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럴 리가.
분명, 그 불길한 권능으로 증조할아버지를 베었잖아.
“……삭의 권능에 대해 알지 못하신다면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삭으로 형상화한 검은, 보통의 무기와는 달라서…….”
불신과 희망, 그 언저리의 위태로운 감정으로 망연히 그를 올려다볼 때, 칼리드는 마치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하며 다시금 검은 궤적을 형상화해 내게 가까이 가져와 보여 주었다.
“제가 해하고자 하는 자에게만 상흔을 남깁니다. 그리고 저는, 로샨의 귀족을 죽일 생각은 단 한 치도 품지 않았지요.”
“……그럼.”
나는 창백하게 질린 소년의 낯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저 정신을 잃고 기절한 것일 뿐입니다. 하니 염려치 마십시오. 시간이 지난 이후, 어떠한 뒤탈도 없이 깨어날 테니.”
그랬던 것이었구나.
“…….”
나는 어떠한 상흔도 없이 매끈한 소년의 뒷덜미를 어루만지며 비로소 안도했다.
“아, 아, 아아…….”
잠시간의 소강상태가 찾아온 사위, 불현듯 두려움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시안의 시종이 불쌍하리만큼 허옇게 질린 낯빛으로 내 품속에 기절한 채 쓰러진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물러나 봐요.”
어떤 해를 입은 것이 아니라, 기절한 것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곁에 떡하니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시종이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듯해, 나는 조금 날카로운 어조로 칼리드를 향해 말했다.
칼리드는 별다른 대꾸 없이 순순히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아, 아이고오! 공자님!”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한달음에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시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대체, 요 며칠간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잠시 정신을 잃으신 것뿐이니, 무사히 깨어나실 거예요.”
이제, 정말로 다가온 듯했다.
“…….”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나를 지키려다 정신을 잃은 모습이라 마음이 영 좋지 않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저 홀로 가야 할 듯합니다. 공자님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전해 주세요.”
더 이상 증조할아버지를 위험한 일에 엮이게 두어서는 안 돼.
“아가씨…….”
애써 담담히 건넨 작별 인사에 시종의 안색이 당황과 고뇌의 빛으로 얼룩졌다.
“부디, 무사 평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마워요.”
갈등하던 그는 칼리드를 몇 번이나 곁눈질하며, 결국 울상을 지은 채 시안을 들쳐메고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증조할아버지와는 이렇게 마지막이구나.
그동안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가족을 향한 애틋하고도, 묘한 기분이 물 밀듯 밀려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디 무사히 기운을 차려, 이런 좋지 않은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증조할아버지께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이제, 나를 니샤로 데려가실 작정이신가요?”
그리고 나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니샤의 왕족을 곱지 못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칼리드 일카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
숲의 유물은 알키페에게, 물의 유물은 마리에가 품었다.
하지만 빛의 유물, 전기의 유물, 바람의 유물, 대지의 유물…….
이 네 가지 유물의 잔해를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데.
이대로 칼리드에게 끌려간다면, 과연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하……. 어차피 끌고 갈 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요.”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서던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아니다, 잠깐만.
대륙 전체를 헤집는 것보다는, 유물을 모조리 망가뜨린 아르카네를 숭배하는 니샤 왕국에 유물의 잔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럼 칼리드를 따라가는 척 순순히 응하면서…… 이 사람을 꼬드겨 무언가 정보라도 더 긁어내는 게 이득이지.
“로제,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않을까?
나는 불안이 뒤섞인 심정으로, 그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만으로 나를 염려하는 칼리드를 올려다보았다.
위선이어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이 남자가, 나를 향해 일말의 동정과 죄책감만이라도 품고 있다면…….
“아니요, 아무것도. ……어서 가요.”
칼리드는 갑자기 순종적으로 행동하는 내가 의아하다는 듯한 기색을 비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무언가 속내가 있음을 짐작한 듯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지요.”
그를 뒤따르다 빛의 신전을 돌아본 것은, 순전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정말 이 남자를 설득해서 니샤에 존재할지도 모를 유물의 잔해를 찾는 것이 최선인지.
적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가혹했기에, 나를 과거로 보내 놓고 도움 하나 주지 않는 정령왕을 향한 원망 섞인 마음도 섞여 있었다.
[어둠을 숭배하는 이여, 그대에겐 미안하지만…….]
그리고 들려온,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나긋한 목소리.
“……!”
나는 이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무슨…….”
나만이 들은 목소리는 아니었던 듯 칼리드가 옅은 당혹감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때.
화아아악-
“!”
신성하고도 따스한 권능을 품은 빛이 나의 시야를 남김없이 물들였고.
“아…….”
[이제야 마주하는군요.]
다시 정신을 차리자, 세월의 흐름에 풍화되어 제 구실조차 할 수 없던 빛의 신전이 마치 그 홀로 시간을 역행한 듯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카드엘라의 후예여.]
그곳에 주저앉은 나의 눈앞에는 어린 날, 아르카네의 함정에 빠져 환상 속 세계를 헤매던 때 나의 앞에 현현했던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완벽하게 아름답고 티 없이 찬연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 영롱한 눈동자 속에 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 * *
빛을 의인화한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존재.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로베릭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정령왕.
“이그니스…….”
[나를 알고 계시는군요. 당신과 나는 이번이 처음 마주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내가 망연히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다.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릴 만큼 온후한 낯빛이었으나 깨질 듯 투명한 빛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는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한데…… 직접 마주하니 알겠군요.]
세상 어떤 비단결보다도 고운 백금의 머리칼이 나의 뺨을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당신은 이 시간대의 영혼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 육신의 본래 주인 또한 아니겠지요.]
지척에 다가와 나의 영혼을 꿰뚫어 모든 진상을 읽어 내는 그의 시선은 붉고도 붉었다.
“……당신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건가요?”
그의 말을 곱씹으며 가까스로 정신을 붙든 나는 두려움에 차 물었다.
숲의 정령왕은 내가 로제 하카드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데, 빛의 정령왕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거지?
[당신을 그 여인의 육신으로 보낸 자는 바로 지혜의 정령왕이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이그니스는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나긋한 어조로 답했다.
[지혜의 정령왕의 권능을 속속들이 아는 존재는 매우 드물지요. 하지만 나는 그와 비슷한 권능을 지녔기 때문에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권능이라면…… 설마, 당신도 영혼을 다른 자의 육신에 옮길 수 있는 건가요?”
놀라 물으니, 이그니스는 평온히 답했다.
[시간과 영혼은 극소수의 존재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입니다. 더 이상은 그대가 알더라도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 될 것은 없으니, 질문을 멈춰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가 나의 물음을 잘라 내었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
나는 사위를 돌아보며 나를 잠식시킬 듯 밀려드는 막연한 두려움과 이유 모를 안온함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이렇게 갑자기, 빛의 정령왕이 내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아르카네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니 경계할 필요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존재가 너무도 의뭉스러운 차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요.]
“!”
범람하는 의문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찰나, 이그니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꺼낸 말에 흠칫 놀라 입을 벌리니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잘했습니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은 옳지 않아요.]
“……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묻자 이그니스는 말없이 눈처럼 고운 손을 뻗어 피가 맺힌 나의 입술을 조심히 쓸었다.
“무슨…….”
[자, 다 나았습니다. 앞으로는 그리하지 마십시오.]
혼란스럽던 것도 잠시.
나는 아릿한 통증이 사라진 입술을 매만지며, 방금의 이그니스는 순전히 내가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낸 것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해졌다.
[자, 그럼 본래의 용건을 꺼내 보아야겠군요.]
……뭐야, 이 심각하게 이상적인 미친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