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공녀님, 이곳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칼리드의 수하가 창고의 구석에서 나를 불렀다.
“찾은 건가요?”
나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키며 로브 자락을 두어 번 털고는 물었다.
“……아무래도 유물의 잔해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청동 상자의 겉면에 아르카네의 상징이 새겨져 있군요.”
뭐라고?
나는 서둘러 그의 곁으로 향했다.
“뱀…….”
일렁이는 촛불로 간신히 비추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 꼬리를 물고 원형으로 틀어 앉은 거대한 뱀.
청동의 겉면에 불빛이 흔들려, 마치 녹색으로 빛나는 듯한 뱀의 눈을 응시하던 찰나 턱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따로 자물쇠가 채워진 것 같지는 않군요. 제가 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칼리드의 수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족히 수백 년은 굳게 닫혀 있었던 것 같은 오래된 청동 상자를 열었다.
한 아름 정도 크기의 상자가 열리자, 마치 그 안에 갇혀 있었던 듯한 맑은 공기가 코끝에 감돌았고.
“아…….”
모든 빛을 잃고 껍데기만이 남겨진, 과거의 퇴색된 영광이 깃든 유물의 잔해가 시야에 들어찼다.
“이건…… 바람의 유물이구나.”
천공의 노호.
나는 문명이 시작되었던 시절부터 존재했던 유물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감회에 차 중얼거렸다.
손으로 그러쥐는 부분은 아직도 반질한 광채가 흐르는 원목으로 이뤄졌으며, 그 위를 은이 양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빛이 바래 버린 채찍은 머나먼 과거, 바람의 정령왕의 머릿결을 잘라 만들어 낸 듯 청명한 하늘의 색채를 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대지의 유물.”
근간의 우레.
‘금빛의 양각이 화려하게 새겨진, 거대한 낫 형태의 유물이라고 전해집니다.’
유프스 백작이 이야기했던 대로 물결이 흐르는 듯한 금빛의 양각이 낫의 지지대를 휘감고 있었으나, 그 중간이 부서져 있었다.
아마도 아르카네로 인해 망가진 부분일 터였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다른 유물을 확인했다.
“전기의 유물.”
폭렬의 창.
‘폭렬의 창은 휘황한 금빛의 삼지창 형태를 띤 유물이라 전해집니다. 사실 칸델 공작가가 몰락한 것은 다른 망국들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나, 비극이 일어나기 수백여 년 전부터 유물이 소실되었기에 그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황금의 광채를 잃어버리고, 세 개의 창날 중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 버린 전기의 유물을 내려다보던 나는 의문이 생겨 곁의 남자를 향해 물었다.
“칸델 공작 가문은 로샨 제국의 명문가이며, 더없이 번영하고 있는데…… 전기의 유물은 대체 어쩌다 니샤 왕궁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건가요?”
설마, 몰래 잠입이라도 해서 훔쳐 온 건가?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칼리드의 수하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답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칸델 가문 출신의 영양이 니샤로 망명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전기의 유물을 바치셨지요.”
“……네?! 칸델 가문의…… 그러니까, 칸델의 공녀가 직접 유물을 바쳤다고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의 전말에 나는 진심으로 경악하여 외쳤다.
“그 가문이 내부적으로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분께서는 자신의 가문에 진절머리가 나 유물을 훔쳐서 도망쳐 오셨던 것이 아닐지요.”
“……그렇군요.”
결함이라…….
나는 황금빛 광휘를 등진 채 죽어 갔던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라앉은 심경으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네요.”
아무튼 그 썩어 빠진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문의 일원들이 혈족을 향한 증오로 미쳐 가도록 만들었던 모양이다.
“저희가 지닌 유물의 잔해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숲의 유물과 물의 유물은 각각 알키페와 마리에가 육신에 품었으며, 빛의 유물의 잔해는 이그니스에게 있었고.
불의 유물은 로샨 제국에서 수호하고 있으니.
내가 찾아야 했던 유물의 잔해들은 모두 확인한 셈이었다.
“그럼, 이제…….”
이것들을 어찌해야 할까?
나는 빛바랜 유물을 내려다보며 근심에 잠겼다.
‘……좋습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 칼리드는 오랜 갈등 끝에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왕을 비롯한 아이나르 왕가의 혈족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폐하는 조건으로, 왕위에 오르겠다고 약조했다.
‘반역이 성공한다면 더 이상 도망치며 살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리 만들 테니까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가던 미래에서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가 니샤의 국왕이었으니 칼리드는 아마도 무사히 왕위에 올라 여생을 살아갔던 듯하다.
또한 약조를 어길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아마도 모든 죄업을 자신의 대에서 끊겠다는 맹세를 지킬 것이다.
하면 이 유물의 잔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칼리드가 니샤의 국왕으로 즉위한다면 차라리 누구도 오지 않은 이 버려진 창고에 유물의 잔해를 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돌아간 뒤 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인데…….
“잠시만.”
고민이 깊어지던 그 순간, 퍼뜩 떠오른 기억에 나는 멍하니 유물의 잔해를 응시했다.
‘로샨과 니샤가 적대 관계라지만 무슨 상관이지? 네 동의만 있으면 외교 문제가 비롯될 일은 없을 거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국외로 반출이 불가능했던 유물들 또한 네가 흥미로워할 만한 것들이니까…….’
“설마, 그 유물이라는 게……?”
왜 내가 이 기억을 잊고 있었을까.
나는 손을 들어 입을 막으며 생각했다.
물론, 리아트가 말한 그 ‘유물’이 내가 생각하는 이 ‘유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떠올린 순간, 더없이 확실한 방도가 완성되었다.
“……왕제께서는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요?”
창고의 벽에 기대어 선 채 나를 기다리던 남자가 천장을 흘긋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마도…… 국왕 전하께 보고를 올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 니샤의 국왕은 당연하게도 분노하며 왕제를 질책하거나…… 아니면 더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군요.”
나직이 읊조린 말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주군께서 계획하신 일의 시작이니…… 무디 무탈하시기만을 빌어야겠지요.”
그는 무사할 것이다.
모든 결심을 굳힌 나는 빛을 잃은 유물을 내려다보며, 청동 상자를 닫았다.
“이만 지상으로 올라가도록 해요.”
“유물을 챙겨가지 않으실 것입니까?”
칼리드의 수하가 의아한 듯 물어왔으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우선 왕제 전하께서 찬탈에 성공하신 이후에 유물의 거취를 정하려 해요.”
아직은, 이것을 옮길 때가 아니었다.
“시간이 오래 소요되지는 않겠지요…….”
그저 검은 어둠만이 드리워진 천장을 응시하며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 * *
“네가, 감히……!”
모든 관료가 모인 알현실, 니샤의 국왕은 끓어오르는 진노에 얼굴을 붉히며 손에 잡히는 것을 내던졌다.
“저, 전하!”
챙강-!
유리 자기가 무참히 부서지며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하나는 무릎 꿇은 왕제의 얼굴에 옅은 상흔을 남겼다.
“고정하시옵소서, 왕제 전하께서도 죄를 청하고 계시나이다!”
관료들은 좌불안석이 된 심정으로 군주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왕은 멈추지 않고 역정을 토해 냈다.
“모든 것을 실패했다?! 공녀도, 하물며 물의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으면서 무슨 염치가 있어 돌아온 것이냐!”
“……송구합니다.”
“닥쳐라! 내 그동안 너를 너무 귀히 여겨 주었구나. 이토록 무능하고 유약해 빠진 네놈에게 과분한 명예를 내렸음이야!”
끝없는 폭언이 쏟아져 내렸다.
그럼에도 꿇어앉은 왕제의 낯빛에는 한 점 두려움조차 비치지 않아, 관료 몇몇은 그에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며 불안한 심정으로 국왕을 응시했다.
“유물을 바치지 못하면 우리의 번영도 끝이야! 아르카네께서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고! 아니, 그뿐일까. 당장 삭의 권능을 부리려 할 때마다 이 육신이 썩어 가게 될 터인데……. 칼리드 일카이, 네가 정녕 생각이 있는 것이냐?”
“……입이 열 개라도 올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 전하.”
그 순간, 한참 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왕제가 차분히 읊조리며 국왕을 응시했다.
한 점 동요 없는 고요한 시선을 마주한 국왕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르던 것을 멈추고 왕제를 바라보았다.
“저는 더 이상 사람의 생명을 해치며, 갚을 길 없는 죄업을 쌓고 싶지 않습니다.”
좌중에 자리한 모든 이의 시선을 받으며 일카이의 왕제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