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뭐라……?”
예상치 못한 왕제의 발언에 관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언제나 현명하고 온화하여, 모든 이의 선망을 받으시던 왕제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지금, 네 뭐라 하였느냐?”
아니나 다를까, 오르한 아이나르는 기가 막힌다는 듯 실소하며 물었다.
“죄업을 쌓고 싶지 않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하여 공녀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네, 네가…… 네가 정녕 미쳤구나!”
두려울 만치 포악한 음성이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간 얌전한 개처럼 순응하던 것은 다 거짓이었느냐? 하, 죄업을 쌓고 싶지 않다.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아?! 뜬구름 잡는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저, 전하. 왕제께서는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닥쳐라! 이 상황에서도 저놈을 옹호하는 것이냐?!”
관료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발언하였으나 국왕은 단칼에 잘라 내며 회색빛 안광을 번뜩였다.
“형제라는 이름하에 너그러이 대해 주었더니,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게 날뛰는구나. 좋다, 내 이번 기회에 네 버릇을 완전히 고쳐 주마.”
“전하! 제발,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 순간, 나이 지긋한 관료 하나가 왕의 앞에 무릎 꿇으며 처절히 고했다.
“칼리드 왕제 전하께서 그간 세우셨던 공을 떠올려 주시옵소서. 백성들조차, 가난한 이가 굶주리지 않도록 식량을 내리고 병든 이가 치료받을 수 있도록 구제에 힘쓰시는 왕제 전하를 마음 깊이 섬기며 따르고 있나이다. 하니…… 도를 넘는 처벌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도를 넘는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네놈의 마음속에 니샤의 군주는 내가 아닌 바로 저놈인 것이야! 하니 감히 군주의 결정에 도를 넘는다는 패역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겠지. 여봐라! 저놈을 끌고 가 당장 옥에 가둬라!”
“전하! 안 됩니다!”
“아나드 대신은 선왕께서도 그 능력을 높이 사 총애하시던 관료입니다, 나라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노신을 이리 내치시다니요!”
본보기를 보여 주겠다는 오르한의 생각과는 달리, 왕제를 염려하면서도 차마 나서지 못했던 관료들은 명망 높은 노신이 제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왕제의 구명을 간청하자 갈등하던 마음을 굳히고 속속들이 나서 꿇어앉았다.
“일카이의 왕제께서도 감당하기 힘겨우신 일이셨습니다. 기회를 주시지는 못할망정, 어찌 이리 잔혹한 결단을 내리십니까!”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예기치 못했던 격렬한 반발에 오르한의 안색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 이것들이……. 닥쳐라, 닥치지 못할까!”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관료들의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
자신을 보호하듯 꿇어앉아, 국왕의 잔혹함을 지탄하는 관료들을 응시하던 칼리드의 시선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오르한을 향했다.
마음을 정했더라면 진작에 이루었을 찬탈이었다.
“닥쳐, 닥치란 말이다-!”
하나 인륜마저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간 숨죽여 복종했을 뿐.
“거두어 주시옵소서!”
실상 니샤의 거의 모든 관료들이 자신을 마음 깊이 따르니, 결과는 정해진 일이었다.
“……대체 뭣들 하느냐! 당장 이놈들을 모조리 끌고 가!”
“저, 전하.”
“네놈들마저 나의 명을 거스를 심산이냐?! 당장 저것들을 내 눈앞에서 치우란 말이다!”
망설이던 호위군들은 죄책감이 역력한 눈빛으로 칼리드를 응시했다.
칼리드는 그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 안 돼! 왕제 전하를 지키시오!”
“다들 그만하십시오.”
호위군이 다가와 칼리드를 데려가려 하자, 관료들이 몸싸움이라도 벌일 기세로 일어서는 것을 칼리드가 제지했다.
“……마땅히 따라야 할 명입니다.”
“전하!”
그의 제지에 관료들은 더 이상 호위군을 막아서지 못했다.
자신들 또한 감옥에 갇힐 처지임에도 왕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안색을 내려다보며, 칼리드는 알현실의 문가 앞에 선 이르마크를 응시했다.
그의 부관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지.”
계획의 첫 단락이 성사되었다.
다음의 일은 이르마크와, 재상의 몫이었다.
* * *
“……정녕, 왕제 전하께서 찬탈의 뜻을 굳히셨는가?”
니샤 왕국의 재상은 하루 동안 수년은 더 늙어 버린 듯 초췌한 낯으로 왕제의 부관을 응시했다.
하루 전, 왕성에 들어섰던 때.
‘전하! 어찌하여 돌아오신 것입니까, 이리되면 아니 됩니다!’
성벽에서 목이 터져라 간청했음에도 기어코 귀환한 왕제를 향해 야속한 마음으로 외치던 그는, 곧 굳은 낯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왕제를 마주하며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깨달았다.
‘재상.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예?’
얼이 빠진 채 묻던 순간, 더 이상의 말 없이 건네받은 서신에는 짤막한 글귀가 담겨 있었고.
‘맙소사……. 왕제 전하, 이건 대체…….’
집무실로 돌아와 서신을 확인한 재상은 경악과 두려움에 잠겨 망연히 중얼거렸다.
“왕제 전하의 명성이 국왕을 뛰어넘은 지 오래네. 하나 그럼에도 왕좌를 찬탈하실 생각만은 결코 품지 않으셨던 분이시거늘……. 대체, 그간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재상의 진심 어린 의문에 이르마크는 침잠한 어조로 답했다.
“……저 또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전하께서 더 이상 이 부조리한 사명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아이나르가 왕위를 계승한다.
본래대로였다면 왕실의 충실한 신하였던 그는 결코 선조의 유명을 어기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네. 현왕은 결코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릴 그릇이 못 돼.”
현왕을 마주할 때마다 바라 왔던 하나의 소망.
칼리드 일카이 왕제가 아이나르 왕가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불안에 휩싸일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 일진데.
“왕제 전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안누시카의 무녀를 해방하고…… 그간 횡포를 부리며 군림해 온 아이나르 왕가의 일원들도 모두 살려 유폐하는 길을 택하셨으니까요.”
“그분의 성품은 잘 아네. 결코 사욕을 위해 왕좌를 탐낼 분은 아니시지…….”
고이고 고여 썩어 가기 시작한 나라를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좋네. 그분과 한배를 타도록 하지.”
니샤의 재상은 그 안광을 매섭도록 빛내며, 일카이의 왕제를 자신의 군주로 택했다.
* * *
“왕제 전하께서는 무사하신가? 대답 좀 해 주시게!”
“……송구합니다. 왕제 전하와 관련된 사실을 발설할 수는 없습니다.”
“이 답답한 인간 같으니라고!”
쾅-!
늙은 관료는 자신을 가로막은 철창을 거칠게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대신께서도 옥에 갇힌 처지이십니다. 왕제 전하보다는 본인의 안위에 대한 염려를 가지시는 게…….”
“어린놈이 나이 지긋한 어른을 가르치려 드는 것이야?!”
“……송구합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와 한참 동안 입씨름을 벌이는 동료를 지켜보던 다른 관료들이 한숨을 내쉬며 만류했다.
“그만하십시오, 우리가 화를 낸다 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성이라도 내지 않으면, 속이 갑갑해서 견디질 못하겠는데 어찌하라고!”
시끌시끌했던 감옥의 분위기가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구태여 말은 하지 않아도 다 같은 심정이었다.
덩달아 감옥을 지키던 간수마저 침울한 분위기에 진땀을 흘리며 갑작스레 옥에 갇힌 수십여 명의 관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또각, 또각-
그때, 지하 감옥의 돌벽이 울리며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관이 확인하러 방문한 것인가?
간수는 긴장에 침을 삼키며 자세를 곧게 했다.
끼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감옥 안 모든 이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다, 당신은?”
“아니, 각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그리고 등장한 이는, 놀랍게도 재상이었다.
“어제 그 난리가 벌어져도 그림자 한 점 보이지 않던 분께서, 여긴 또 어찌 오셨습니까?”
아나드 대신이 못마땅함이 역력한 어투로 물으며 재상을 응시했다.
“나는 재상이오. 이 나라의 모든 신하를 이끌고 대표하는 이인데, 당신들이 갇힌 감옥에 방문조차 못 한단 말이오?”
재상은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위선 떨기는.”
오래전부터 재상과는 유구한 앙숙으로 유명했던 아나드 대신은 홱 고개를 돌리며 입을 닫았다.
“재상 각하! 각하께서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혹, 왕제 전하께서 어찌 계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젊은 축에 속하는 관료들이 희망 어린 눈빛으로 재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음……. 알고는 있네만. 다른 귀가 있으니 섣불리 말하기가 어렵군.”
“……저를 내쫓으실 수는 없습니다.”
속내가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재상의 말에 간수는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아쉽구만. 하면 어쩔 수 없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재상을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던 간수는, 곧.
“윽…….”
“몇 시간 정도 몸이 마비될 뿐, 죽지는 않을 것이네.”
허리에 박혀 든 독침을 응시하다 시퍼렇게 질린 낯으로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렸다.
쿵-
“허…….”
“아니…….”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관료들이 얼이 빠진 채 재상을 응시했다.
하얀 천으로 손을 닦아 낸 재상은 빙긋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일카이의 왕제 전하께서 그대들에게 전하실 뜻이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