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7)화 (118/141)

<117화>

[내가…… 당신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그니스가 옅은 의혹이 서린 어조로 물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나도 미래의 당신이 어째서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모르는데.

“당신을 처음으로 마주했던 때는…… 아르카네의 함정에 빠져, 제가 살아가던 시간으로부터 수십여 년 전의 과거에 떨어졌던 날의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미 칼을 뽑아 들었으니, 이 선택을 끝까지 고수해야겠지.

나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어린 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저를 축복한 정령은 대지의 정령왕, 오리에드였지요. 그는 아르카네의 함정에 빠진 저를 구하려다 불미스럽게도 미치광이 인격인 유히리안을 깨워 버렸고, 위태롭던 상황 속 아르카네가 개입하여 저와 오리에드를 과거로 보낸 것이었는데……. 아마도 당신과 제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정도 후에 일어날 일일 거예요.”

[유히리안이라……. 그의 존재를 아는 필멸자는 흔치 않은데.]

나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이그니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유히리안을 잠재우고 오리에드를 깨워 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로서는 아르카네의 권능을 깨트리고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지요. 바로 그때! 당신이 우리의 앞에 홀연히 나타났어요.”

그가 등장한 부분을 강조하며 말을 끝맺자 이그니스의 눈망울이 커다래졌다.

“당신은 아르카네의 권능이 짙게 감돌아 와 본 것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이상하리만치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이 아련하고, 애틋하고…….”

아, 뭔가 순진한 어르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실제로 겪었던 과거에 열심히 살을 붙여 가며 이야기했다.

“게다가 나를 보며 오랜만에 마주한다고 말하기까지 하셨다니까요?”

[……내가, 당신에게요?]

이그니스가 멍하니 물었다. 나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리에드와 대화를 나눈 이후, 당신은 우리를 원래의 시간대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는 덧붙이셨죠. 빚이라 여길 필요 없다, 이 일은 내게 새로운 확신이 되어 주었다고. 그렇게요.”

[확신이라니…….]

“그때의 나는 당신의 말이 품었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아요.”

솔직히 말해서 짜 맞추는 경향이 강했으나, 나는 미약한 양심의 가책은 깡그리 무시한 채 이그니스의 손을 꼭 붙들며 말했다.

“바로 오늘의 만남이 당신에게 커다란 의미로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

이그니스의 영롱한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어째서 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마치…… 균형의 뜻 아래 모든 비극을 방관하던 당신이 처음으로 기적을 믿게 된 것처럼. 아니, 믿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희망이라도 품게 된 것처럼…….”

지혜의 정령왕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직 그만이, 아르카네를 상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맞서고 있다는 사실만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어둠의 가장 강력한 적인 빛을 다스리는 이그니스, 당신도 이제는 비극을 무시하며 덧없는 평화만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결정을 내려 주세요. 당장 지혜의 정령왕과 뜻을 함께해 달라 부탁하는 것이 아니에요. 작은 도움이라도 괜찮으니, 지혜의 사명을 받아 과거로 온 제게 힘을 보태 주세요.”

[…….]

당신이 걸어갈 길을, 오직 바라는 미래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당신의 마음속에 심어지기를.

그것만을 소망할 뿐이었다.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속하던 이그니스가 불현듯 입을 열어 말했다.

단 한 번도 부정적인 감정의 편린조차 서린 적 없이 그저 온화하고 신성하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와 낯빛에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진득하고도 서늘한 비틀림이었다.

[태고 이래, 나는 단 한 번도 균형의 의지를 거스르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르카네를 적대하지 않는 것. 모두가 나를 비난함에도 결코 꺾지 않았던 나의 신념이란 말입니다. 한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지켜 왔던 의지를 저버려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증명을 원했다.

과연 내가, 자신이 갈등하면서도 끝내 지켜 왔던 신념을 버리고서라도 도울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그렇다면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답이란…….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나는 여전히 붙들고 있던 그의 손을 다시금 힘주어 쥐며 맹세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미래, 어둠의 권능이 짙게 도사리는 곳. ……그곳에서 어린 날의 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오직, 내가 거쳐 온 과거만이 유일한 해답이겠지.

[……증명하라 말씀드렸더니. 돌아오는 것은 기약 없는 맹세뿐이로군요.]

다시금 침묵이 맴돌던 순간.

이그니스가 허탈한 기색으로 작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듯, 낯익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일말의 도움뿐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드리겠습니다. 하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빛의 정령왕이 마침내 자신의 뜻을 정했다.

몰려드는 환희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감사합니다. 하면…… 저를 도와주시겠다 약조하셨으니.”

이제야 나의 사명을 공유할 존재가 생겼다는 안도, 위안.

“지혜의 정령왕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으나, 제가 살아가던 미래에서 아르카네로 인해 재앙이 벌어졌습니다. 아르카네를 다시 금제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정령왕의 유물을 모아야만 하지요.”

[……아르카네가. 하나 유물은 이미 온전하지 못할 터인데.]

재앙을 입에 올리자, 이그니스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직까지 보존된 숲의 유물과 물의 유물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육신에 품는 방도를 사용했던 것이.”

나는 마리에와 레제크를 떠올리다,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그러므로 제게 남은 사명은 이미 아르카네의 손에 망가져 버렸더라도, 유물이 남긴 잔해를 찾아내어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는 것입니다.”

[잔해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그니스가 의아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유물의 잔해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고칠 방도가 존재한다는 것.”

[……미래에 무언가의 변수가 존재하는 모양이군요.]

역시나 이그니스도 대정령사라는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소리 없이 일어서 신전을 배회했다.

[정했습니다. 당신에게 드릴 일말의 도움을.]

다시 한참의 침묵이 흐른 이후.

이그니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빛의 유물의 잔해 또한 찾고 계셨겠지요? 더는 찾아 헤매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내게 있으니까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멍하니 되묻던 순간, 이그니스가 두 손을 모아 환한 빛무리를 불러들였다.

“그건…….”

모든 광휘가 사라진 곳에 남겨진 것은 다름 아닌 깨진 유리 조각들이었다.

[먼 옛날, 필멸자들이 칭하기를 심연을 비추는 광휘라 부르던 것.]

어딘지 공허함이 감도는 목소리가 텅 빈 신전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나의 근원 조각을 품었던 그릇, 빛의 유물이 남긴 잔해입니다.]

나의 선조, 루멘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스스로 아르카네에게 바쳤던.

빛의 유물이 남긴 잔해.

“어째서…… 당신이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헤일리안의 후손들이 무사히 살아남은 것은 기뻤으나, 무참히 망가져 버린 유물을 향한 안타까움은 쉽사리 지워 낼 수 없더군요.]

이그니스가 씁쓸한 미소를 그리며 나를 응시했다.

[하여 지금까지 품에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아……. 그것은 대공녀님의 부친께 여쭤보아 주십시오. 저 또한 궁금합니다. 빛의 유물은 대체 어찌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는지…….’

유프스 백작님, 저 드디어 알아냈어요.

빛의 유물은 빛의 정령왕이 지니고 있었기에 행방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어요.

알아 봤자 지금은 전해 드릴 방도가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본래 거울의 형상을 지녔던 유물입니다. 어둠을 내쫓고, 옳음을 가리키는 권능을 품었지요. ……이젠, 다 옛일이지만.]

과거를 회상하며 나직이 읊조리던 이그니스는, 곧 빛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이제 찾아야 할 유물의 수가 줄었군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재빨리 유물의 잔해를 조심스레 받아 들며 기쁜 마음에 말했다.

[……제 기능도 다 하지 못하는 잔해를 건네고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기에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우니, 하나의 도움을 더 드리도록 하지요.]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영롱히 빛나고, 자칫하면 살갗이 베일 만큼 날카로운 유물 조각들을 조심히 살피던 나는 이그니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로어의 성품에 그대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었을 리가 없으니, 대외적으로는 나의 사자로 불리우는 게 나을 것입니다.]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기색을 고귀한 낯에 드리운 채.

[칭호로는 백의 사자가 적당하겠군요. 어떠하십니까, 마음에 드시는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