어 홱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까짓 하찮은 청,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으니.]
“감사합니다! 역시 보기와 똑같이 강건하시군요.”
나는 반색하며 무거운 종유석을 받아 들었다.
립서비스도 잊지 않고 덧붙였으나, 오히려 그 말을 들은 죽음의 정령왕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 갔다.
복잡하기도 해라, 하지만 내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무거운 종유석을 끌어안고 조심조심 미끄러운 바닥을 건너가, 소년이 기절한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이렇게 하면…….”
퍽, 퍽-
질퍽하고 단단한 토사는 쉽게 파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마 위로 흐른 진땀을 닦을 새도 없이 토사를 파내는 일에 열중했다.
퉁-
“드디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소년을 빼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나는 몰려드는 환희에 잠겨 지긋지긋하게 무거웠던 종유석을 내던지고 소년의 두 팔을 붙들어 온 힘을 다해 당겼다.
“끄응……. 하, 그렇게 파냈는데도 꼼짝을 안 하네…….”
하지만 내 기나긴 고생이 물거품으로 흩어지기라도 한 듯, 소년의 몸은 흙더미 속을 빠져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관에 봉착했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비켜라.]
“네?”
그 순간, 아예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던 죽음의 정령왕이 불현듯 내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비키라는 시선을 보내올 따름이었다.
……뭘 하려는 거지?
나는 머뭇거리다 결국 그의 말대로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내가 떨어지자 죽음의 정령왕은, 힘없이 누운 소년의 뒷덜미를 확 잡아채었고.
“잠깐……!”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질퍽한 토사에 묻혀 있던 소년의 몸을 완전히 빼내 들어 올렸다.
“어……?”
내가 방금 뭘 잘못 본 건가?
체감상 두 시간은 낑낑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걸 그렇게 쉽게 빼낼 수 있으면…….
“진작에 도와줄 것이지……. 아니, 세상에! 역시 죽음의 정령왕님! 대단하세요!”
[……내려놓을 테니,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두 네가 알아서 해.]
“당연하지요! 오늘 두 번씩이나 저를 도와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미래로 돌아가서도 꼭 갚을게요.”
어찌 되었든 기쁜 일이었으니, 나는 입에 발린 찬사를 늘어놓으며 쓰러진 소년의 몸을 똑바로 누이고 혹여 다른 상처는 없는지 살폈다.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죽음의 정령왕은 심정을 짐작할 수 없는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다, 처음과 같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야 갔네. ……우선 빼내긴 했는데, 앞으로는 어찌해야 하지…….”
소년을 살렸다고 한들, 이 동굴을 빠져나갈 방도를 찾지 못한다면 이대로 아사하는 길밖에 더 있나.
망할 지혜의 정령왕, 이런 무지막지한 위험에 처했는데 도움 한번 주지를 않네.
“죽음의 정령왕에게 빌고 빌어 겨우 이 정도까지 온 거고…….”
지친다, 더는 노력하기도 힘에 부쳐.
잠시라도 쉬어야겠어.
나는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깐 눈 좀 붙이려는 생각일 뿐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쿵, 쿵-
“무슨 소리야……. 헉!”
몸이 흔들릴 만큼 거센 진동과, 계속 성가시게 울려 퍼지는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 그 순간.
이전의 모든 기억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내가 구한 소년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나의 곁에 얌전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한데, 아까부터 들려오는 이 진동은…… 대체 뭐지?
쩌적-
“!”
그 순간,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았던 굳은 토사에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포옹-
[읏차, 들어오는 데 성공! 어디 보자, 사람이……. 어?]
그 자그마한 틈 사이로 데구루루 떨어져 나온 작은 형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하나의 이름을 멍하니 읊조렸다.
“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