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왕제 전하의 뜻이라……?”
관료들의 낯이 희색과 염려로 어지러이 물들었다.
“우선, 그분의 전언을 읊기 전에 현 상황에 대해 말해야겠군.”
재상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머금고 읊조렸다.
“이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먼 옛날, 선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형제의 맹약으로 수호받는 일카이 왕가가 멸문당하는 참변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나…… 칼리드 왕제 전하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소.”
“그런…… 정녕, 국왕께서 뜻을 돌리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왕제 전하…….”
관료 두엇이 탄식하며 읊조렸다.
재상은 비탄 어린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늙은 몸은 오래전부터 칼리드 왕제 전하를 스승으로서 가르쳐 왔소. 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그분만큼 왕의 재목에 걸맞은 왕족은 보지 못하였지.”
“……이보십시오, 재상. 지금 그 발언은…….”
감옥의 구석으로 물러나 침묵하던 대신 아나드가 굳은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치달은 상황에서 무엇을 거짓으로 가리겠는가? 진실로 밝히노니, 나, 니샤의 재상 피카르는 칼리드 일카이 왕제 전하를 니샤의 국왕으로서 옹립하고자 하오.”
“!”
“재, 재상 각하! 그 무슨……!”
빛바래 흐릿했던 금빛 안광이 더없는 결의로 번뜩였고, 그를 마주하던 모든 이들의 안색이 경악과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그 말씀은…… 반역을, 계획하신다는 뜻입니까?”
대신 아나드가 가장 먼저 평정을 되찾고 물음을 던졌다.
“그렇소.”
“하, 평소 온갖 충신의 도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파하고 다니시더니…… 노망에 정신이 흐려지기라도 하셨습니까?”
간결한 답에 돌아온 것은 매서운 질타였다.
늙은 대신은 검은 동공을 분노로 번뜩이며 창살을 움켜쥐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자는 오직 아이나르의 후예뿐입니다. 이 지엄한 규율을 잊으셨는지요.”
“……알고 있소. 하여, 그간 수없이 많은 길목을 맞닥뜨렸음에도 결단하지 못하였고.”
“한데……!”
“하나 고뇌하던 나의 등을 떠민 이가 바로 칼리드 일카이 왕제 전하시오.”
가감 없이 흘러나온 진실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이로군! 왕제 전하께선 결코 패역의 죄를 범하실 분이 아니시오!”
대신 아나드가 더없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하면 내가 거짓이라도 읊는단 말이오?”
“그건…….”
“이 일을 내다보시기라도 하셨던지, 왕제 전하께서 내어주신 증명이 있소이다.”
싸늘하리만치 차분한 어조로 대꾸한 재상은 소맷자락에서 말린 서신을 꺼내 펼쳐 들었다.
“저것은…….”
“일카이의 왕제 전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그분의 인장이오.”
그가 높이 들어 보인 서문 위에 내리 찍힌 것은 단 하나.
이 나라에서 오직 일카이의 왕제만이 지닐 수 있는 검은 초승달의 문양이었다.
“칼리드 일카이 왕제 전하께서 내리신 전언이외다!”
시대의 격변을 눈앞에 둔 그 순간.
“나, 칼리드 일카이는 건국 이래 자행되어 왔던 씻을 수 없는 죄악과 부패의 굴레를 끊어 내기 위해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하니.”
숨결 한 자락 내쉴 수 없는 무거운 압도가 어두운 감옥을 내리누르고.
“낡고 썩어 버린 이 나라를 온전히 개혁하여, 새 시대를 마주하고자 하는 이는.”
오직 민족의 번영과, 영원한 풍요를 탐욕하여 두 눈을 가렸던 이들을 돌려세우는 것은.
“역사에 변혁을 이끌고 도래할 위대한 찬탈의 뒤를 따르라!”
끝없는 밤하늘을 유일하게 밝히던 신월의 의지였다.
“니샤의 재상, 피카르는 칼리드 일카이 전하를 군주로서 택하였소.”
늙은 재상은 더없이 강렬한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감옥을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선택은 명암을 완벽히 가르지. 그대들이 왕제 전하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우러르던 주군을 잃는 것이고.”
“…….”
“오래되어 녹슬어 버린 선조의 유지를 깨뜨려 일카이의 왕제를 옹립한다면, 새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소.”
밤의 끝자락, 거대한 운명의 굴레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하니 답하시오. 그대들은 명과 암 중, 무엇을 택할 것이오?”
그리하여 까마득히 오래전.
예언의 무녀가 비밀 속에 파묻었던 미래를 위한 모든 조각이 완성되었다.
* * *
기나긴 밤을 밝힐 빛을 원했다.
녹슨 족쇄에서 벗어나 개혁을 원했다.
폭압이 아닌 자비를 원했다.
이기심을 부수는 정의를 원했다.
탐욕을 버리고 속죄를 원했다.
“네, 네놈들! 네놈들이 정녕 미친 것이로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아이나르의 정당한 후계자인 나를 어찌 배반하는 것이냐!”
외면하여 어떤 길도 선택하지 않은 소수를 제외한 모든 관료와, 일카이의 왕제만을 따른 지 오래였던 장수들이 에워싼 왕궁의 바닥에 비참히 주저앉은 오르한 아이나르가 울부짖었다.
“일카이를 잡아 죽여라, 모든 순리를 깨부수고 탐욕스레 왕좌를 빼앗은 그놈을 참수해 본보기를 보여라! 그래야 마땅하건만, 어찌 너희의 군주인 나를 이리 참담히 내치는 것이냐!”
그의 하렘에 거주하던 후궁과 자녀들을 비롯한 아이나르 왕가의 모든 일원은 왕부로 끌려가 유폐되었고.
남은 것은 쫓겨난 전왕, 오르한 아이나르.
오직 그뿐이었다.
“칼리드 전하.”
아직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오르한은 덜덜 떨리는 잇새를 악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순순히 복종하여,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타국을 떠돌아 물의 유물을 찾아와야 했을 칼리드가 뻔뻔스레 되돌아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지껄였던 것.
그래 지극히 당연하게 분노하여 그놈을 벌하려는 자신을 막아서던 신하들.
군주의 권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고 판단한 오르한은 물갈이를 결심하고 그에게 반발한 자들을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다.
감히 그에게 이런 굴욕을 선사한 칼리드 일카이는 친히 처형할 계획이었다.
한데, 몰락은 한순간이었다.
“칼리드 일카이……. 이 패역무도한 천하의 짐승아! 네가 어찌 형제의 맹약을 어기고 나의 왕좌를 약탈한 것이냐!”
오르한은 진정으로 정당한 자신을 이리 비참히 전락시킨 칼리드를 향해 증오를 토해 냈다.
“……아직도 죄를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그럼에도 칼리드 일카이는 어떠한 수치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더없이 차분히 물었다.
오르한은 진정으로 어이가 없었다.
“죄? 내가 대체 무슨 죄를 범하였느냐? 나는 선조의 유지를 단 한 순간도 어긴 적이 없었다. 위대하신 아이나르께선 이 니샤를 진정으로 사랑하셨고, 그리하여 어둠의 뜻을 받들었느니라! 한데 바로 네가 모든 순리를 어그러뜨린 것이야!”
악에 받친 고함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졌다.
폐위된 전왕을 에워싼 모든 이들의 기색이 점차 혐오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당신들은 그토록 사랑한다는 이 니샤를 위해, 대체 무얼 하셨습니까?”
“뭐라……?”
갑작스레 건네받은 물음에 오르한의 낯에 동요가 일었다.
“떠오르는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아이나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당신들은, 그저 이 나라의 꼭대기에 서서 폭압적인 명령만을 소리쳤을 뿐.”
“그, 그건…….”
“그 명을 받들어 자신의 생을 남김없이 희생하고, 더러운 피로 이 손과 육신을 물들였던 이는 당신들이 아닌 바로 우리였습니다.”
……내가, 한 것.
이상하리만치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할 말을 고르던 오르한은, 무릎을 굽혀 자신을 응시하는 칼리드를 마주하며 그저 마른 입술만 달싹였다.
“당신들의 명 아래 자신의 신념도, 바람도, 고통도. 모조리 내버린 채 자기 자신을 망가뜨려야 하는 우리의 심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다, 당연한 숙명이 아니냐. 나는 아이나르고, 너희는 안누시카와 일카이였다. 지금 나를 가둔 네놈들도 모두 아이나르를 따르던 종의 후손들이 아니냐! 주인이 아랫것에게 명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거늘…….”
“전하, 진정 이 폐주의 망언으로 귀를 더럽히시겠습니까? 당장 처형하여 모든 이에게 알리시지요. 이 니샤에 새로운 군주가 등극하였음을.”
횡설수설 말을 잇던 오르한의 목소리를 끊은 장수가 더없이 증오 서린 눈길로 폐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나는 이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칼리드는 신하의 물음에 나직이 답했다.
“전하!”
“이자를 비롯한 아이나르 왕가의 모든 이를 살려 둘 것이니.”
그를 따라 찬탈에 동참한 이들의 안색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전하, 아이나르 왕족은 그렇다 하더라도 폐주를 살려 두어 봤자 좋을 이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만.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허망한 이야기만을 내뱉는 이자를…… 아이나르 왕부로 끌고 가 유폐시키거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결단에 몇몇 이들이 표정을 굳혔다.
칼리드 일카이는 더 이상 폐주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
창백한 낯으로 저를 망연히 올려다보는, 한때 형제의 맹약으로 묶였다고 여겨 차마 몰아내지 못했던 자신의 군주를 내려다보며.
“또한 이 자리에서 밝힌다.”
칼리드 일카이는 자신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끈 여인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폭정을 휘두르던 아이나르 왕가는 앞으로 영원토록 왕부에 유폐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전쟁과 타국을 향한 약탈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온 나라에 천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