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와 남주의 숨겨진 딸로 태어났다 (127)화 (128/141)

<127화>

“예……?”

좌중에 자리한 이들의 안색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전하. 정녕…….”

재상이 염려 섞인 눈빛으로 물어왔으나, 칼리드는 고개를 얕게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니샤의 왕족들은 아르카네에게서 삭의 권능을 부여받았지. 아르카네는 매년 자신에게 수백의 생명을 대가로 바치지 않는다면 삭의 권능을 사용하는 순간마다 육신이 괴사할 것이라고 조건을 붙였다.”

“전하, 그 사실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한데…….”

“나는 더 이상 삭의 권능을 이용하기 위한 대가를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전보다 더한 충격이 내려앉았다.

“전하, 그 말씀은…….”

“육신이 괴사한다면 괴사하는 대로, 금지된 권능을 이용한 대가를 직접 치르겠다는 뜻이다.”

“하, 어리석기 그지없구나!”

그 순간, 격양된 비웃음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오르한 아이나르의 것이었다.

“우리는 어둠의 정령왕에게 기대어 살아가지. 더 이상 생명을 죽여 대가로 바치지 않는다면 당장 삭의 권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살이 썩어들어 가게 된다. 입방정이야 쉽게 떨 수 있겠지……. 하나, 당장 네 몸이 계속해서 썩어 가는데도 그 고통을 진실로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멍청한 나의 아우야!”

“……전하, 송구하지만 폐주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제 니샤의 군주이십니다. 누구보다 강건하셔야 하는 분께서, 그런 참혹한 대가를 치르시겠다니요.”

그를 따르기로 맹세한 장수가 충정을 담아 고했다.

칼리드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다시 뜨며, 부드러우나 더없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번영을 이어 나가기 위해 진작 치러야 했던 대가를 다른 이에게 전가하였지요. 아르카네의 뜻에 복종한다는 명분 아래 타민족을 약탈하고 유린하며, 끝내 거짓으로 속여 생명까지 남김없이 착취하여 우리의 안위를 구했습니다.”

“……네놈.”

“하니 그동안 외면하고 도망쳐 왔던 대가를 이제야 정당히 치르고자 함이거늘,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폐주여.”

오르한 아이나르는 목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에 휩싸여,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당연히 비웃어야 하는 궤변이다.

가망성이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나를 배반한 아랫것들아, 너희가 직접 생각해 보아라. 왜 강인한 권능과 끊이지 않는 풍요를 스스로 내어놓아야 하지? 당장 모든 분쟁과 약탈을 멈춘다면 어둠의 정령왕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며,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칼리드 일카이와 그 선조 또한 까마득히 오랜 세월을 니샤의 검으로 살아오며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

“…….”

오르한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내뱉으며 희열에 찬 미소를 그렸다.

“한데 이제 와 저놈은 위선을 떨고 있구나. 자, 이제 결론을 내려 보아라. 저놈과 나, 둘 중 누가 더 현실을 바라보는 군주인지!”

“…….”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일카이의 왕제를 믿어 의심치 않아 찬탈에 동행했던 관료와 장수들은 고뇌 어린 기색으로 칼리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저희는 폐주가 아닌 전하께서 니샤의 군주가 되신다면 더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 믿고 전하를 따랐습니다. 한데, 전하의 말씀대로 국정을 다스린다면……. 과연 아이나르가 니샤를 통치할 때보다 더 나은 시대가 펼쳐질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 어찌하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천명을 일부 거두신다면 더 이상의 잡음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던 재상이 칼리드를 향해 조언했다.

온화하고 수용적이었던 그의 성정을 고려했을 때,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나의 천명을 무르지 않을 것이다.”

“전하……!”

하나 칼리드 일카이는 강고함이 깃든 낯으로 좌중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이 니샤가 건국되는 그 순간부터 짓밟혀 사라졌던 정의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이거늘, 어찌 나를 따르기로 결심한 그대들은 주저하는 것인가?”

“전하…….”

“오랜 악습이 가져다주는 먹이에 길들어져 니샤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정녕, 빛의 이그니스와 다른 정령왕께서 아르카네에게 복종한 우리에게 어떠한 단죄도 내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반문을 꺼냈던 이들의 안색이 수치로 물들었다.

칼리드 일카이는 변화하는 공기의 흐름을 주시하며, 오르한 아이나르를 향해 말했다.

“위선이라고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이제 와 정의를 운운하며 스스로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은 위선이지요. 그래봤자 우리의 손에 죽어 간 이들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니.”

“그, 그래…… 네놈도 인정하는 것 아니…….”

엄습하는 불안감에 진땀을 흘리며 주위를 돌아보던 오르한은 제 허물을 스스로 인정하는 칼리드를 비웃으며 입을 열었으나.

“하나 지금이라도 위선을 행세하는 것이 낫지요. 더 이상 씻을 수도 없는 죄악을 쌓으며 뻔뻔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

모든 반론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답 아래.

“하니 답하라, 그대들은 나와 뜻을 함께하겠는가? 아니면 과거의 탐욕스러운 망령에 굴복하여 살아가겠는가!”

오르한 아이나르는 그 앞에서 더는 어떠한 발악도 행할 수 없었고.

“칼리드 일카이 전하를, 우리들의 군주로 받드나이다!”

모든 반란의 불씨는 오직 칼리드 일카이의 말로서 잠재워졌다.

그리하여 니샤의 개혁을 이끈,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현명했던 중흥 군주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이후, 어느 미래.

“……그래, 이것 때문이었군.”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는 수하가 올린 보고를 무참히 구기며 서늘한 회안을 빛냈다.

“이디스.”

잠시간 끓어오르는 분기를 삭히던 그는 곧 죽은 듯이 잠든 작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자비로운 조부께서 남겨 두셨던 과거의 망령이…… 결국 세상으로 기어 나와 이번의 참극을 비롯되게 하였어.”

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를 원망할까?

그런 벌레만도 못한 혐오스러운 자들과 피를 공유한 일족이라 여기며…….

“그러니 네가 깨어나기 전에 모든 걸림돌을 치워 놓으마.”

네 눈앞에 더러운 치부가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아자르.”

“하명하십시오, 국왕 전하.”

“비밀리에 병력을 집결시켜라.”

냉혹한 군주의 음성에 수하가 얼굴을 들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을 머금은 회색 안광이 그의 낯 위로 떨어져 내렸다.

“오늘, 아이나르를 모조리 청소한다.”

* * *

“끄아아아!”

“사, 살려 주십시오, 아악!”

아이나르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은 남자와 여인, 아이조차 가리지 않고 모조리 참살당하는 잔혹한 광경을 바라보던 사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더러운 배신자, 일카이의 군주여! 진실로 무엇을 위해 이리하는 것이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더없이 거만한 태도로 왕부의 옥좌에 앉은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가 꿇어앉은 사내의 앞에 서신 하나를 떨어뜨렸다.

“사방에 존재하던 감시를 피하고 용케도 일을 벌였더군.”

“…….”

그 서신에 담긴 내용은, 다름 아닌…….

“리테라에서 벌어진 그 참극을 내 두 눈으로 보았지. 한데, 의아했어. 존귀한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은 그 속성을 지닌 정령사가 아니라면 인간계로 불러들이지 못하거든.”

고개를 숙이며 더없이 달큰하나 지독한 혐오가 서린 목소리로 뇌까린 리아트는 점차 변화하는 사내의 안색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어찌…….”

그가 떨리는 손으로 쥔 서신에는 바로 수없이 많은 어둠의 정령들을 소환하여 리테라로 보내자는 그들의 모의가 기록되어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닮은 색채를 품은 회안이 허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어찌하기는. 패망한 일족인 너희가 나의 눈길을 온전히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느냐?”

리아트가 비소를 머금고 말했다.

“패망하였다……. 그래, 목숨만 붙어 왕부의 바깥으로 단 한 걸음도 디딜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한 우리가, 아무리 은닉하려 발악한들 네놈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

숨결마다 저열히 들끓는 증오를 뒤섞으며, 아이나르의 수장이 핏발 선 눈으로 리아트를 응시했다.

“모두 다 배신자 일카이를 몰아내고, 우리가 왕권을 되찾아 니샤를 부흥시키기 위함이었다!”

“……오호. 어떻게?”

예상과 한 치도 다름없는 전말에 리아트는 심드렁히 대꾸하며 턱을 괴었다.

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뉘앙스가 짙게 깔린 그의 태도를 마주하던 아이나르의 수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아르카네께서 계시를 내리셨다, 이번의 일을 돕는다면 필히 대륙의 모든 나라들은 현재 니샤를 통치하는 일카이가 뒷공작을 벌여 어둠의 정령을 소환하였다 판단할 것이라고, 하면 너희는 그대로 몰락하게 될 터이니!”

“……한 마디로, 일카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짓거리를 벌였다.”

헛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지고.

“너희 아이나르 놈들은 한 점 달라진 것이 없구나.”

더없이 서늘한 살의가 깃든 회안으로 아이나르의 수장을 내려다보며, 리아트 일카이 칼리드가 말했다.

“더러운 배신자 주제에, 네놈들이 모든 순리를 어그러뜨렸으니 당연한 대가를……!”

“닥쳐라.”

증오에 차 저주를 쏟아 내던 아이나르의 수장의 머리를 짓밟아 비틀며 리아트가 나직이 읊조렸다.

“오래전, 나의 조부님께서 씻을 수 없는 죄업으로 물들었던 이 나라를 겨우 올바른 길로 되돌리셨다.”

“끄, 끄으으윽…….”

피가 통하지 않아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건 얼굴로 꿈틀거리는 사내를 더없이 혐오스레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한데, 감히 그분의 후손인 내 앞에서 그따위 망언을 지껄이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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