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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3)화 (114/141)

<113화>

[산 사람이다! 이봐, 네 상태는 멀쩡해?]

몇 해 전, 아르카네가 만든 환상 속 세계에 갇혔던 때.

처음으로 목도했던 대지의 상위 정령 클래이.

그 클래이를 수백 배나 작은 크기로 줄여,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흙 인형 같은 생김새의 대지의 하위 정령이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와 다리를 뭉툭한 팔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 그래. 나는 괜찮아. 그런데, 누가 너를 여기로 들여보낸 거니?”

잠시 당황에 잠겼던 나는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심정으로 물었다.

[내 소환자. 밖에 어스웜도 와 있으니 금방 동굴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다행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대체 누구일지는 몰라도, 이 동굴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는 걸 알고 구해 주려는 걸까.

뭐가 되었든 이 캄캄한 동굴을 벗어날 수 있으니 좋았다.

……아직 배가 고프진 않은 것으로 보아, 하루는 안 지난 듯한데.

[그보다, 나는 어린 남자를 찾아야 하는데,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알아?]

“어?”

그 순간, 노움이 건넨 물음에 잠시 멈칫하다.

“어린 남자라면, 혹시 이 사람을 말하는 거야?”

나는 곁에 누워 고르게 숨을 내쉬는 소년을 가리키며 답했다.

[찾았다! 너처럼 멀쩡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 있어.]

노움의 그 태도에서 무언가의 힌트를 얻은 나는, 긴가민가한 심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혹시…… 네 소환자라는 사람이 구하려는 자가, 이 소년이야?”

[응. 그렇대. 소환자 옆에서 한참 전부터 시끄럽게 울어대는 인간이 있는데, 얘가 자기 주인이라나, 뭐라나.]

그 인간은 아마도 이 소년의 시종일 가능성이 높았다.

“의복과 고운 외양에서 눈치채긴 했지만…….”

아무래도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인 듯했다.

쿵-!

“!”

조용히 중얼거리던 순간,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이 거센 진동이 동굴 안을 뒤흔들었고.

쩌저적-

“아…….”

어둠에 잠겨 있던 눈이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밝은 빛이 무너진 흙더미 사이로 쏟아져 캄캄한 동굴을 환히 밝혔다.

나는 손을 들어 눈앞을 가리고, 드디어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쁨에 잠겼다.

“……고, 공자님-!”

어떤 사내가 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지르며 동굴로 뛰쳐 들어왔다.

……잠시만, 공자님?

“아이고, 아이고오! 공자님,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예? 이리 가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시야가 어느 정도 빛에 익숙해져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응시한 곳에는, 한 중년의 남성이 정신을 잃은 소년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저기, 그 사람. 살아 있어요.”

“으흐흐흑……. 예?”

꼭 장례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절절히 통곡하는 것이 안타까워 그렇게 이야기하자, 남자가 울음을 뚝 멈추며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토사에 깔리긴 했는데, 잘 들어 보세요. 아직 심장이 뛰고, 숨도 쉬고 있는걸요.”

그러니까 저 시종이 해야 할 일은 아직 살아 있는 주인을 붙들고 통곡을 할 것이 아니라.

“마을로 내려가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는다면 분명 깨어날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적절한 대처를 받게 하는 것이겠지.

나는 벽을 짚고 일어서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렇군요. 잠시만, 공자님께서 토사에 깔리셨다구요?! 맙소사, 아니, 그런데 어찌 지금은 이곳에 계시는 거지……?”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죽음의 정령왕이 당신네 도련님을 꺼내 주었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제가 토사에서 빼내 드렸어요.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서 눕혀 두기만 했지만…….”

“세상에나, 그렇다면 아가씨께서 우리 공자님의 생명의 은인이시로군요!”

네?

열렬한 반응에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그 소년을 품에 안아 들고 벌떡 일어선 남자가 번뜩이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님의 은인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공자님께서도 정신을 차리시면 마땅히 은혜를 갚으려 하실 겁니다.”

“아니……. 은혜는 안 갚으셔도 돼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이럴 수가, 아름다우신 외양만큼 영혼까지 고결하신 분이셨군요. 결코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아니, 필요 없다고요!

나는 은혜를 갚겠다고 질릴 정도로 주장해 대는 남자에 난감해져 고민에 휩싸였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것으로도 초조한데, 이들을 따라가면 또 얼마나 시일이 지체될 것인가?

안 되겠다, 몰래 도망이라도 쳐야지.

그렇게 결심하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바스테반 공작가는 은혜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니까요!”

……뭐?

이곳에서 들려올 것이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도망치려던 것조차 모두 잊어버린 채 망연히 물었다.

“아차, 아가씨께선 모르고 계셨겠군요. 당신이 구한 이분은 바스테반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신…….”

‘이디스. 비록 네 외가가 멸문당했다고는 하나, 너는 바스테반에 남은 유일한 후계자란다. 하니 대략적인 계보라도 알아두었으면 좋겠구나.’

어린 날,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한낮의 백일몽처럼 아스라이 메아리쳤다.

“시안 오르카 바스테반 공자님이십니다.”

나의 외증조부의 이름이 귓가에 선히 박혀 든 그 순간.

구름이 움직이고, 태양의 빛이 흐려지다.

오직 시종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소년만을 향해 거짓말처럼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 * *

시안 오르카 바스테반 공작.

그는 나의 외할아버지, 시오른 아르카이츠 바스테반의 아버지였다.

‘이 할아비의 아버지는 참으로 정의로우신 분이셨단다. 대 가문의 수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수하셨고, 때문에 어머니께서 많이 고생하시기도 했지.’

‘부군으로 따르기에는 영 든든하지 못한 남편을 대신하여, 앞장서서 가문을 관리하셔야 했으니까.’

“로제, 로제!”

회상에 잠겨 있던 나의 귓가에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언뜻 소녀로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소년이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

당신 생각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였다.

“아니요, 아무것도.”

하지만 죽어도 진실을 내뱉을 수는 없었기에.

옅게 웃으며 대충 둘러대자, 그 소년.

시안 오르카 바스테반은 휘황한 금빛의 눈동자를 순수하게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운 시선이었다.

“…….”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당신의 이야기와 한 점 다름이 없게도,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증조할아버지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간 나를 발견하고.

‘와아……. 네레이드인가?’

‘……네?’

‘진짜 예쁘다…….’

한순간에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말을 남긴 뒤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 할아버지도 조금 순수한 면이 있으시긴 하셨지만, 증조할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하셨구나.

“로제, 당신은 무슨 일로 로샨 제국에 왔다고 했어요?”

그리고 다시 며칠의 시간이 흐른 이후.

이제 완전히 기력을 회복한 증조할아버지……. 아, 저토록 앳된 소년에게 자꾸 증조할아버지라는 표현을 쓰려니 너무나 괴상하기 그지없어, 앞으로는 그냥 시안으로 칭하겠다 결심한 뒤 나는 대꾸했다.

“불의 신전에 가 보려고요.”

정확히는 로샨 제국으로 오면 유물의 행방을 찾기 더 수월하지 않을까, 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희망을 따라온 것이었지만.

그 길에서 상상도 못 했던 외증조부를 마주칠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맞다. 빨리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며, 자꾸만 쓰디쓴 강장제를 마시게 하니 너무 맛없어서 기억마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요.”

시안은 극성스러운 시종을 향해 투정을 부리며 푹신한 침구에 얼굴을 기대었다.

“한데 왜 불의 신전이에요?”

“……그냥요. 신전은 다 좋아서요.”

이유를 물으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그냥 신전 애호가로 보이는 게 낫겠다 싶어 영혼 없이 대꾸하니 시안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빛의 신전에 가 볼래요?”

“……빛의 신전이요?”

순간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루멘 제국이 멸망하며 황가는 헤일리안 대공가로 신분을 바꾸고 이어졌다지만, 빛의 신전이라니……?

유프스 백작에게서도, 로베릭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던 곳이다.

“네.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관광 명소죠. 정말 다 쓰러져 가는 상태인지라 혹여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금방 잿더미로 변모할 테니 그전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었어요.”

이어지는 시안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째서 내가 빛의 신전을 알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금방 잿더미로 변모할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라고 하였으니……. 훗날 재앙의 개시를 거치며 완전히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빛의 신전에 가려던 중에 운 나쁘게 산사태에 휩쓸려서 이 지경이 되었고요. 하지만, 내 생명의 은인인 로제와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닌 것 같아요.”

시안의 천진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우주의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와 일리피아를 제한다면, 아르카네를 가장 완벽히 대적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는 단 하나뿐일 것이다.

빛의 이그니스.

비록 인세에 개입할 수 없는 정령왕이 내게 실효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당장 아무런 단서조차 없이 황무지를 헤매며 땅을 파야 할 상황에서는…….

“좋아요, 함께 가요.”

“와, 잘 되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녹스에게 말하고 올 테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옛 빛의 신전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선택일 터였다.

반색하며 달려 나가는 시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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