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19)화 (120/141)

<119화>

[그 인간은 무얼 하고 있었지?]

자신을 향한 친우의 고뇌를 알 리가 없는 에시메드는 생각의 방향을 그 여인에게로 돌렸다.

로제 하카드엘라.

그 육신에 들어간 영혼의 본래 이름은 알 길이 없지만…….

지난번의 만남은 그에게 떠올릴 때마다 심경을 엉망으로 헤집는 기억으로 남았다.

여전히 평온한 마음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이라,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에 그는 잠시간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 인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감시를 놓아서는 안 된다.

에시메드는 스스로를 다잡으며, 전령이 전해 온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그 인간은 또다시 그자와 함께 있었다.

니샤의 왕족.

기어코 뒤를 쫓은 것인가?

에시메드는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그 여인은 어떻게든 달아나기 위해 애를 쓰던 지난날과는 달리 순순히 니샤의 왕족을 따라나서는 듯했다.

하지만 일말의 미련은 놓지 못한 듯 허물어진 옛 빛의 신전을 돌아보던 그녀에게, 달빛을 녹여 낸 듯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광휘가 쏟아져 내렸다.

[이건…….]

이그니스?

에시메드는 불에 덴 듯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린셔가 또 왜 저러는 건가 싶은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에시메드는 오직 빛무리에 사로잡혀 자취를 볼 수 없이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만을 응시했다.

틀림없다. 바로 빛의 정령왕의 개입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에시메드는 해소되지 않는 당혹감에 의문을 품었다.

[……저것이 또 내 시야에 들어서는군. 쳐다보지 말거라, 에시메드.]

여전히 기억한다.

아르카네는 제게 있어 유일한 대적자이자 탄생하는 순간부터 영원히 반목할 운명을 타고난 빛의 정령왕을 몹시도 증오하였고, 그로 인해 이그니스가 자신의 눈에 띌 때마다 심기가 뒤틀린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곤 했다.

[가증스러운 것. 본래 내 소유였어야 할 모든 것을 누리며, 그의 마음마저 앗아 간…….]

에시메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과거를 짓씹듯 내뱉으며 턱을 억세게 악물던 그 모습.

에시메드는 언제나 상냥하고 자상했던 형제의 이면을 바라보며 늘 의문스러워했다.

형님의 이그니스를 향한 증오가, 상성의 천적을 향한 적대감이 그 원인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지.

하지만 답을 얻을 길은 요원해 보였고, 이그니스는 아르카네와는 달리 서로를 마주할 때마다 어떠한 부정적인 기색조차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여타 정령왕들이 아르카네를 적대하는 것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조용히 침묵하며 분란이 비롯되어도 나서지 않았을 정도였고…….

한데, 지금은 어찌하여 개입한단 말인가.

저 인간이 그의 눈에 띌 만큼 특별한 존재인가?

로어에게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하긴 했으나, 고작 그런 것으로 이그니스가 움직일 가능성은…….

[에시메드,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진정 좀 해.]

휘몰아치는 의문의 파도에 초조해하는 기색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 것인지.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프린셔가 제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설사 이그니스가 그 인간을 불러들였다 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에시메드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이그니스가 인간에게 해를 입힐 성정도 아니고, 생명을 중히 여기기에 그만큼 지극정성인 자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그런데 왜 내가 그 인간의 안위를 이토록이나 염려하고 있는 거지?

몇 번 마주하며 말을 섞고, 감시를 위해 지켜보았다고.

설마, 그 인간에게 정이라도 들은 건가?

[……말도 안 돼.]

[대체 뭐가? 너 요즘 정말 이상해.]

스스로의 변화를 믿을 수가 없어 멍하니 중얼거리는 에시메드를 지켜보며,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한데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 친우를 향해 프린셔가 옅은 짜증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전령의 시야로, 무사히 돌아온 그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

에시메드는 그에 안도하며 잠자코 흘러가는 양상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로소 되찾았던 평온은 산산이 조각나 으스러졌다.

[……저게,]

역시 이번에도 나타난 니샤의 왕족이 아예 정신을 놓기라도 한 것인지 그 여인을 거칠게 밀어뜨려 두 팔을 옥죈 채 자신의 아래로 내리깔았던 것이다.

순간, 모든 생각이 지워지고 뇌리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그리고 에시메드의 심경에 차오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시리도록 차가운 분노였다.

[에시메드? 어디 가?]

저 거슬리기 짝이 없는 필멸자 하나 죽인다고 하여 유의미한 영향이라도 끼치겠는가?

비록 형님을 숭배하는 일족의 후예이나 하잘것없는 목숨 하나 거두었다고 형님께서 자신을 책망할 리도 없을 것이다.

[에시메드! 대답 좀……. 정말.]

에시메드는 재차 들려오는 프린셔의 물음을 깡그리 무시한 채 검은 안개로 화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프린셔는 씁쓸한 기색으로 빈자리를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칼리드 일카이.

신월의 일카이의 직계 후손이자, 현 일카이 왕가의 수장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젊은 왕제.

그의 입에서 찬란한 밤의 어둠에 가려진 과거의 진실이 흘러나왔고.

그 운율은 곧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었다.

* * *

오래전, 바람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와 빛의 축복을 받은 정령사를 필두로 세워진 두 개의 제국이 역사에 그 치세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시절.

머나먼 변방.

그 어떤 일족도 터를 잡지 않고 등한시했던, 대륙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땅에.

수장을 잃고, 그의 자식인 세 형제를 위시한 작은 무리가 조용히 들어섰다.

그들이 이주한 대지는 어둠의 그림자에 속하는 권역이라, 그 주인의 영향을 받아 한 해의 삼 분의 이가 넘는 시간이 태양이 떠올랐음에도 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세간에서 칭하는 밝은 낮이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으므로 기괴하고도 위험한 지역으로 여겨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발을 들이기를 꺼렸다.

또한 그것뿐이었을까.

그 대지의 주인이 지독히도 생명을 미워하였기에 혹여라도 들어서는 인간들은 족족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으니.

그리하여 종래 어떠한 이도 발을 들이지 않고 두려워하던 그 땅에, 한 어리석은 민족이 스스로 들어선 것이었다.

도망자였던가.

어디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초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던가.

그 척박하고 불길한 땅에 그들이 들어섰던 이유를 이제 와 알 길은 없으나, 무리는 그곳에 터를 잡고 세 형제를 군주로서 받들었다.

‘첫째는 홀로 떨어진 아이나르.

둘째는 영원히 꿈꾸는 안누시카.

셋째는 천공으로 올라선 일카이.’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은 세 형제의 이름을 노래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진실은 신화의 허상에 뒤덮여 어떤 이도 의문을 품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림자의 권역에 속하는 대지는 생명이 자신을 딛고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데, 어찌하여 니샤의 선조들은 그 대지 위에 나라를 건국하고도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가?

바로 이곳에, 신화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맹점이 존재했다.

[생명이란 이 우주에 끊임없이 들끓는 버러지와 같지. 그 어떤 소란도 견디기가 역겨워 이곳에 나의 그림자를 드리웠거늘, 눈먼 자들이 몰려와 심기를 어지럽히는구나.]

어둠의 정령왕은 더없이 잔혹하고도 냉담한 태도로 경고했다.

[이제 죽이는 것조차 지쳤어. ……제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당시의 그를 잠식했던 절망과 권태가 빚어낸, 시혜적인 자비였으나.

‘이곳에서도 살아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면, 저희가 갈 곳은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됩니다.’

‘……세간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와는 달리 어둠의 정령왕이 생각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 같습니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이 땅에 터를 잡는 일을 허락해 달라 간청하는 것이 어떨까요?’

하지만 그들에겐 갈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눈먼 절박함은 감히 향해서는 안 될 나락까지 인간을 이끌었고.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림자의 왕께 간청드립니다. 저희는 당신의 권역에서마저 내쫓긴다면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비참히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권역에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이 세상의 끝이 다다를 순간까지 당신만을 숭배하겠습니다. 또한 당신이 원하는 그 어떤 대가라도 바치겠습니다.’

‘제발, 저희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모든 일족이 그에게 간청을 올리며 사흘 밤낮을 애원하자.

[……어떤 대가라도, 바치겠다고?]

그들의 간절한 염원이 어둠의 흥미를 돋우었다.

[그래. 좋다. ……내 자비를 베풀어 너희가 나의 권역에서 오래도록 살아가게 해 주겠다. 그뿐일까, 나의 뜻에 복종한다면 그보다 더 풍요로울 수 없는 번영까지 내려 주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