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은 거지?
얼마나 황당무계한 주제를 꺼내는 것인지 스스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귀를 의심하던 칼리드는, 곧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저를 응시하는 찬연한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찌하여 그리 일축하시나요?”
칼리드가 힘겹게 내뱉은 말에, 로제는 자신이 건넨 제안에서 진정으로 문제점을 찾지 못하겠다는 투로 물음을 던졌다.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니샤의 군주는 아이나르여야 합니다. 까마득히 오랜 선조에서부터, 그리 이어져 왔단 말입니다!”
아무리 형제라 칭한들 동등한 처지는 아니었다.
칼리드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턱을 억세게 악물며, 야속하게도 평온한 여인의 낯을 응시했다.
오직 아이나르의 후손만이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안누시카는 예지를 내리는 무녀의 가문으로서, 일카이는 니샤를 수호하는 검으로서.
각자 맡은 사명이 분명히 존재했고 오랜 세월 동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계승되어 왔다.
그러니 저 망국의 공녀가 내뱉은 말은 진정으로 허황한 종용에 불과했다.
“……당신의 사정이 절박하다 하여 아무런 말이나 주워섬기지 마십시오.”
칼리드는 간신히 동요를 억누른 채 로제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끊어 냈다.
“진실로 고루한 명분에 얽매여 있으시군요.”
망국의 공녀가 그 외모와 더없이 어울리는 냉담한 목소리로 그를 비난했다.
“니샤의 백성들은 아이나르가 아닌 다른 왕족이 군주의 자리를 찬탈하는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허물을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정결한 눈길을 피해 시선을 돌리며 칼리드는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의 명망이 드높다 들었습니다.”
들릴 듯 말 듯, 옅은 한숨이 그녀의 입술을 스쳐 지나갔다.
“반면 니샤의 현왕은 정복에만 눈이 멀어, 정작 백성의 삶을 비롯한 나라의 내실에는 무관심하다 들었지요.”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그분께서도 내정에 신경을 기울이실 것입니다.”
그를 변호하는 칼리드의 뇌리로 현 국왕인 오르한 아이나르의 포악한 면모가 낱낱이 떠올랐으나, 그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글쎄요. 애초에 당신들의 건국 신화가 그려 낸 아이나르라는 자의 행적부터 온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만.”
로제는 더없이 차분한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장자라는 이유로 왕좌에 올라, 겉으로는 우애를 중시하며 형제에게 동등한 왕족의 지위를 내려 주었다고 하나. 실상 누이의 예지 능력을 착취하고, 아우는 적군을 사살하는 병기로 이용하였지요.”
“그건…… 다, 나라를 위한 선택,”
“당신의 그 믿음조차 세뇌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요?”
“……!”
그녀의 말이 흘러나온 순간, 하얀 안광이 빛을 잃었다.
칼리드는 단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던 생각에 속수무책으로 매몰되었다.
“비록 나라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아이나르는 단 한 번의 희생도 치른 적이 없지요. 인생을 빼앗기고 평생 미래만을 바라보며 죽어 갔던 안누시카의 후손과, 형제의 명을 받들어 적지를 배회해야 했던 일카이의 후손. 그러나 아이나르는 자신들의 왕국에서 호의호식하며 평탄한 삶을 누려 왔을 뿐.”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심경에 파문을 일으키며, 마침내 종언을 맺었다.
“하지만 형제를 위해 마땅히 불행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당신들은 모든 죄악을 짊어진 채 죽어 갔지요. 타국의 이민족인 나의 시선에도 이리 불공평하게 비치는데, 당신은 정녕 어떠한 의문도 느낄 수 없었나요?”
“…….”
그럴 리가.
사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운명을 향해 의문을 품었다.
‘칼리드. 너는 사람이 아닌 검으로써 존재해야 한다.’
‘이 아버지가 그러하며 너의 선조가 역사에 종적을 남기셨듯, 오직 니샤의 영광과 존속을 위해 네 모든 삶을 바쳐야 해.’
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가장 앞서 적을 섬멸하는 검은 달의 궤적.
그 견고한 족쇄 아래 한낱 개인의 감정과 신념은 허락되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칼리드는 주어진 사명에 순응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해치는 일이 싫었다.
세상 모든 이가 혐오하는 어둠에게 굴종한 대가로 당연히 주어지는 비극을 회피하며,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족의 행태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참극을 종용하는 아이나르의 군주를 마주할 때마다 수없이 검을 쥐었다 포기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같은 선조를 둔 혈족이었기에.
그들의 숨겨진 고통과, 죄업을 쌓아야만 했던 사연을 누구보다도 뼛속 깊이 이해하였기에.
차마 왕의 목을 베어 이 끝나지 않는 죄업의 굴레를 부서뜨릴 수가 없었다.
“……수치스러워한들 어찌하겠습니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한들,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칼리드는 울분에 차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여인을 향해 애꿎은 원망을 토해 냈다.
“형제라는 이름하에, 같은 피를 물려받은 나의 일족을…… 어찌 나의 두 손으로 해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는 이토록이나 유약하고 어리석은 사내였다.
잔혹한 비극 아래 공허한 눈물만을 떨굴 뿐.
어떠한 결단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나지 않는 밤을 영원히 배회한다.
“……그래요. 당신은 이렇게나 연약하지요.”
망국의 공녀는 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적국의 왕제를 내려다보며 싸늘히 말을 던졌다.
“그러니 같잖은 죄책감에 정중함이라는 가면을 둘러,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을 회피한 것이겠지요.”
모든 허물이 낱낱이 드러나 전시되었다.
칼리드는 더 이상 어떠한 거짓도 덮어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당신을 증오하는 대신 기회를 주려 했는데…… 어찌 이리도 고집스러운 건지.”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날아들던 그녀의 목소리가 옅은 한숨으로 끝맺어졌다.
칼리드는 주저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물이 고여, 이전처럼 하얗게 식은 회색 눈동자가 아닌.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죄책감에 스스로를 옥죄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의 밤하늘.
어둠 속 요요히 떠오른 초승달처럼 빛나는 안광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저는,”
“그럼 처음의 제안에서 조금 양보해 드리지요.”
어렵사리 입을 열던 순간, 로제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왕을 비롯한 아이나르 왕족을 몰살하라고 종용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현왕만은 필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한 수 물러날게요. 당신이 왕위에 오르고, 아이나르 일족의 목숨만은 살린 채 유폐시키는 것.”
얼이 빠진 적을 바라보며, 차가운 물빛을 닮은 공녀가 은은히 미소 지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당신 같은 연약한 사내도 받아들일 수 있겠죠?”
나직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오직 대의를 위해.”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예언의 단락이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 * *
“칼리드는 대체 언제쯤 돌아오는 것이지?”
일카이의 왕제를 애타게 기다리는 군주의 재촉에 재상은 깊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드라이어스 왕국이 공녀들을 보호하는 터라, 왕제 전하께서도 많이 힘겨우실 것입니다.”
“명을 받았으면 그를 이뤄 내는 것이 일카이의 덕목이지!”
하나 돌아오는 것은 오만하기 그지없는 불호령이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재상은 그리 불안하면 애꿎은 왕제 전하 혹사시키지 말고 당신께서 직접 나서시라 간언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답답해서 미치겠군, 도통 제대로 일을 하는 놈이 없어.”
그러거나 말거나, 오르한 아이나르는 성급한 걸음걸이로 왕좌를 향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어둠의 정령왕께서 유례없이 기다려 주신다고는 하나, 그분의 자비가 또 언제 변덕스러운 끝을 고할지 모르는 일이거늘! 니샤의 안위를 염려하며 나만 밤잠 못 이룰 뿐이구나.”
“…….”
“되었다, 나가 보거라! 불러 봤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으니.”
니샤의 재상은 몸을 깊이 숙이며 소리 없는 걸음걸이로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각하,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행여 왕제 전하께서 형벌을 받으시는 것은 아닐지 우려됩니다.”
그 앞에 모여 있던 관료들이 다가와 호소했다.
“하늘로 오르신 일카이께서 자신의 후손을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소이다.”
재상은 하얗게 센 수염을 어루만지며 근심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이런 패역무도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었으나,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포악하기 그지없으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왕제 전하께 명을 내리는 일뿐인 현 국왕이 아닌, 일카이의 왕제께서 아이나르의 후계자로 태어나셨어야 했습니다.”
“이보게, 자네!”
젊은 티를 벗지 못한 관료 하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니샤의 재상이 안색을 하얗게 물들이며 소리 죽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