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말 그대로 이상.
현실에서 닿지 못할 허울뿐인 환상 속에 빠져 사는 것 같다고 표현해야 할까.
[어찌하여 정령왕의 근원을, 필멸의 육신으로 품으려 하셨습니까?]
“…….”
그리 생각하며 복잡한 심경으로 빛의 정령왕을 바라볼 때.
이그니스는 마치 어리석은 아이를 안타까이 여기고 타이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걸 어떻게…….”
[드라이어드가 내게 일러 주더군요.]
드라이어드가?
나는 놀란 채 이어지는 이그니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명이 탄생한 이래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필멸의 육신에 담긴 우리의 근원이 결국 어떤 해를 끼칠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무엇이 그리도 절박했기에.]
깊은 슬픔을 머금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그대가 쫓기는 처지만 아니었더라도, 당신의 육신에 근원을 품었겠지요?]
고운 눈결처럼 새하얀 손이 뺨에 닿았다.
보기와는 달리 더없이 따스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대로 주저앉고 싶을 만큼.
[그대의 육신에 박혀 생명을 갉아먹던 뱀의 독니를 소멸시켰습니다. 더 이상 정령 소환이 불가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 여인의 수명이 줄어들 것이라는 염려 또한 가질 필요 없습니다.]
사락-
금빛의 비단실로 자아낸 듯한 장막이 시야 가득 내려앉았다.
[또한 나는 그대를 본래의 시간, 본래의 육신으로 돌려보내 드릴 것입니다.]
빛의 정령왕은 무릎을 꿇은 채 나를 마주하며 고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니 그만 포기하십시오.]
빛의 신성함이 서린 낯을 망연히 바라보던 순간.
그 한마디에 차게 식은 물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어 거두었다.
[그대가 로어에게서 받은 사명이 무엇이든, 포기하라는 권유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꿈결은 환상이었던 것처럼 부서지고.
빛의 정령왕, 이그니스는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포기하라고요……. 제 사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시면서, 그저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이토록…….
나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을 갉아먹던 뱀의 독니를 소멸시켜 주신 은혜는 진정으로 감사드리나, 사명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로어의 진의를 숭배하는 것입니까?]
짙은 안타까움이 서린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그는 언제나 평화를 유지하기보다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택하였지요.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옳은 선택이라고는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이그니스의 입에서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르카네, 뱀은 이 우주가 존재하던 순간부터 살아 있었던 어둠. 그 자체가 태고의 권능인 자입니다. 로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맞선다 한들, 승리할 수 있는 방도는 없지요.]
“……그래서.”
그 아리따운 목소리로 자아내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신성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겁쟁이처럼, 몸을 움츠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인가요?”
나약하기 그지없는 몽상가를 응시하며 조소하듯 내뱉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말이 흘러나온 순간, 이그니스의 낯빛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가 변명처럼 읊조린 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탄생 직후부터, 어둠을 몰아낼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권능을 지녔으면서. ……당신이 진작에 로어와 함께 아르카네에게 맞서 싸웠다면, 지금의 현실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이 없는 건가요?”
나 스스로도 지나칠 만큼 목소리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으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외양만이 로베릭과 닮은 것이 아니었구나.
어떻게 빛의 정령왕이라는 자가, 이토록 어리석을 수 있을까?
[……없습니다. 품어 볼, 수가 없지요.]
날 선 비난에도 이그니스는 그 낯에 분노 한 자락 드러내지 않으며, 눈을 내리깔고 자조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그 차분하고도 담담한 태도가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방관자처럼 행동하는 거죠? 말로는 필멸자를 염려하며 자애를 내린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 냉혹한 로어보다도 인간에게 있어 당신만큼 혐오스러운 겁쟁이가 없을 지경인데!”
[…….]
“이유를 말이라도 해 봐요.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시야가 흐려졌다.
진심으로 분노하고, 절망하다 못해 눈물을 떨구며.
“……제발, 뭐라도 말해 보라고요…….”
종래에 나는 그의 발치에 주저앉아 숨죽여 울음을 삼켰다.
[……이 우주의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가, 분쟁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 답한다면.]
그 순간, 머리 위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균형…….”
잊을 수 없이 각인된 존재가 다시 한번 거론되었다.
나는 멍하니, 그 단어를 읊조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슬픔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시겠습니까?]
영롱한 빛의 시선 속 눈물로 얼룩진 로제의 얼굴이 비쳤다.
이그니스는 가련한 자를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눈물을 닦아 주며 다시금 침묵했다.
“균형…….”
‘이 세상에는 균형이라는 게 존재하더군요.’
오래전, 내 어머니 마리에트에 대한 진실을 마인하르트로부터 전해 들었던 때.
‘지혜의 정령왕께서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마리에트 님께 사명을 내려 주셨지만,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 ‘중립’은 그 이상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존재,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절대적인 섭리는 선과 악,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내려 준다고는 하지만…… 지혜의 정령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중립’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아르카네이며, 그는 결코 우주의 어둠을 저버릴 마음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우주의 어둠을 사랑하여, 모든 부조리를 눈감고 외면하는 절대적인 섭리…….
“균형.”
안개가 낀 듯 막막하던 머릿속이 순간 더없이 명료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 중립의 정체를 알고 있겠군요.”
닿을 수 없이 드높고, 아득하리만치 고귀했던 그 존재에 대한 실마리를 이제야 얻을 수 있었다.
“말해 주세요. 대체 그는 무엇인가요? 아르카네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있었어요. 모든 정령왕을 멸시하던 그가, 일리피아에게만은 존대했었는데……. 그럼, 설마 일리피아가 중립이라는 존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가요?”
지난 세월 동안 마음속에 눌러 담아 쌓여만 왔던 의문이 봇물 터지듯 입 밖으로 쏟아졌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모든 정령왕보다 드높은 존재이니.]
“그럼……!”
[하니 저의 권유는 같습니다. 모두 포기하고, 당신의 육신으로 돌아가십시오.]
또, 시작이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사실 과거로 떨어진 이후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지혜의 정령왕을 욕해 왔었는데, 이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심정마저 들었다.
차라리 모든 패를 이용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아르카네에게 맞서는 로어가 낫지.
빛의 정령왕은 명분과 허울 좋은 희망에 얽매여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으려 하니까…….
[나의 협조를 구하는 일은 포기하십시오. 다시 한번 권유드립니다, 돌아가세요.]
“……아니요.”
하지만 이와 같은 벽창호를 내가 한두 번 상대해 봤던가?
나는 두 눈을 천천히 뜨며, 옅게 일그러진 이그니스의 낯을 응시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의 말마따나, 분쟁 없이는 못 사시는 지혜의 정령왕께서 제가 그분이 내린 사명을 포기하고 홀라당 돌아가 버린 이후 얼마나 혹독한 징벌을 내리실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거든요.”
[그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인 듯 이그니스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됐어요, 당신 같은 나약한 겁쟁이의 약속 따위 믿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가 잠시간의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지만, 나의 매몰찬 거절에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유약해 빠진 정령왕이라니.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그니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면서 고집은 더럽게 세고. 여러모로 난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오랜만에 마주하는군요. 오리에드. 그리고…… 당신 또한.]
어린 날, 가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당신을 바라보며 얼이 빠졌던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어딘지 묘한 구석이 존재하던 당신의 말과.
내게 향하던 당신의 시선.
[빚이라니요. 이 일은 제게 새로운 확신이 되어 주었으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를 바라보던 당신의 다정한 눈길에 서린 것은 찬연히 반짝이는 신의와…… 이유 모를 애틋함이었어.
“이그니스, 당신이 분명…… 내가 당신을 본 적이 있었느냐고 말했었지요.”
[나를 알고 계시는군요. 당신과 나는 이번이 처음 마주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맞아요. 나는, 내가 살아가던 시간에서 당신을 만났어요.”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지금의 난관을 헤쳐 나갈 단서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그리고 미래의 당신은 나를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지요.”
나는 빛의 정령왕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