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20)화 (121/141)

<120화>

간악한 어둠은 생각했다.

우주는 그를 버리고 빛을 선택하였으며, 순수하여 오직 그만을 따르는 죽음을 제외한 모든 정령왕이 그를 적대했다.

지난한 분쟁은 고루하기 짝이 없고, 아무리 날뛰어 봤자 우주는 결코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여 어둠은 미망을 짓밟고 아주 오랜 시간 속 천천히 이어질 계획을 구상했다.

[그러나 대가는 치러야겠지?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은 단 하나.]

그 끝에는 오직 파멸만이 존재하겠지.

[이 세상에 평화가 도래하지 못하도록, 영원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

그림자에 가려진 창백한 입술이 죽 찢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 * *

인의를 저버리는 것.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은 생명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혼란을 일으키고.

불멸의 존재가 내린 보물을 약탈하여 그림자의 제단에 바치는 것.

[그 모든 것을 이행한다는 전제하에, 너희에게 나의 축복을 내려 주마.]

아르카네는 민족이 섬기는 세 형제에게 그의 권능을 조각내어 탄생시킨 삭의 정령, 일립스를 부여했다.

이는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축복이자 저주, 피를 타고 이어질 영원한 족쇄.

[하나 내 너희에게 이토록이나 자애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너희의 삶이 안온하고 어떠한 절박함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자연히 나의 명을 소홀히 여기게 되겠지? 그러니 약간의 조건을 더하도록 하마.]

잔혹한 만큼 교활하기도 했던 그림자는 양날의 검과 같은 조건을 덧붙였다.

[매년 수백 명에 달하는 인간의 생명을 바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삭의 권능을 운용하는 순간마다 육신이 썩어들어 가게 될 것이다.]

이 순간 세 형제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펼쳐질 잔인한 운명을 직감했다.

하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두려운 존재에게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 형제는 맹세했다.

그의 뜻에 충성하기를.

그가 원하는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기를.

* * *

삭의 정령, 일립스는 세 형제의 육신에 온전히 동화되어 특유의 권능을 발현했다.

아이나르와 일카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포식의 권능을 운용할 수 있었고.

안누시카는 특별하게도, 원하는 미래의 단락을 내다보는 예지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가히 나라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강대한 힘.

한 세대의 한 여아만이 예지의 능력을 타고났으며, 그는 ‘무녀’라는 칭호를 받고 니샤가 원하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내렸다.

하나 이에는 복잡한 조건이 있어 왕가의 골머리를 썩였는데.

바로 앞날을 내다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의 심장을 흐르는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넘쳐 나는 것이 사람이거늘.’

하여 니샤에서는 약탈한 타국의 백성을 끌고 와 도륙하여, 그들의 심장에 흐르던 피를 모아 무녀에게 바쳤다.

수십, 수백, 수천.

그 피에 섞인 목숨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안누시카의 무녀는 더욱 먼 미래를, 더욱 정확하게 내다보고 예언할 수 있었다.

“일생을 피비린내 나는 죄업에 젖어, 미래를 내다보고 예언을 읊으나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는 없습니다.”

안누시카의 무녀에게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환각을 보이게 하는 향을 피운 성소에 갇혀, 오직 니샤의 앞날을 예언하는 도구로서 일생을 착취당하다 숨을 거두고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을 뿐.

그 끔찍하고 비인도적인 이야기에, 나는 역겨움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의문을 느끼셨던 적이 없습니까? 당신의 모국, 하카드엘라의 백성들은 어찌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음에도 그토록 태연하게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던지.”

그리고 당장 도망치는 것이 급해 마음 깊숙이 묻어만 두었던 잔인한 의혹을 꺼내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목숨의 위협도, 나라를 잃은 절망도. 오직 당신을 비롯한 지배 계층이 겪는 고통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칼리드는 냉소적인 태도로 이야기했다.

“니샤는 멸망시키고자 한 나라의 백성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들은 돌연 병력을 이끌고 와 마을을 약탈하고, 몇몇의 주민을 납치하는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백성들은 처음에는 분노하며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들의 나라가 이대로 당하고만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며 항거했지만.

‘당신들의 군주가 우리 니샤에 적대적인 행보를 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우리는 그저 하카드엘라 공을 압박하기 위해 원치 않는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지.’

‘우리도 죄 없는 백성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세상은 니샤 왕국이 잔악한 약탈자, 살육을 즐기는 악랄한 괴물이라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정복국의 왕실만을 무너뜨렸을 뿐, 백성에게는 자유를 내려 주었습니다.’

“분노의 방향을 교묘히 일그러뜨리는 것이지요.”

칼리드가 짙은 미소를 그리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백성들의 사고를 교묘히 비틀어, 본래대로라면 니샤 왕국이 자신들을 해하는 것에 분노해야 하나.

이 모든 비극은 하카드엘라 공이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해 죄 없는 우리가 해를 입고 있는 것이라는 방향으로 유도하여.

‘……세금은 있는 대로 떼 가면서, 외적의 습격이 빈번히 발생하는데 병사 한 명 충원하지 않다니!’

‘이 일의 원흉은 니샤가 아닙니다, 화려한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당치도 않는 평화만 외치는, 저 무능한 하카드엘라 일가의 잘못을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라고요!’

백성들이 지배자를 향해 깊은 증오를 품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지요.”

니샤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수시로 돌아와, 피해를 입힌 것을 사죄하며 식량을 지원하고 붙잡아간 가족을 돌려보내 주었다.

“분명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납치해간 이는, 가택을 부수고 농작지에 불을 지른 이들은 따로 존재하는데.”

나라에서 돌보지 않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식량이라도 지원해 주는 적국의 군사들이냐, 상황이 이토록 극악하게 치닫는데도 눈과 귀를 막고 틀어 앉은 무정한 군주를 향해 충성할 것이냐.

“애국심이란 것은 허상입니다. 당장 내 일신이 굶주리고 괴로운데, 이런 나를 돌아보지도 않는 나라 따위 누가 지키고 싶을까요.”

언제나 부드럽던 회색빛 안광이 더없이 이질적으로 번뜩이며 나를 응시했다.

“그리하여 민심을 돌아서게 했으니, 마지막은 선동입니다. 무능한 군주가 이끄는 약소국의 백성으로 모든 이에게 경시 받으며 궁핍하게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우리 니샤가 너희들의 군주를 몰아내고 모든 억압을 제거해 줄 테니.”

“…….”

“자유롭게, 그 누구에게도 복종할 필요 없이. 소산이 생기면 모두 너희의 것이고, 소속된 곳이 없으나 실상 가족이 아니라면 어떤 이도 서로를 챙기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냐고. 그러니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나은 삶이 펼쳐질 수도 있다. 그렇게 제안하며 전쟁에 앞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백성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것 때문이었나.

나라가 멸망하고, 군주가 전사하였는데도 정작 공국의 백성들은 더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것이…….

하지만 내가, 그들의 선택을 감히 비난할 수 있나?

나는 선득 내려앉은 심정으로 생각했다.

타고난 신분으로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며, 나라의 존망은 곧 나의 명예와 연관되었으니 그만큼 모국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정작 내 나라가 나에게 해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끊임없이 쳐들어와 약탈, 또는 지원을 번갈아 행하며 자유를 주겠다고 현혹하는 적에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혼란스러워 보이시는군요.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는 다 허상일 뿐, 실상은 정령왕의 유물을 빼앗아 아르카네의 제단에 바쳐, 우리의 번영을 이어 가기 위해 벌인 죄악에 불과하니까.”

“……!”

우습게도 나의 고뇌를 단칼에 끊어내 버린 것은 그 적국의 왕제인 자였다.

“백성들은 해치지 않는다? 헛소리하는군. 건국 이래, 우리는 삭의 권능을 이용하는 대가로 생살이 썩어 가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왕실을 무너뜨린 나라의 백성들을 끌고 가 산 제물로 바쳐 대가를 치러 왔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빼놓으면 안 되지요.”

자신의 나라가 숨긴 치부를 남김없이 고백하는 이의 낯빛에 드리운 것은 광소인가, 자조인가.

“안누시카의 무녀가 더 정확한 예지를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백성을 끌고 가 도륙하여 피를 갈취했습니다.”

“…….”

“겉에 두른 정중함, 호의는 모두 가식일 뿐. 이와 같은 행적이 드러난다면 그저 관망하던 대륙의 모든 나라가 합심하여 니샤를 멸망시키려 들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가 두 손을 뻗어, 나의 어깨를 붙들어 쥐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긴 이야기가 모두 끝났군요. 이제 알겠습니까? 당신 나라의 백성들은 지배자를 저버렸습니다. 평안과 풍요를 약속하겠다는 거짓된 속삭임 아래 순순히 복종하였지요. 그러니 당신의 모국에 더 이상의 미래는 없습니다. 애국이라는 허망한 이름 아래,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 말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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