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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23)화 (124/141)

<123화>

“반역죄로 목이 잘리고 싶은 것이오?”

재상의 다그침에 관료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으나 자신이 뱉은 말의 위험성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공국을 멸망시키는 일로 많이 힘든 것은 이해하나, 잊지 마시오. 우리의 군주는 현 국왕 전하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겠습니다. 재상 각하.”

관료들을 돌려보낸 후, 늙은 재상은 하얗게 센 수염을 훑어 내리며 근심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의 심정 또한 방금 떠난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기 전, 왕국에서 명망 높은 학자였던 그는 현 국왕 오르한 아이나르와 칼리드 일카이 왕제를 스승으로서 가르쳤었다.

‘백성의 가엾음을 알고 무력이 아닌 자비로 굽어살피라고? 헛소리하는군, 오직 강력한 군주만이 분열 없는 정치를 이어 갈 수 있을 뿐이다!’

오르한 아이나르는 어린 왕자였던 시절부터 스승의 가르침조차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스승님, 어찌하여 니샤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인가요? 저 또한 왕제의 자리를 물려받은 뒤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해쳐야만 하는 건가요?’

‘칼리드 저하…….’

태생 자체가 선하디선해, 귀한 자와 천한 자의 구별 없이 세상 모든 이를 소중히 여기던 일카이의 어린 왕제는 어느 날 꾹꾹 참아 왔던 두려움을 토해 냈다.

‘그것은, 일카이의 왕제라면 피할 수 없는…….’

차마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리며 어린 제자를 안타까이 내려다보는 스승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소년은, 결국 얼굴을 떨구고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스승님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잊어 주십시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난 지금, 그토록 원치 않았던 의무에 얽매여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젊은 왕제가 가엾기 그지없었다.

“왕제 전하께서 이토록 고생하시는데…….”

국왕이란 자는 안전한 왕궁에 틀어박혀서 불평이나 늘어놓고 있으니.

알현실의 굳게 닫힌 문을 응시하는 재상의 눈가에 짙은 경멸이 어렸다.

“가, 각하! 여기 계셨군요!”

그 순간, 호위군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재상을 향해 외쳤다.

“뭘 이리 소란스럽게 오느냐?”

재상은 미약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숨을 몰아쉬는 호위군을 바라보았다.

“와, 왕제 전하께서…… 돌아오셨답니다.”

“뭐라?”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고대하던 소식이 들려오자 재상의 낯빛이 환해졌다.

“그래, 공녀는 데려오셨다더냐?”

“……그것이.”

서둘러 건넨 물음에 난처히 얼굴빛을 흐리는 호위군을 마주하며, 재상은 불안에 휩싸여 재차 물었다.

“어찌 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문제라도 있는 것이야?”

“……공녀를 데려오지 못하고, 유물의 행방 또한 찾아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

빛이 바랜 안광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허, 어찌 이런 일이……. 아니다, 국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노한 국왕이 애꿎은 왕제를 징벌할 수도 있었다.

아니, 가능성이 아닌 분명한 진실이었다.

국왕이 저토록 심기가 뒤틀린 상황에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귀환한 칼리드 왕제에게, 얼마나 치를 떨 만큼 포악하게 행동하겠는가.

“왕제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빨리 말하거라!”

복잡한 계산을 끝마친 뒤, 재상은 호위군을 향해 무섭도록 채근했다.

* * *

“……전하. 정녕 이 길을 택하고자 하십니까?”

이르마크가 짙은 근심이 어린 목소리로 칼리드를 향해 물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셨습니다. 공녀는 저희가 확보하고 있으니, 그녀의 곁에 있는 수하에게 명을 전달하여…….”

“늦은 것은 이 나라겠지.”

이토록 위태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더없이 평온한 어조로 돌아온 답에 왕제의 부관은 얼굴을 굳혔다.

“이르마크. 내가 반역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한낱 권력욕 때문이 아니야.”

자신을 억누르던 무거운 족쇄를 벗기로 마음을 정한 일카이의 왕제가 더없는 강고함이 깃든 눈빛으로 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면 되돌아오기에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는 이 나라를……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다.”

“……전하.”

언제나 절망했다.

“전하, 왕제 전하-! 어찌 이리도 성급히 귀환하셨습니까!”

그 어느 왕족보다도 이 나라와 백성에게 공헌하였으며, 그로 인해 명예로우신 나의 주군만이 니샤의 왕좌에 어울려 마땅한 분이시거늘.

어찌하여 아이나르가 아닌 일카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주군께서는 왕위에 오르실 수 없는 것일까.

정녕 아무런 방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반역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전하-! 제 목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우선 돌아가십시오! 추후 제가 따로……!”

하지만 당신께서 반역만은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기나긴 고뇌는 언제나 절망으로 끝맺어 왔습니다.

한데 그런 당신께서 드디어 반역을 선택한 지금.

나는 더없이 기쁘다가도, 그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전하. 송구하오나 아뢰고 싶은 청이 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었던 이르마크는 곧 마음을 굳히고 자신의 주군을 응시했다.

“말해 보거라.”

두 사람은 한참 전부터 왕성의 성벽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는 노인을 무시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반역을 택하셨다면 가시는 길을 더 이상 막지 않겠습니다. 하나, 배반한다는 뜻을 담은 반역이라는 표현보다는…… ‘찬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찬탈이라.”

조용히 자신의 말을 읊조리는 주군을 향해 이르마크는 더없이 미소 지었다.

“옳지 못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에게서 부패한 권력을 앗아 가는 것. 주군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하니, 이 미천한 자의 청을 들어주십시오.”

“……그래. 나쁘지 않구나.”

어린 소년이던 시절부터,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켜 온 부관의 청을 칼리드가 승낙했다.

앞으로 자신이 향할 길을 찬탈이라 칭하겠노라고.

“전하-! 제 목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더 두었다간 재상의 목이 나가버릴 것 같으니,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예, 전하.”

그들은 한결 평안해진 심경으로 왕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

왕성으로 들어서기까지 단 한 걸음만이 남았을 때.

칼리드 일카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곁에 없는 한 여인을 떠올리며.

“전하?”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오직 그의 무사만을 빌었다.

* * *

“공녀님, 이곳입니다.”

미로와도 같은 어지러운 통로, 빛 한 점 존재하지 않아 촛불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운 지하.

“콜록, ……이제 도착한 건가요?”

나는 코와 입을 가린 손수건에 잔기침을 토해 내며 촛불을 든 남자를 쳐다보았다.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칼리드가 내게 붙여 준 수하가 옅게 웃으며 녹슨 열쇠를 들어 뻑뻑한 자물쇠를 열었다.

찰그랑-

묵직한 쇠사슬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수십 년간 열린 적 없던 니샤 왕궁의 지하 창고가 서서히 드러났다.

“제 뒤를 따라 들어오십시오.”

어째서 이곳에 굴러다니는지 모를 무거운 벽돌로 문틈을 막아 놓은 뒤, 나는 그 사내를 따라 지하 창고에 들어섰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요.”

“귀한 보물들은 지상의 창고에 보관하고, 이곳은 사용할 일 없는 잡동사니들을 주로 채워 놓는 공간입니다.”

잡동사니……. 그래도 한때는 정령왕이 내린 보물이라 불리던 것들인데.

나는 칼리드의 수하가 해맑은 목소리로 내뱉은 표현에 묘한 씁쓸함에 잠겨 하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한 창고 내부를 돌아보았다.

뜬금없이 니샤 왕궁의 지하 창고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내가 이 과거에 떨어져 온갖 고생을 다 겪게 된 원인.

‘정령왕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찾으신다고요? 그것은 이미 효용 가치를 다한 터라, 왕궁의 지하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니샤 왕궁에 있다고요?!’

정령왕의 유물이 남긴 잔해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내가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맸던 유물의 잔해가 다름 아닌 니샤의 왕궁에 존재했다니.

찬탈을 결심한 칼리드와 길을 떠나던 도중,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충격에 잠겼다.

그럼…… 그냥, 칼리드에게서 도망칠 필요 없이 니샤 왕궁으로 갔다면 훨씬 더 빨리 잔해를 찾을 수 있었던 거……. 아니, 아니야.

그랬다면 빛의 유물이 남긴 잔해만은 끝까지 찾아낼 수 없었을 거야.

이그니스가 직접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나의 고생은 그만한 가치를 지녔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용도를 알 수 없는 하얀 가루가 담긴 항아리를 들여다보던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어두컴컴해서 뭘 찾기도 힘든데 후덥지근하기까지 하니, 열악하기 그지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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