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4)화 (115/141)

<114화>

* * *

“로제, 저길 보세요!”

빛의 신전을 향해 길을 떠난 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

시안의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때마침 불어 드는 바람결에 머리칼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빛의 신전이에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전의 터라고 해야겠지만.”

그의 말대로 머나먼 고대, 웅장하고도 신성한 공간이었을 빛의 신전은 심하게 훼손되어 다 쓰러져 가는 백색의 기둥 몇 개와 곳곳이 깨지고 떨어져 나간 터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상태가 좋지 않아, 의미 있는 수확을 얻기란 요원해 보였다.

“하…….”

나는 몰려드는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기대했었나 보네요.”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던 시안은 저가 다 시무룩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훼손되지 않은 신전이 보고 싶다면, 성도의 불의 신전도 있어요. 함께 가 보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금빛 눈동자를 천진하게 반짝이며 물어왔다.

“글쎄요, 이미 폐를 끼쳤는데…… 제가 또 공자님께 도움을 받을 수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제는 나를 살려 주었잖아요. 이까짓 건 아무런 보상도 되지 못해요.”

조금 부담스러운 심정이 들어 거절의 말을 읊기가 무섭게 시안이 외쳤다.

……증조할아버지와 계속 엮이다가 혹여 미래에 영향이라도 끼치지 않을까, 불안해서 이만 헤어지려고 말한 건데.

“공자님…….”

이렇게나 강경하게 나오시는데, 대체 어떻게 증조할아버지와의 이 기묘한 동행을 끝내야 하지?

나는 울고 싶은 속내를 감추고 억지로 웃으며 시안의 눈길을 피해 다 쓰러져 가는 신전의 터를 바라보았다.

저런 곳에 들어가 봤자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

불의 신전까지만 동행하자.

그리고 최대한 빨리, 증조할아버지와 헤어지는 거야.

“이곳에 계셨군요.”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그 목소리.

“로제.”

나직하고, 담담하나.

이유를 모르게도, 어딘가 깊은 슬픔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칼리드, 일카이!”

하얗게 바스러진 잿더미 같은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그, 칼리드 일카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시안과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패닉에 빠져 생각했다.

미끼를 자처하긴 했으나, 시안과 만난 이후부터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곳까지 움직였다.

한데, 어째서?

……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내 뒤를 밟은 거지?

“로제? ……아는 사람이에요?”

시안이 낯선 이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증조할아버지를 이 일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다.

저 남자가 비록 내게 있어 정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니샤의 왕족이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열한 수도 가리지 않고 이용하는 족속들…….

“공자님. 일전, 제가 하카드엘라 공국에서 왔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니 한시가 급했다.

나는 시안의 팔을 붙들고 다급히 말했다.

“저 남자는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하니 앞으로 동행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동행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군요.”

“로제……? 갑자기, 무슨.”

“이 사람은 나와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시안의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나는 그의 팔을 놓고 칼리드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죠. 아무 관련 없는 자는 끌어들이지 말고.”

“……그 말씀은, 흔쾌히 저를 따르시겠다는 뜻인지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멈춰 선 칼리드가 나의 낯빛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예.”

기회를 틈타 도망치더라도, 우선은 이 자리에서 벗어난 이후의 일이다.

나는 굳은 입술을 억지로 달싹여 대꾸했다.

나의 순응에 그의 눈빛에 서려 있던 경계심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하면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칼리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

이를 악물며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디딘 순간이었다.

“가지 마세요, 로제.”

탁-

불현듯, 시안이 나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공자님?”

예상치 못한 일에 멍하니 뒤를 돌아보던 때, 시안은 전에 본 적 없이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칼리드를 응시하며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저자, 당신과 좋은 관계로 얽힌 상대는 아닌 듯해 보입니다.”

“그건…….”

마음만 같아서는 저 남자로부터 달아날 수 있게, 도와달라 부탁하고 싶었다.

“공자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남자와 제가 호의적인 관계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하지만 증조할아버지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괜히 공자님까지 위험해집니다. 그러니 이만 저를 보내 주세요.”

“싫습니다.”

그러나 시안은 고집스레 거부했다.

“로제는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런 당신을 저런 음험해 보이는 사내에게 버리고 갈 수는 없어요!”

“아니,”

누가 부자 관계 아니랄까 봐, 굳이 칼리드 일카이를 음험한 사내라고 콕 짚어 표현하는 시안의 모습에서 거짓말처럼 할아버지가 겹쳐져 보였다.

이때까지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연약한 여인을 겁박하며 끌고 가려 하다니, 파렴치한 작자 같으니라고!”

그냥 내게 순한 모습만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던 걸까.

잠시 묘한 감정이 일렁여 침묵에 잠겼던 순간, 시안은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어 다른 누구도 아닌 칼리드를 향해 겨누었다.

아니, 잠시만. 증조할아버지?

“공자님, 지금 뭐 하려는……!”

“제 뒤로 물러서세요, 로제. 내가 버티고 있는 한, 당신은 이 여인을 데려가지 못할 겁니다!”

맙소사, 이게 뭐야!

나는 예상보다도 더욱 험악해진 상황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증조할아버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순순히 따라가려 한 건데, 다른 누구도 아닌 증조할아버지가 이렇게나 강경하게 막아설 줄은…….

“……공자라. 보아하니 로샨 제국의 귀족이신 듯한데.”

자신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검을 겨눈 소년을 더없이 차분한 기색으로 응시하던 칼리드가 불현듯 읊조렸다.

“나는 바스테반 공작가의 후계자, 시안 오르카 바스테반이다!”

그 앞에서 증조할아버지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런.”

칼리드는 여전히 담담한 기색으로 작게 대꾸할 따름이었지만, 나는 일순 그의 눈빛에 스치던 곤혹스러움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증조할아버지가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나은 선택이 아닐까?

나는 칼리드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카드엘라 공국과 드라이어스 왕국은…… 솔직히 말하자면, 니샤 왕국보다 그 세가 월등히 약했으니 저들이 타국의 왕족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짓밟을 수 있었지만.

로샨 제국은 다르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강대국.

이전에도 대륙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던 제국이 여럿 존재하였으나, 몰아치는 거대한 악과 운명의 외압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오직 로샨 제국만은 그 모든 인과에서 벗어나 내가 살아가던 먼 훗날까지도 번영하고 있었으니.

증조할아버지가 로샨 제국의 제일가는 명문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안 이상 칼리드 일카이는 전처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

우리의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민간인.

거기에 더해 로샨 제국의 대귀족이기까지 한 소년을 해치면 비롯될 머리 아픈 문제들을 고려하느라, 저것 보아라.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 이대로만 상황이 흘러간다면…….

“아직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 검을 받아라!”

뭐?

회심의 미소를 짓던 찰나.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 나가는 소년의 잔상에 얼이 빠졌던 것도 잠시.

“흐아아압-!”

“…….”

툭-

칼리드는 자신을 향해 열정적인 기세로 달려와 검을 휘두르는 소년의 몸짓을 손쉽게 피해, 순식간에 형상화한 검은 궤적으로 소년의 뒤통수를 내리쳤고.

“안 돼!”

줄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경악에 차 비명을 내질렀다.

쓰러진 소년의 몸은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죽었어?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니, 할아버지를 걱정하고 자시고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나도 태어날 수 없게 되는 거 아닌가?!

“저리, 비켜요!”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에 적이고 나발이고 칼리드 일카이를 밀친 뒤 바닥에 주저앉아 미동 없는 증조할아버지, 시안의 몸을 끌어안고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로제.”

“그 입 닥쳐요, 진정으로 잔혹무도하기 그지없군요. 어떻게, 아무 관련 없는 어린 소년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울분에 차 외치던 순간, 칼리드가 내뱉은 말에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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