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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8)화 (119/141)

<118화>

“……당신의 사자가 되라고요?”

나는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멍하니 물었다.

[큰 도움은 될 수 없을 겁니다. 약간의 빛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뿐.]

이그니스가 나긋이 읊조리며 생긋 미소 지었다.

“아니요. 제게…… 정말 과분한 도움을 주셨어요.”

무턱대고 조상의 육신에 영혼을 떨어뜨려, 생판 알지도 못하는 과거에서 구르게 만들어 놓고 얼굴 한 자락 비추지 않았던 로어에 비하면 훨씬 전폭적이고도 세심한 지원이었다.

“질문이 있어요. 여쭤보아도 괜찮을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빛의 정령왕님의 이름을, 제가 필요할 때 조금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저의 사자라는 신분을 이용하고자 하시는군요.]

이그니스는 내 속내를 짐작한 듯 은은하게 미소 띤 낯으로 답했다.

[단 한 번. 그 이상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네.”

그 벽창호같이 답답하던 정령왕에게서 이만한 조력을 얻게 된 것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나는 깔끔한 협상 결과에 만족하며 손아귀에 놓인 빛의 유물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이그니스가 나를 데려다 놓은 이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되돌아간다면 당연히 칼리드를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

분명 난리가 날 텐데.

이그니스가 정령 소환이 가능하도록 조치해 주긴 하였지만, 이토록 어렵게 얻은 빛의 유물의 잔해를 고작 망토에 달린 주머니에 보관한 채 칼리드와 대립하는 선택은…… 너무 위험하지 않나.

“저, 이그니스 님.”

고민 끝에, 나는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제겐 앞으로도 남은 여정이 많을 거예요. 수많은 위험을 맞닥뜨리며 빛의 유물을 보호하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일 테지요. 하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래에서 그와 내가 반드시 재회하게 될 것이라는, 기이하리만큼 분명한 확신.

나는 바스라진 빛의 잔해를 들어 바치며 결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첫 번째 재회는 아직 때가 이르고, 두 번째 재회가 다다랐을 때는 자연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바로 그때, 빛의 유물을 지니고 저를 만나러 와 주십시오.”

내가 돌아갈 현재의 시간에서 빛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전달받을 것이다.

[……좋습니다. 과연, 그대가 이야기한 대로 미래가 흘러갈지는 알 수 없으나.]

빛의 정령왕은 느지막이 읊조리며 내게서 유물의 잔해를 거두어 갔다.

[훗날의 재회를 기약하기로 하지요.]

우아한 낯에 실낱같은 미소가 깃들었고.

[하면 지금은 이별입니다.]

짝-

가벼이 손바닥을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모든 환상이 바스라지며 꿈결처럼 사라졌다.

“……돌아왔어.”

폐허로 스러져 버린 옛 빛의 신전만이 남아,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쏴아아-

힘없이 읊조리는 나를 두고 바람 한 자락이 스쳐 지나갔다.

떨어지는 햇볕을 산란히 빛내며 흔들리는 녹음, 코끝을 스치는 평온한 향내.

“……일어나자.”

칼리드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주위에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흙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빛의 유물에 대한 건은 이로써 해결했고, 남은 것은…….

“-대체,”

“!”

고요한 심경으로 앞날을 그리던 나의 귓가로 바라지 않았던 이의 음성이 내리꽂혔다.

황급히 돌아서자 분명 아무도 없던 이곳에, 밝은 낮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옷자락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휘날리며 더없이 섬뜩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하며 갈등했다.

이그니스의 사자가 되었으니 약간이지만 빛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미약한 힘으로는 저 남자를 상대할 수 없어.

상성이 맞지는 않지만…… 물의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밖에는.

“……아!”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의 순간.

미처 도망가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달려든 칼리드 일카이가, 내 양 팔목을 억세게 쥐어 그대로 밀어뜨렸고.

“윽-!”

지면에 거칠게 맞부딪치며 전해져 온 충격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을 내뱉은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음영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아니, 정정하자면 하늘이 아니라…….

“뭐 하는 짓입니까!”

아릿한 통각이 몰려와 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양 팔목을 옥죈 채 나를 제 안에 가두듯 올라탄 거대한 사내, 칼리드 일카이가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던 공허한 눈동자에 맺힌 형상은 오직 시시각각 변화하는 로제의 낯빛뿐이었다.

“……착각하고 있었군요.”

미친 새끼인가? 갑자기 왜 급발진하는 건데?

휘몰아치는 의문과 분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나는, 곧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적어도 무뢰배처럼 여인을 억압하려 드는 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간 보여 왔던 정중한 태도는 역시나 가식이었던 건가.

나는 조소를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당신의 인내심은 여기가 한계다, 뭐 그런 것인가요? ……당장 물러나지 못하겠습니까?”

“……예, 저의 인내심이 한계까지 치달았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놓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참을 침묵하며 입을 굳게 다물던 칼리드가 처음으로 답을 내어놓았다.

“불현듯 나타난 광휘에 당신이 잡아먹히듯 사라지고 난 뒤, 내가 얼마나 끔찍한 감정을 맛보아야 했을지. ……아마 당신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

“내가 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죠? 그래봤자, 내려진 명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를 상상하며 두려움에 잠긴 것이 다일 터인데.”

날 선 어조로 대꾸한 나는 곧 이 남자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깨달았다.

“……잔악한 약탈자의 고뇌 따위,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가치일 뿐.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라……. 당신은 모릅니다. 나와, 나의 형제들과, 우리의 민족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금수만도 못한 죄업을 쌓아 가며 연명해 왔는지!”

나의 말을 되풀이하듯 나직이 읊조리던 칼리드의 안색이 점차 깊은 분노와 자괴로 물들었고, 종래 울부짖는 것과 같은 외침으로 완성되었다.

“……죄업을, 쌓아야만 한다니?”

격렬히 요동치는 감정을 드러내며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후손으로 태어날 어떤 사내를 떠올린 나는 심장을 잠식했던 차디찬 증오에서 벗어나 망연히 읊조렸다.

사실, 본래의 나는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니샤는 어찌하여 아르카네를 숭배하며 모든 이들에게 적대 받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일까?

그럼에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강국이라 인정해 마지않는 자신들의 위치가 무엇이 부족해서,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을 일삼았던 것일까?

“무슨 말이죠? ……값싼 동정을 얻기 위해 지껄인 말이라면-”

“당신들의 동정 따위, 뭐가 필요하다고.”

비록 사연이 있었다 하여 그들이 자행한 죄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그리 이야기했으나, 칼리드가 말을 끊으며 자조하듯 읊조렸다.

“당신이 어둠의 정령왕과 나의 일족이 얼마나 지독한지를 알게 된다면…….”

그의 안색에 서린 것은 깊은 피로감, 오직 그뿐이었다.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

“무엇이 되었든 좋습니다. 결국 당신과 내게 정해진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고, 피할 방도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 말과 함께 칼리드는 내 위에서 물러나며 기이할 만큼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생명을 반기지 않는 대지 위에 터를 잡은 우리가, 어떻게 이토록이나 번영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풍요에 따르는 대가를.”

* * *

까악-

[왔느냐.]

빙황의 궁전, 객을 접대하는 내실은 다름 아닌 죽음의 정령왕과 그의 권속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인 프린셔는 그들을 내쫓을 생각일랑 추호도 품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친우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은 저마다 회수한 인간의 생명을 주인에게 바쳤고, 그들의 주인은 자신이 미처 향하지 못한 곳에서 숨을 다한 필멸자에게 죽음을 내렸다.

[……참으로 신기해.]

[무엇이?]

그가 의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응시하던 프린셔가 턱을 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눈길 한 자락 돌아오는 일 없이 들려온 물음에 프린셔는 나른한 어조로 답했다.

[이렇다 할 권속을 두지 않는 점이 말이야. 자연계 정령인 우리들을 비롯하여, 네가 순종해 마지않는 아르카네 또한 자신의 책무를 대리할 상위 정령을 휘하에 거느렸거늘. 너는 모든 직무를 네 손으로 일일이 처리하고 있지 않나.]

[죽음의 정령왕은 나다. 생명의 끝을 내리는 직무를 어찌 권속에게 떠맡기겠나.]

에시메드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령계에 머물러 봤자 할 일도 없으니, 직접 의무를 다하는 편이 나아.]

[내가 참으로 성실한 친우를 두었군.]

아르카네로 인해 다른 정령들과 어울리지 못했을 뿐, 천성은…… 악하지 않은 자인데.

프린셔는 형제라는 작자에게 얽매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알아 갈 많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리하여 영원히 채울 길 없는 결핍을 지니게 된 친우를 안타까이 여기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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