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21)화 (122/141)

<121화>

11. 찬탈

[…….]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초대받지 않은 객의 눈동자가 당황의 빛으로 얼룩졌다.

“혼란스러워 보이시는군요.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는 다 허상일 뿐, 실상은 정령왕의 유물을 빼앗아 아르카네의 제단에 바쳐, 우리의 번영을 이어 가기 위해 벌인 죄악에 불과하니까.”

정령왕의 유물이 무엇이던가.

에시메드는 오랜 기억 속, 그의 앞에서 드물게도 기저에 깔린 분노를 내비치던 아르카네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돌하기도 하지. 그의 허락을 받아 내어, 이 빌어먹을 만치 저열한 방도를 고안해 낸 자는……. 보지 않아도 뻔하구나.]

하얀 가면 아래에 숨겨진 그의 눈이 과연 어떤 감정을 비추고 있었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 유물이라는 것이 인간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형님께서 위험해지시는 것입니까?]

언제나 온화하던 형제의 분노와, 그 아래에 깔린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을 읽어 낸 에시메드는 미진한 불안을 느끼며 말했다.

[……아, 에시메드. 내가 너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구나. 아니야, 나를 염려할 필요는 없단다.]

창백한 입술이 놀란 듯 살짝 벌어지며, 숨을 들이켜다.

곧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다.]

어둠의 정령왕은 다정한 손길로 아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와 언제까지나 함께할 거야.]

태어난 그 순간부터, 늘 자신을 안아 주었던 유일한 존재의 품속에서 에시메드는 안온함에 잠겨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수도 가리지 않고 이용할 것이다.]

스쳐 지나가던 나직한 속삭임을, 그 순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였는데.

[설마, 유물을 지닌 인간의 나라들이 계속해서 멸망했던 연유가…….]

에시메드는 벼락같은 깨달음에 사로잡혀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백성들은 해치지 않는다? 헛소리하는군. 건국 이래, 우리는 삭의 권능을 이용하는 대가로 생살이 썩어 가는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왕실을 무너뜨린 나라의 백성들을 끌고 가 산 제물로 바쳐 대가를 치러 왔습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빼놓으면 안 되지요.”

권능을 부여하는 것에 구태여 대가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하물며 형님께서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그’와 창조주로서의 권한을 다룰 만큼 존위를 지니신 분이시거늘, 자신을 숭배하겠다는 민족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 이유란…….

[하나 내 너희에게 이토록이나 자애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너희의 삶이 안온하고 어떠한 절박함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자연히 나의 명을 소홀히 여기게 되겠지? 그러니 약간의 조건을 더하도록 하마.]

오직 꼭두각시로 이용할 짐승을, 반항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도록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안누시카의 무녀가 더 정확한 예지를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백성을 끌고 가 도륙하여 피를 갈취했습니다.”

“…….”

“겉에 두른 정중함, 호의는 모두 가식일 뿐. 이와 같은 행적이 드러난다면 그저 관망하던 대륙의 모든 나라가 합심하여 니샤를 멸망시키려 들 것이 분명하니까요.”

모든 고백을 이해한 그 순간, 에시메드의 심경에 자리한 것은 당혹과 의문이었다.

형님께서는 이 수많은 일을 내게 숨기고 계셨던 것인가.

피조물은 하잘것없는 존재. 하니 그들의 희생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에시메드는 가시나무로 뒤덮인 손아귀를 그러쥐며 낯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토록 하찮은 존재를 구태여 해쳐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유물을 제거하셔야 했던 사정은 이해한다.

그것은 존재 자체부터 형님을 금제로 옥죄기 위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하나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을, 그저 유희 삼아 학살하셨던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잔악하기 그지없군요, 진정으로.”

망연히 읊조리는 여인의 말은 꼭 에시메드가 느끼는 감상과 동일했다.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

[당신이 내게 가르쳤듯, 그토록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그토록 악의를 품으시는 겁니까?]

에시메드는 닿을 이 없는 물음을 중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증오를 향한 의문이 비로소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

에시메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로제 하카드엘라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넋이 나간 듯, 창백한 안색이 유난히 심경 깊숙이 파고드는 듯했다.

답을 들어야 했다.

혼란의 끝에서 에시메드는 결단을 내렸다.

아르카네를 찾아가, 당신을 숭배하는 민족에게 그토록 잔혹하게 대하셨던 연유가 무엇이냐고.

대체 어찌하여…… 생명을 그토록 증오하는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을 알아야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에시메드는 굳은 기색으로 자리를 떠났다.

* * *

“……그러니, 당신이 물의 유물만 내어놓는다면 더 이상 겪을 필요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당신과, 당신의 자매를 쫓지 않을 것입니다.”

칼리드는 얼굴을 떨군 채 나직이 읊조리며, 나의 손을 힘주어 붙들었다.

“제발, 제 충고를 받아들여 물의 유물을 내어주십시오. 그리고 멀리 도망쳐서…… 평화롭게 살아가십시오.”

간절함으로 물든 회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의 모습만을 담은 채 빛났다.

“정령왕께 청을 올린다면 육신에 동화된 근원의 조각일지라도 다시 분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아니요.”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물의 유물은 내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강고한 결의가 서린 어조로 그 답을 내뱉으며 나는 칼리드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었다.

“비록 당신들로 인해 멸망하였고, 백성들에게도 버려졌다 하나 물의 유물은 하카드엘라 공국의 정신과 다름없는 것이지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 내야 할.”

잠시 멍해졌던 그의 안색이 사나운 분노로 물들며,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대체, 제 이야기를 어떻게 들으신-”

“나를 끌고 가세요. 그리하여 당신들의 그 잔악함을 낱낱이 드러내며 협박이라도 해 보세요.”

격양된 어조로 토해져 나오던 그의 목소리가 멎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을 내어놓아, 구차히 부지할 목숨이라면 필요치 않으니.”

커다랗게 확장된 검은 동공을 응시하며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의 손아귀에 물의 유물이 들어갈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어째서.”

아름다운 낯이 참담함에 짓눌려 일그러졌다.

칼리드는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괴로이 중얼거리며, 수많은 말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때까지 보아 온 당신은.”

나는 그의 시선을 오롯이 마주하며 말했다.

“나를 끌고 가 물의 유물을 빼앗는 일에 대해 늘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어요.”

“……!”

달의 뒷면을 닮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니 지금도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던 것이겠지요. 차마 강압적으로는 끌고 갈 수 없어서, 설득이라도 해 보려고.”

참으로 미련하고도 비겁한 사내이지 않은가.

나는 가라앉은 심경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동요하는 사내를 응시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모든 가치를 저버린 당신의 일족들과는 달리, 끝내 인의를 놓지도, 그렇다고 일족에게서 돌아서지도 못한 채.

좁혀지지 않는 간극에서 끝없이 갈등하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군주의 명, 왕제로서의 의무. 모든 것을 제하고 남은 당신 본연의 마음을 말해 보세요.”

이 기나긴 진실의 끝에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당신은 하카드엘라 공국의 유물을 손에 넣어, 온전히 파멸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닌가요?”

영원한 미궁 속에 갇혀 헤매는 당신을 구하겠다고.

“아이나르 왕가는 대대로 니샤를 통치해 왔지요. 그러니 당신 또한, 원치 않음에도 왕의 명에 따라야 했기에 그 손을 죄악으로 더럽힌 것이고.”

그리하여 비로소 현실을 마주하게 된 당신을…….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당신 또한 니샤의 왕족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선조는 아이나르와 동등한 형제였던 일카이가 아닙니까.”

나의 편으로 끌어들여, 이 썩어 빠진 왕국을 온전히 뒤엎을 것이다.

“저는…….”

칼리드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나는 그의 변론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당신의 조국이 쫓는 풍요와 번영은 결국 악행으로 지어 올린 사상누각에 불과해요. 아르카네는 결코 당신들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며,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당신들에게 주어질 최후는 이때까지 지었던 죄악을 모두 합친 크기의 비극일 테지요.”

“대체, 제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더 이상 듣기 괴롭다는 듯, 칼리드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물었다.

“당신의 나라가 옳지 못한 길로 향하는 것을 그저 안타까이 여기며 방관하지 마세요. 당신이 스스로 나서, 죄업을 쌓는 조국을 막아서세요.”

그리하여 종래, 내가 살아가던 현실의 미래가 도래할 테니.

“당신이 지금의 폭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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